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옥자>가 우여곡절 끝에 629일 넷플렉스와 일부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한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와 100여개의 극장 동시 개봉은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이례적인 소식이다. 대체적으로 IPTV로 풀리는 신작 영화들도 2~3주의 홀드백 기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극장에 대한 우선권이 사라진 <옥자>는 그래서 전체 스크린 점유율의 98%를 차지하고 있는 멀티플렉스 3사의 개봉이 불발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옥자>는 개봉을 사흘 앞둔 현재 예매율 3위에 오르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영화는 극장을 통해 먼저 공개된다는 일반적인 형식을 깬 <옥자>는 앞으로 다가올 다양한 배급 플랫폼에 대한 진지한 화두를 던졌다. 봉준호 감독이기에 가능한 시도였고, 또 가능한 논란이었다.

화제와 관심이 끊이지 않은 이슈메이커

이런 외적인 논란만큼이나 영화 내적으로도 <옥자>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5000만 달러(한화로 약 578)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에, 브래드 피트가 세운 플랜B’가 공동제작사로 참여했고, 지난 570회를 맞은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며 주목받은 것이다. <설국열차>에서 호흡을 맞췄던 틸다 스윈튼을 비롯해, 제이크 질렌할과 폴 다노, 릴리 콜린즈, 스티브 연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에, 안서현과 변희봉, 윤제문과 최우식 등 한국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룬 역대급 캐스팅도 단연 이슈였다. 여기에 유전자 개량 슈퍼돼지와 우정을 쌓은 산골 소녀가 돼지를 도축하려는 글로벌 식품 기업에 맞서 모험을 떠난다는 지브리식(혹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식) 플롯을 어떻게 봉준호만의 화법으로 풀어냈는지도 관심이 모아지는 게 사실이다.


화려한 기술 스탭진의 면면도 놀랍다. 촬영에 <델리카트슨 사람들><세븐>, <에비타>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거장 다리우스 콘지가 합류했으며, 봉준호 감독과 같이 각본을 담당한 존 론슨은 <초민방한 능력자들><프랭크>를 썼던 기자 출신의 작가다. 미술을 맡은 케빈 톰슨은 <버드맨><본 레가시>, <걸 온 더 트레인> 등을 작업한 베테랑이고, 의상의 캐서린 조지는 <설국열차>에 이어 다시 한 번 봉준호와 손을 잡았다. <라이프 오브 파이>로 오스카를 수상한 에릭 얀 드 보어가 시각효과를 맡아 가상의 슈퍼돼지 옥자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탄생시켰으며, 이 황당무계한 모험담에 그럴듯한 정서를 불어넣어주는 건 바로 천재음악가, 혹은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로 불리는 정재일의 매력적인 음악 덕분이다.

다리우스 콘지와 봉준호 / 존 론슨

봉준호 영화의 사운드트랙 연대기

 
<옥자>의 개봉을 맞아 그간 발표됐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음악들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연출한 다섯 편의 장편 영화 사운드트랙은 모두 발매되었다(옴니버스로 참여한 단편 <흔들리는 도쿄>도 일본에서 OST가 나왔다). 꾸준히 같은 작곡가들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여느 감독들과 달리 봉준호는 과작임에도 거의 매번 영화음악가들을 달리 해왔다.(심지어 작곡가들의 국적마저 한//일로 다양하다!) 그러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퀼리티를 유지해왔다는 건, 그 음악가들의 솜씨를 넘어 봉준호의 음악적 요구나 연출이 얼마나 날카롭고 정확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이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부터 <옥자>까지 지난 17년간 써내려나간 봉준호 영화의 사운드트랙 연대기.
 

조성우의 <플란다스의 개>
(2000년)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봉준호는 당시 떠오르던 조성우 음악감독과 호흡을 맞춘다.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약속>,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등으로 한국 영화음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는데,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과감하게 재즈의 즉흥적인 잼 세션을 도입해 색다른 실험과 도전을 펼쳐보였다. 일반적으로 작곡가가 모든 큐들을 사전에 작곡하는 방식과 달리, 조성우 음악감독은 영상의 길이에 맞춰 코드의 흐름과 표현 방식, 템포 정도만 정해놓고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방식으로 스코어의 80%가 완성됐다. 따라 세션에 참여한 모든 연주자들이 자연스럽게 작곡에 참여한 셈이다.

독보적인 한국의 색소포니스트 이정식과 최근까지 윈터플레이를 이끌었던 트럼피터 이주한, 역시 1세대 재즈 베이시스트 전성식, 재즈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드럼의 김학인 등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이 기량을 뽐내고 있으며, 마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위해 루이 말 감독이 마일스 데이비스를 초청해 몇 시간 만에 만들어낸 음악처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면서도 생생한 활력으로 꽉 차있다. 이런 에너지들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연출과 만화적인 상상력 그리고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여러 테이크에 걸쳐 각기 다른 큐들이 녹음됐지만, 이 중 어울리는 걸 골라 편집해 영화의 스코어로 썼다. 엔딩에선 와타나베 타케오가 작곡한 그 유명한 애니 <플란다스의 개>의 주제가를 변주해 추억을 반추하게도 만든다.
 

타로 이와시로의 <살인의 추억>
(2003년)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연극 <날 보러와요>를 영화화한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은 그를 단숨에 대한민국 대표 감독으로 격상시킨 작품이다. 유머와 공분을 적절히 교차시켜 완급조절을 해나가는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국내 작곡가가 아닌 일본의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영화음악가인 타로 이와시로가 음악을 담당했다. 그 때문에 외부인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한 독특한 질감과 고유의 정서를 갖게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스산한 피아노의 울림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접근해가는 다큐 느낌의 신스 사운드가 탁월하게 결합돼 사건을 더욱 입체화시킨다.

