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요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나 1990년대에는 세기말 감성 때문인지 당장의 내일보다 먼 미래를 그린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1990년대 등장한 영화 중 20년 후 2010년, 혹은 30년 후 2020년을 그린 영화들을 모아보자. 1990년대의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코드명 J>
정확히 2021년을 지목하고 만든 SF 영화가 있으니,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코드명 J>. 이 영화 속 2021년은 지금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다. 두뇌를 데이터 저장 메모리로 전환한 사회, 그리고 데이터화한 정보나 기억을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주인공 조니 또한 그런 정보 요원 중 한 명이다. <코드명 J>가 제시하는 미래는 그래도 그럴싸한 부분이 맞다. 기기를 착용해 사용하는 BRT온라인은 VR(가상현실)을 연상시킨다. 두뇌 메모리칩이란 개념은 아직 멀었지만 뇌파를 이용해 게임 플레이를 하는 실험이나 뇌에 전극을 삽입해 컴퓨터와 연결하는 '뉴럴링크' 등 두뇌를 보다 발전시키려는 현대 뇌공학과 닮아있다. 이런 구체적인 설정은 <뉴로맨서>로 사이버펑크라는 미래상을 제시한 윌리엄 깁슨이 <코드명 J>의 원작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렇게 미래를 내다본 윌리엄 깁슨조차 예상하지 못한 건 저장매체의 비약적 발전이다. 극중 조니의 두뇌 용량은 고작 80GB. 막말로 윈도우 같은 운영체제만 설치해도 1/3은 사용해야 하는 수준이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SD카드도 200GB가 넘는 시대에, 그것도 정보를 사고파는 요원의 두뇌가 80GB라니. 우리네 현실은 저장매체의 발전이 예상보다 더 급변했다는데, 영화에선 미래 기술은 빨리 당도했지만 저장용량의 발전은 더 뒤처진 셈.

- 코드명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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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로버트 롱고
출연 키아누 리브스, 돌프 룬드그렌, 기타노 다케시, 아이스-티, 디나 메이어, 우도 키에르, 데니스 아키야마
개봉 1995.07.01.
<13층>
스포일러 주의! 나온 지 20년은 된 영화이니 스포일러라고 하기 머쓱하지만, <13층>은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다. 1999년,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든 더글러스 홀(크레이그 비에코)은 상사 해넌 풀러(아민 뮬러 스탈) 살해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그는 풀러가 시뮬레이션에 접속했음을 알고 단서를 찾기 위해 시뮬레이션 속 1937년에 접속한다. 그리고 더글러스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시뮬레이션이 '실제'와 동일하단 걸 깨닫는다. 같은 해 <매트릭스>와 테마는 유사하지만 미래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나 극의 전개가 판이하게 달라 1999년 할리우드 SF의 쌍두마차로 평가받았다.
1999년 배경인 이 영화를 이번 포스트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눈치 빠른 사람이면 알겠지만 영화의 진짜 배경은 2024년이기 때문이다. 1937년의 세계가 진짜 같지만 시뮬레이션이듯, 1999년의 세계 또한 시뮬레이션이었던 것. 2024년은 경량화된 시뮬레이션 진입기를 사용하는 것 외엔 미니멀한 인테리어나 빌트인 가전제품이나 지금 현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멀찍이 보이는 풍경에서 독특한 디자인을 뽐내는 고층건물들이 <13층>이 꿈꾼 미래가 지금은 오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한다.

- 1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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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셉 러스넥
출연 크레이그 비에코, 그레첸 몰, 빈센트 도노프리오, 데니스 헤이스버트, 스티브 슈브, 아민 뮬러 스탈
개봉 1999.11.27.
<LA 탈출>
1981년 <에스케이프 프롬 뉴욕>의 후속작으로 1996년 다시 한번 암울한 2010년대를 그린 영화 <LA 탈출>. 스네이크가 테러리스트로부터 미국 대통령의 블랙박스를 탈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B급 영화 장인 존 카펜터답게 무질서하고 말보다 힘이 앞서는 질척질척한 미래상이 압권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2013년으로 미국이 진작 몰락한 설정이라 그렇게 미래라고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수준. 그러나 이 영화의 도화선이 되는 설정이 무척 특이한데, L.A.가 지진으로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섬이 됐다는 것. 그런 설정을 사용해 전작 <에스케이프 프롬 뉴욕>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발산할 수 있었다.

- LA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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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존 카펜터
출연 커트 러셀
개봉 1996.09.21.
<압솔롬 탈출>
딱 1년 남았다. '탈출 불가능 무인도 감옥' 압솔롬이 나오기까지. <압솔롬 탈출>은 압솔롬 감옥을 탈출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려는 존 로빈스가 주인공이다. 정당방위임에도 무기수들만 모이는 고립된 섬 압솔롬에 갇힌 그는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집단 아웃사이더에 맞서야만 한다. <압솔롬 탈출> 속 2022년은 비인간적인 범죄자들을 아예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흉악범들을 통제한다. 칼은 칼로 맞서는 방법이 일견 사이다처럼 보이긴 하나 주인공 존 로빈스처럼 어쩌면 억울한 사람들이 그곳에 갇힌다고 생각하면 오싹한 면도 있다. 영화와 현실과 1년밖에 차이 나진 않지만, 지금처럼 '인권'을 중요시하는 시대엔 압솔롬 같은 곳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2022년이 온다 해도.

- 압솔롬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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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틴 캠벨
출연 레이 리오타, 랜스 헨릭슨
개봉 1994.07.09.
<포트리스>
<압솔론 탈출> 부분을 읽다가 '어딘가 익숙한데?' 싶었으면 <포트리스> 때문일 것이다. <포트리스>는 <압솔론 탈출>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면서 그 상상력을 더 먼 곳까지 날아간다. <포트리스>에 등장하는 감옥 포트리스는 한 자녀 정책을 어긴 이들을 가두는 곳이다. 이곳이 지독한 건 첫째, 탈출할 수 없도록 지하 30층에 위치해 있고 둘째, 수감자의 몸에 생체 컨트롤러를 심어 고통을 주며 완벽한 통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와 국경을 넘던 존은 포트리스에서 어떻게든 아내와 함께 탈출하려고 한다. <압솔론 탈출>이 범죄자들을 야생에 던져 알아서 서열을 만들고 사회를 구성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이라면, <포트리스>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구성원 모두를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포트리스>의 배경은 2017년. 우리의 2017년에 이런 지독한 감옥도,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멘텔사도 없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