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얼굴들이 있다. 비중은 높지 않지만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어주고 맛을 살려주는 배우들. 그들을 우린 명품조연이라 부른다. 그렇게 점차 5분, 10분씩 신스틸러 역할을 하던 명품 조연들은 어느샌가 대중에게 확실한 신뢰를 주었고, 마침내 명품 조연이 아닌, 명품 주연으로 우뚝 섰다. 오늘은 명품 조연에서 명품 주연이 된 배우들을 소개한다. 내 마음속 명품 주연은 누구인지 댓글로 알려주시길. 

"진짜로 조폭 부른 거 아냐?" 김성균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김성균은 2012년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에서 최형배(하정우)의 오른팔 박창우로 처음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다. 일반적으로 단역부터 차근차근 비중을 늘려 나가는 여타 배우들의 행보와 달리, 김성균은 스크린에 데뷔하자마자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케이스다. 운과 타이밍 등 여려가지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순수하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각이 살아있다.

2대 8 가르마에 장발, 양복까지 정말로 1980년대에 있을 법한 조폭 이미지로 그는 단숨에 영화 관계자들과 관객 모두를 매료시켰다. 물론, 탄탄한 연기력이 받쳐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오디션에서 부산사투리로 연기를 선보였고, “정말 영화에 한 번도 출연한 적 없느냐”는 감탄 어린 질문들을 받았다. 단역 한 번 한 적 없던 그가 비중 높은 박창우 역을 맡게 된 건 그때문이었다. 

<이웃사람>(2012)

그는 바로 다음 작품인 <이웃사람>(2012)에서 살인마 류승혁 역을 맡게 된다. 비중이 고루 나뉘어 있긴 하나 분명한 주연이었고, 이는 두 번째 스크린 출연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이후 비중 있는 조연을 주로 맡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는 ‘악역 전문 조연 배우’로 이미지를 굳히는 듯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 속 삼천포를 만나기 전까지는. 삼천포를 통해 보여준 코믹한 연기로 이미지의 폭을 단숨에 확장한 그는 점차 명품 뒤에 붙던 ‘조연’이라는 수식어를 떼기 시작했다. 

응사 요정 삼천포
<싱크홀>(2021)

이번에 개봉하는 <싱크홀>(2021)에서 그는 캐릭터 포스터까지 있는 동원 역을 맡았다. 코믹 재난 영화 <싱크홀>에서 김성균은 ‘서울에 내 집 마련’이란 목표를 11년 만에 이룬 동원을 연기했는데, 맛깔난 생활밀착형 연기가 주요 포인트다. <싱크홀> 어디서도 조연 김성균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본격적인 생활밀착형·육체 코믹 연기에 도전하는 주연 배우 김성균이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개봉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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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람

감독 김휘

출연 김윤진, 마동석, 천호진, 김성균, 김새론, 임하룡, 장영남, 도지한

개봉 201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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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감독 신원호

출연 고아라, 정우, 유연석, 김성균, 손호준, 민도희, 차선우, 성동일, 이일화

개봉 20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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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

감독 김지훈

출연 차승원, 김성균, 이광수, 김혜준

개봉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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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하나 썰고"가 만든 기적, 조우진
<발신제한>(2021)

‘1999년 단돈 50만 원을 들고 상경한 내게 지금부터 펼쳐지는 모든 일은 기적이다.’ 

영화배우 조우진이 자신의 팬 카페에 올린 글이다. 영화 <발신제한>(2021)으로 데뷔 22년 만에 처음 주연을 맡은 그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게 기적 같다며 소감을 밝혔다. 

<내부자들>(2015)

2009년 <껍데기>로 스크린 데뷔를 한 조우진은 ‘클럽주인’, ‘청 전령장교’ 등 이름 없는 조연들을 맡으며 꾸준히 영화판에 남아 있었지만, 주변부만 맴돌 뿐 그를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6년째 무명 배우로 활동하던 해, 그는 운명과 같은 배역을 만나게 된다. 바로 <내부자들>(2015)의 조 상무다. 원래는 조 상무 부하 역할로 오디션을 봤으나, 오디션 진행을 맡은 조감독이 조 상무 역할 지원 리스트에 조우진을 추가로 넣어 감독에게 제출했다. 얼떨결에 훨씬 비중이 큰 역을 맡게 된 그는 “어떻게 오디션을 봤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혼미한 상태”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여 하나 썰고"
<강철비>(2017)

“여 하나 썰고.”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한 남자가 마치 고기 자르듯 무감정하게 내뱉은 이 대사는 조우진의 대표 어록이 되었다. 그는 <내부자들>로 2016년,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에 노미네이트되면 배우로서 제2의 데뷔, 조우진의 시대를 열게 된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에 그는 소속사에 들어가게 되고, 빠지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배역을 맡는다. 그렇게 명품조연으로 자리매김하던 조우진은 <발신제한>을 통해 주연 배우의 길로 도약했다. 

발신제한

감독 김창주

출연 조우진, 이재인, 진경

개봉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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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

감독 우민호

출연 이병헌, 조승우, 백윤식

개봉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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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역의 끝판왕, 유해진
<왕의 남자>(2005)
<타짜>(2006) / 모두가 아는 그 대사

이 구역의 끝판왕이라고 하면 역시 유해진 아닐까. 1997년 <블랙잭>에서 트럭 운전사 조수 ‘덤프1’로 데뷔한 그는 이름 없는 단역 시절을 거쳐 <왕의 남자>(2005) 육갑이 역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역으로 2006년 제43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타짜>(2006) 고광렬 역을 연이어 맡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에선 조연 철봉 역을 맡아 확실한 신스틸러 역을 해냈다. “음, 파~ 음, 파~ 이것만 기억하면 되는겨. 등신마냥 파, 음~ 하면 뒤지는겨.” 등 주옥같은 대사를 남기며 영화 전체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이후 주연을 간혹 맡긴 했으나 대부분은 공동 주연이었고, 그는 스크린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럭키>(2016) / 네가 없는 그곳은 나에게 정말로 지옥이어쓰어!