때때로 여성 보이스와 스트링을 활용하며 점점 침전되어가는 타로 이와시로의 음울하고 서글픈 스코어는 보일 듯 말 듯한 살인범만큼이나 영화에서 희미하게 부유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아련하게 남아 관객들을 괴롭힌다.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내비치는 음악이 영상보다 셀까봐 우려했던 것과 달리 여백과 여운을 만들어내며 봉 감독이 담고자 했던 무능과 역설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여기에 시대상과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제비처럼’, ‘빗속의 여인’, ‘우울한 편지등 삽입곡들이 효과를 더한다. 그의 성공으로 2000년대 중반 히사이시 조와 사기스 시로, 카와이 켄지와 칸노 요코 등 일본의 유명 작곡가들이 한국영화음악을 맡기도 했다.
 

이병우의 <괴물>과 <마더>
(2006년, 2009년)

<살인의 추억>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으로 봉준호는 오랜 기간 품고 있던 자신만의 괴물 이야기를 꺼내드는데, 한국에서 생경한 괴수물을 시도한 것도 놀랍지만, 그 음악에 그간 서정적인 사운드를 들려줬던 기타리스트 이병우를 선택한 것도 꽤나 놀라운 발상이었다. <괴물>이 뻔하지 않은 괴수물이 되었던 것처럼 그 음악 또한 범상치 않은 사운드를 들려준다. 널리 알려진 한강찬가를 비롯해 이병우가 매만진 여러 큐들은 때론 코믹하며, 때론 애수 어리고, 섬뜩하면서도 처연하게 대한민국이란 사회와 가족이란 테마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기타와 트럼펫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뽕끼사운드가 봉준호식 시니컬한 시선과 탁월하게 결부되며 천만의 발판이 되었다.

이 성공적인 결과로 차기작인 <마더>에서도 봉준호는 다시 한 번 이병우와 호흡을 맞추는데, 이것이 필모 중 유일한 두 번째 음악 협업 관계였다. 서늘한 기타 선율로 삐뚤어진 모자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마더>의 음악은 구스타보 산타올라라가 부럽지 않은 미묘한 떨림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보사노바 사운드로 장단조를 오가며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을 비롯해, 난폭하고 강렬한 스트링과 혼의 활용이 인상적인 오케스트라와 <괴물>을 떠올릴 법한 트럼펫 솔로 등 섬세하고 독특한 인장을 남기는 스릴러적 큐들이 실험적이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그 관계의 전말을 보여주는 서늘한 봉준호의 시선과 이병우의 감성이 어우러진 또 하나의 걸작 사운드트랙이었다.


 

마르코 벨트라미의 <설국열차>
(2013년)

<마더> 이후 봉준호가 바라본 세상은 새로운 빙하기가 닥친 디스토피아였다. 박찬욱 감독의 제작 아래 국내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 450억원이 소요된 <설국열차>는 프랑스의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봉준호가 처음으로 시도한 다국적 캐스팅의 영화였다. 따라 음악에서도 할리우드 스탭을 등용하는데, <3:10 투 유마><허트로커>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두 번이나 지명됐던 마르코 벨트라미를 선택한다. 그는 이미 <헬보이><아이 로봇>, <터미네이터 3><노잉>, <더 기버: 기억전달자> 등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최적화된 어둡고 무거운 사운드를 구사하는 데 정평이 난 터라 <설국열차>에서도 그 만개한 기량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풍부한 스트링과 마이너한 테마 그리고 울부짖는 취주악 파트에 과도한 일렉트릭과 앰비언트 효과, 심장 박동처럼 두근두근 고동치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타악 세션의 조화는 추위를 뚫고 달리는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기차를 지독한 심연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뜨린다. 할리우드 특유의 큰 스케일과 박력 넘치는 사운드를 봉준호의 영화에서 즐길 수 있다는 이질적이고 흥미로운 재미도 안겨준다. 여기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크림의 ‘Strange Brew’, 레이 노블의 ‘Midnight, The Stars And You’ 등이 흘러나오며 영화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다채롭게 심어주고 있다.
 

정재일의 <옥자>
(2017년)

이번 신작 <옥자>에선 봉준호 감독 자신이 2014년에 제작했던 영화 <해무>의 음악을 맡아 간접적(?)으로 호흡을 맞췄던 정재일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뛰어난 만능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며, 프로듀서인 정재일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프로 세계에 뛰어든 천재로, 재즈와 가요, 일렉트로니카와 포크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 무용극, 영화 등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이다. <옥자>에서도 이런 그의 팔방미인의 솜씨가 발휘돼 모든 곡들을 작·편곡, 연주를 도맡아 해결했으며, 브라스 밴드와 오케스트라, 빅밴드 그리고 합창단까지 지휘하며 이번 영화음악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영화 <바람><해무>, 연극 <비행소년 KW4839> 등 최근 정재일의 작업물들이 음원으로 발표됐던 만큼 <옥자>의 스코어 역시 조만간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개봉 전에 열린 기자간담회와 각종 시사회 반응들에서 그가 담당한 음악에 대한 언급이 많았기에 전작들처럼 뛰어난 봉준호표 영화음악이 또 하나 탄생했음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세계적인 재료들로도 한국적인 상황과 자신만의 색채를 보여줬던 봉 감독의 영화처럼 정재일의 사운드 역시 이질적이며 색다른 재료들로 보편적인 감성과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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