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라는 말, 참 뻔하다. 하지만 이 사람에겐 그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 흔히 '부캐의 시대'라서 여러 분야를 도전하는 예술가들이 많지만, 이 사람은 본업과 부업 관련 없이 전천후 활약 중이니까. 누군가는 배우라고 하면 놀라고, 누군가는 가수라고 하면 놀랄 백현진이 그 주인공이다. 가수로 데뷔해 지금은 배우와 전시예술가로 더 많이 알려진 백현진이 누군지 최근 작품으로 만나보자.
이분 가수잖아요 편
백현진을 보고 가수라고 떠올리는 사람은 음악 좀 듣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유행하는 노래 외에 다양한 장르를 듣는 사람이거나. 백현진은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의 멤버다. 1994년 결성 당시 원일, 장영규, 백현진 세 사람이 뭉쳤다가 1997년 1집 '손익분기점' 발매 후 원일을 탈퇴해 현재 장영규, 백현진의 2인 밴드로 더 유명하다. 어어부 프로젝트라는 독특한 이름처럼 이들이 지향하는 음악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노래에 서사를 부여해 비극적인 사건을 스토리텔링으로 전하는 이들의 음악은 웬만한 음악방송에도 만날 수 없었고, 그래서 음악 듣는 사람들 사이에 숨은 보석 같은 밴드로 뽑히곤 했다.
1994년부터 2014년까지 정규앨범 4장과 EP 앨범 1장을 발매했다. 중간에 특이하게도 딱 하나, 영화 음악에 참여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팬이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의 분위기나 유괴 때문에 구렁텅이로 빠진다는 작중 스토리 등에서 어어부 프로젝트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어어부 프로젝트의 곡이 사용되거나 변주된 영화는 있어도 직접 영화 음악을 맡은 건 이 <복수는 나의 것>이 유일하다.
'어어부 프로젝트'는 현재 휴식기인 상황. 활동을 안 한지가 한참 되긴 했지만 공식으로 해체를 선언한 적도 없고 밴드 이름도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현재는 장영규, 백현진 모두 개인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장영규는 영화 음악감독(<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암살>, <곡성>, <부산행> 등)과 밴드 이날치의 리더로 활동 중이다. 백현진은 솔로 앨범을 3집까지 발매했고, 방준석 음악감독과 함께 '방백'으로 활동했으며 (이어서 소개할) 배우, 전시예술가, 화가 등으로 활동 중이다. 개인전을 열 정도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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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어어부 프로젝트
발매일 2014.12.18.
이분 배우잖아요 편
반면 흔히 말하는 대중가요를 자주 듣거나, 드라마와 영화를 잘 챙겨보는 사람에겐 백현진이 배우로 더 익숙할 것이다. 올해만 해도 <브로커>, <고속도로 가족>, <가우스 전자> 등 여러 작품에서 얼굴을 비쳤으니까. 백현진이 처음 배우로 출연한 작품은 송일곤 감독의 <꽃섬>. 이후 몇 편의 영화를 거치다가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에서부터다. 배우 자신과 유사한 성격의 캐릭터를 맡기는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에 맞춰 작곡가 역으로 출연한 백현진은 이후 <은교>, <경주>, <산타바바라> 등에 출연했다. 2015년 <해어화>와 <특종: 량첸살인기>를 기점으로 상업영화 출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대세는 백합> 등 웹드라마 출연이 곧 드라마 분야의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영화 출연작이 많긴 하지만 백현진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는 드라마가 한몫했다. 특히 <모범택시>, <악마판사>, <해피니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네 작품이 2021년 출연작인데, <모범택시>와 <악마판사>에서 역대급 악역을 선보이면서 시청자들에게 완전 눈도장을 찍었기 때문.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 중에도 찌질하면서 어딘가 서늘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오태영 상무가 가장 유명한 것을 보면 캐릭터를 특유의 스타일로 승화하는 방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하다. 어어부 프로젝트 당시 비루한 삶을 가사로 녹여낸 그의 관찰력이 연기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감독들의 스타 아니세요? 편
어어부 프로젝트부터 독특한 감성을 뿜어내서인지 한국 감독들이 샤라웃한 사례가 많다. 앞서 말한 <북촌방향> 홍상수는 이 작품에 이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도 진영 역으로 백현진을 캐스팅했다. 본인이 연기를 시켜놓고 촬영 중 '얄밉다 얄미워'라고 감탄(?)했다고. 장률 감독도 백현진을 자주 기용했다. <경주>, <필름시대사랑>, <춘몽>,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까지 총 네 작품.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특별출연이라고 해도, 4편 연이어 출연한 것은 장률과 백현진의 사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백현진 또한 <경주>의 엔딩곡 '사랑'을 직접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했다.
위의 두 감독 말고도 가장 열렬한 사랑을 표한 감독은 박찬욱이다. 박찬욱은 백현진을 두고 "한국에서 천재라고 주저 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했다(물론 박찬욱은 천재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사용하긴 한다). 장영규와 백현진을 사랑한 감독답게 <복수는 나의 것>의 음악을 어어부 프로젝트에 맡겼고, 단편 <파란만장>에도 어어부 프로젝트를 출연시켰다. 박찬욱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박찬경도 <만신>에서 백현진의 노래를 사용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계급과 자본주의적 발상을 날카롭게 그리는 데 정평 난 임상수 감독도 <바람난 가족>은 어어부 프로젝트에게, <돈의 맛>은 백현진에게 엔딩곡을 맡겼다. 각각 '즐거운 나의 집', '그 맛'이란 곡이다.
직접적으로 찬사를 내비치진 않았지만 박해일도 백현진과 사이가 돈독하다. 장률 감독 영화 3편과 <은교>, <상류사회> 등에서 함께 출연한 두 사람은 송새벽과 함께 사모임도 자주 갖는다고. 2019년 백현진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뮤직비디오에서 박해일이 열심히 춤추는 모습이 담기기도 했다.
2020년대의 백현진
여기까지 왔다면 백현진이 어떤 배우, 예술가인지 얼추 알았으리라. 그래도 아직 감이 안 잡히는 이들을 위해 백현진의 2020년대 캐릭터를 소개한다. 영화에서는 앞서 말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오태영 상무를 필두로 <십개월의 미래> 옹중(산부인과 의사), <경관의 피> 권기안(사채업자), <브로커> 최형사, <서울대작전> 전 장군(그 사람 맞다), <고속도로 가족> 안도환이 있다.
그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힘을 못 썼던 영화계였기에 백현진 또한 드라마 캐릭터로 더욱 활약한 편. <모범택시> 박양진과 <악마판사> 허중세는 2021년 베스트 악역급 존재감을 남겼다. <해피니스>의 오주형,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김성남, <한 사람만> 하용근, <가우스전자> 기성남 등 다양한 캐릭터를 온전하게 소화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콘텐츠 <무빙>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종말의 바보>를 차기작으로 두고 있다.
덧. 백현진의 미술계 활동까지 알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자.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