그리고 2016년, 그는 영화 <럭키>를 통해 주연배우로서 극을 끌어가는 힘을 마음껏 선보이고, 약 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럭키>가 개봉한 2016년 10월, 영화배우 브랜드평판 조사에서 유해진은 공유와 정우성을 누르고 브랜드 평판 1위를 기록했다.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그는 <공조>(2017)에서 강진태 역을, <택시운전사>(2017)에선 황태술 역을, <1987>(2017)에서는 한병용 역을 맡으며 주연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왕의 남자

감독 이준익

출연 감우성, 정진영, 강성연, 이준기

개봉 200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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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감독 최동훈

출연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유해진

개봉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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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바다로 간 산적

감독 이석훈

출연 김남길, 손예진

개봉 201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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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인 행보의 라미란

라미란은 여러모로 독보적인 배우다. 여배우로선 굉장히 보기 드문 30대 배우 데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단독’ 주연 자리까지 맡았다. 실제로 라미란은 한 인터뷰에서 “그 부분에선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죠. 늦은 나이, 이런 외모로 시작해서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는 거의 없더라고요.”라고 말하며 독보적인 행보에 대해 언급했다. 

(왼쪽부터) <친절한 금자씨>(2005) /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EXO의 '으르렁'을 추고 있는 라미란

그는 2005년, 31세 나이에 <친절한 금자씨> 오수희 역으로 데뷔했다. 개성 있는 비주얼과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는 듯했으나, 이름 없는 단역과 조연으로 계속해서 활동하게 된다. 연기력과는 별개로 인지도가 전무하던 그는 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알리게 된다.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에서 ‘라미란’ 역을 맡아 코믹한 연기를 선보인 그는 이후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라미란 여사 역을 맡아 츤데레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통해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은 그는 2019년, <걸캅스>로 드디어 생애 첫 영화 주인공을 맡게 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 /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 댄스
(왼쪽부터) <걸캅스>(2019) / <정직한 후보>(2020)

사실 그는 <걸캅스>를 맡기 몇 년 전부터 주연 대본이 들어왔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거절했다고. 쭉 조연을 맡으며 한 신 한 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그에게 주연은 부담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힘을 안배하는 법을 터득했고 차근히, 그러나 확실히 주연 배우로 나아갔다. 이후 개봉한 <정직한 후보>(2020)는 라미란을 위한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믹 여배우의 단독 주연 영화라는, 어쩌면 다소 부담될 수 있는 타이틀을 짊어졌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연기를 선보였다. <정직한 후보 2>가 2021년 7월 31일 크랭크인에 들어가면서, 라미란의 주연 행보는 당분간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

감독 박찬욱

출연 이영애, 최민식

개봉 200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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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연출 신원호

출연 성동일, 이일화, 류혜영, 혜리, 고경표, 류준열, 박보검, 안재홍, 이동휘, 최성원, 이민지, 라미란, 김성균, 최무성, 김선영, 유재명, 이세영

방송 2015,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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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후보

감독 장유정

출연 라미란, 김무열, 나문희, 윤경호

개봉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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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댁, 함안댁. 이름 없는 댁에서 주연으로, 이정은
(왼쪽부터) <와니와 준하>(2001) / <마더>(2009)

조연이 주연으로 서기는 힘들다. 배역이 적은 여성 배우일 경우엔 이 난이도가 더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라미란은 그 시작을 끊어준 이고, 이정은은 대표가 되는 사례다.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그는 연기에 재능이 없음을 느끼고 연기보단 연출 쪽에 집중했다. 실제로 2001년 <와니와 준하>에서 단역을 맡은 이후 그는 2009년 <마더>에서 ‘화장터 안경 쓴 아정 친척’ 역을 맡을 때까지 8년간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왼쪽부터)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2015) / <기생충>(2019)

이후에는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연기를 펼쳤고,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드디어 서빙고 보살 역을 맡으며 대중에게 얼굴을 각인시켰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단역을 주로 맡았고, 가끔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던 2019년, 그는 드디어 운명과 같은 영화 <기생충>을 만나 단번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내가 죽던 날>(2020)

그전까지 그의 캐릭터 이름들은 동수이모, 옛집이모, 동네여자1, 여인숙 주인, 덕기처. 이름이 없는 이들이었다. 이정은은 이름을 잃어버린 채 이름 없는 역을 맡았지만, <기생충>의 국문광을 통해 이정은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2020년, <내가 죽던 날>에서 투톱 주연으로 김혜수와 나란히 섰다. 여전히 그를 수식하는 글들에는 명품 조연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보인다. 이름 없는 단역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던 그는 주연이라는 넓지만 까다로운 틀로 이동 중이다. 이름이 없었기에 더 자유로웠던 이정은이 새겨나갈 이름들은 어떤 모양새일지 기대가 된다. 

오 나의 귀신님

연출 유제원

출연 박보영, 조정석, 김슬기, 곽시양, 임주환, 박정아, 이대연, 강기영, 최민철, 오의식, 이정은, 신혜선, 이학주, 김성범

방송 2015,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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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개봉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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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던 날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개봉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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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