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이 숫자. 100편이라면 어떨까. 이것도 보는 거라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출연작'을 붙인다면 조금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가? 한 배우가 100편에서 얼굴을 비췄다면, 그의 실력이나 인지도를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100번째 영화를 촬영 중인 리암 니슨을 비롯해, 100편 정도는 가볍게 넘는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들을 만나본다. 아래 배우들은 현재 활동 중인 배우들로 뽑았다. 존 웨인이나 크리스토퍼 리 등 고인이 된 배우들은 제외했다. 


리암 니슨

<말로> 촬영 현장의 리암 니슨

누군가에겐 콰이곤 진, 누군가에겐 테이큰 아저씨, 누군가에겐 <러브 액츄얼리> 사랑꾼. 다양한 장르에서 꺾이지 않는 에너지와 중후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리암 니슨은 현재 <말로>를 촬영하고 있다. 이 영화가 12월(현지 기준) 개봉한다면 그는 극장 개봉한 출연작 100편을 채우게 된다. <테이큰>으로 노년 액션스타로 급부상한 후 특유의 액션 영화 출연을 연이은 그는 이번엔 누아르 스릴러로 돌아올 예정이다. <말로>는 우리에게 <말타의 매> <빅슬립> 주인공으로 유명한 필립 팔로가 등장하는 영화로, 리암 니슨가 필립 말로를 맡았다. 그렇다고 앞선 영화들처럼 원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작품이 원작은 아니고, 존 밴빌(벤자민 블랙)이 쓴 「블랙 아이드 블론드」(Black Eyed Blonde)을 원작으로 한다. 마치 피터팬 원작이 아닌 다른 작가가 쓴 공식 후속작을 영화화하는 것처럼. 1930년대 배경 누아르에서 필립 말로를 연기할 리암 니슨이라니, 상상만 해도 그 멋짐에 벌써부터 심장이 떨려온다.

빵도둑부터 신까지, 리암 니슨의 캐릭터들

사무엘 L. 잭슨

드라마 <톨레미 그레이의 마지막 날들>
사무엘 L. 잭슨의 데뷔 초 모습

아, 이 배우라면 그렇겠다…하고 납득할 만한 배우, 사무엘 L. 잭슨. 작품을 고를 때 다른 것보다 "내가 관객이면 보고 싶은 영화"를 기준으로 삼는 그는 일찌감치 출연작 100편을 넘겼다. 그야말로 즐기는 자의 자세라고 할까, 이미지 고착이나 작품의 규모를 따지지 않고 하고 싶은 작품을 다하기 때문에 현재는 120편을 넘고 140편까지는 욕심내도 될 듯하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핵심 인물 닉 퓨리를 맡은 덕분에 최근엔 MCU 시리즈에서 열일을 하고 있다. 조만간 <시크릿 인베이전>과 영화 <더 마블스>로 돌아올 예정. 그외에 <가필드>(목소리 출연), <더 킬 룸>, <아가일> 등등 차기작이 줄을 서고 있다. 사무엘 잭슨도 이제 고령이긴 하지만 그라면 앞으로도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팬 입장에선 그의 다작보다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에릭 로버츠

<다크 나이트>

이 남자의 필모그래피는 이 남자의 별명이 모든 걸 말해준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오빠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 에릭 로버츠는 출연작들이 누락되곤 하는 국내 영화 DB 기준으로도 200여 편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게임 목소리 출연, 단편 등등 모든 출연작을 다 동원한다면 600여 편(!)이라고 하니 1977년 데뷔 이래 이 남자가 얼마나 소처럼 일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유명한 영화가 <다크 나이트>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현지에선 데뷔 후부터 스타로 인기를 누렸지만, 타국에선 그의 동생 줄리아 로버츠가 훨씬 유명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편. 이렇게 열일하는 데다가 나이가 들면서 꽃미남 출신 꽃중년의 매력이 역력해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겠다.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만 해도 웬만한 배우들 필모그래피만큼 되는데, 그중 데미안 샤젤레 감독의 신작 <바빌론>이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현재 IMDb에 등록된 에릭 로버츠의 출연 예정작 '일부'

대니 트레조

<아메리칸 시카리오: 데이 오브 블러드>
실제 같은 영화 스틸컷

에릭 로버츠에 이어 다작왕으로 뽑을 배우는 대니 트레조. 범죄자 출신 배우로도 유명한 그는 <폭주 기관차>라는 영화에서 에릭 로버츠의 복싱을 코칭해주다가 배우로 발탁됐다. 이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최애 배우로 선택받으면서 <데스페라도>, <스파이 키드>, <마셰티> 등에 출연했다. 특유의 코수염과 험악한 인상으로 눈도장을 찍었지만, 이미지를 깨는 코미디 연기도 잘 소화하는 편. 스크린 밖에서는 자신처럼 범죄자 출신들을 돕는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출연작은 영화만 200편이 넘는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비디오 시장을 겨냥한 것들이지만, 그래도 이만큼 그에 대한 수요가 높고 본인도 이제 70대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열일 중인 걸 보면 대단하다 싶다. 


이자벨 위페르

<어바웃 조안>

액션 영화나 공포 영화 시장에서 수요가 높은 남자배우들과 달리 여성배우들은 그렇게 출연작을 대거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적은 편이다. 할리우드 배우 중 그나마 100편을 넘긴 배우는 우피 골드버그가 있고, 수잔 서랜든이 90여 편(드라마 포함이면 100편이 넘는다) 정도 된다. 할리우드가 본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지도와 작품수를 모두 충족하는 여성 배우는 이자벨 위페르다. 위태로운 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그러나 화려하지 않고 단정하게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전 세계 영화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그 응축된 연기는 폭력에 노출된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때 무척 인상적인 잔향을 남긴다. 다작을 하면서 휴식기도 거의 없기 때문에 120여 편에서 그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할리우드라는 한정된 곳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120여 편이나 출연했다는 것이 더 위대해보이기도. 

하나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담아내는 이자벨 위페르(<마담 싸이코>)

브라마난담

'활동하고 있는 배우 중 최다 영화 출연' 기네스 기록에 오른 브라마난담

마지막은 할리우드 배우는 아니지만, 활동 중인 영화 배우 중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인증 받은 사람을 소개한다. 브라마난담(Brahmanandam Kanneganti)은 2016년에 1000편에 출연한 배우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 발리우드 배우이니 출연작 대다수가 내수용 영화라 이름이든 얼굴이든 낯선 사람이 더 많을 듯하다. 애초 발리우드는 한 해에 1000편 이상 작품을 제작하는 시장이니 다작으로는 웬만한 배우가 따라잡을 수도 없고. 그렇지만 30년 만에 1000편에 출연한 배우는 브라마난담이 사실상 유일해서 기네스에 등재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이었는지 2020년에 출연작이 확 줄긴 했지만 2021년부터 출연작이 다시 급증했다. 발리우드에서도 이만한 다작 배우가 또 나올 수 있을런지 궁금하긴 하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