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리스트 / 2022년 리스트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는 10년 간격으로 영화감독 및 평론가에게 설문을 받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선정한다. 이제는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인 명장이 된 봉준호 감독 역시 2012년에 이어 2022년에도 설문에 참여했다. 그가 선택한 '인생 영화'를 살펴보자.


싸이코
Psycho
알프레드 히치콕, 1960

봉준호의 리스트에서 눈에 띄는 점. 서로 다른 국적(영국, 한국, 이탈리아)의 세 거장이 1960년에 발표한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전체 리스트에서 2위를 차지한 <현기증>(1958)의 알프레드 히치콕 작품 중에서 봉준호 감독은 <싸이코>를 선택했다. 도로변에 위치한 베이츠란 이름의 모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로, 주인공(이라 여기게 되지만 결국 일찌감치 살해당하고 마는) 마리온이 회사돈을 가지고 도망치다가 살해당하고 그녀의 애인과 언니 그리고 탐정이 마리온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이 크게 전반-후반으로 나뉘어진 구조 아래 펼쳐진다. 동그란 이미지에 대한 히치콕의 집요한 연출이 돋보이는, 샤워 중인 마리온이 칼에 찔리는 신이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히치콕의 전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8) 대비 1/5 제작비로 만들어진 흑백영화인 <싸이코>는 그보다 5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개봉 초기 호불호가 갈렸지만 훗날 히치콕 영화의 정수로 회자되고 있다.


하녀
김기영, 1960

유일한 한국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선택했다. 10년 전과 같은 결정. 지난 2015년 봉준호는 아시아 영화 10편을 꼽는 리스트에서 <하녀>와 <이어도>(1977) 김기영 영화만 둘을 택했고, <기생충>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기자회견에서 "클로드 샤브롤, 알프레드 히치콕과 함께 <하녀>를 만든 한국 거장 김기영의 영향이 컸다"고 밝힐 만큼 꾸준히 그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왔다. 중산층 가정에 하녀가 들어와 주인집 남자를 소유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면서 벌어진 기이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녀>를 두고 봉준호는 "여성들의 섹슈얼한 욕망을 다룬 범죄 멜로드라마지만, 동시에 아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당시 한국사회와 계급이 변해가는 상황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소개한 바 있다. 김기영은 이후 <화녀>(1972), <화녀 82>(1982) 등으로 제 작품을 셀프 리메이크 했고, 임상수 감독이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등과 함께 리메이크 한 <하녀>(2010)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기도 했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
Rocco e i suoi fratelli
루치노 비스콘티, 1960

1960년 영화 셋 가운데 2022년 리스트를 통해 처음 지목된 작품.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시칠리아 3부작' 중 하나인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자란 가족이 북부 도시 밀라노에 이주해 끈질기게 생존하는 과정을 그렸다. 제목은 토마스 만의 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이탈리아 남부 농민의 감정을 묘사한 시인 로코 스코텔라로의 이름에서 따왔다. 로코는 <태양은 가득히>(1960)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이 연기한 셋째 아들. 데뷔 이래 이탈리아 서민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네오리얼리즘을 고집하던 비스콘티는 멜로드라마 <센소>(1954)를 발표한 후 강한 반발에 직면하고, <로코와 그의 형제들>을 마지막으로 네오리얼리즘식 연출에 작별을 고했다. 1960년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대부>(1972)를 만들며 영향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이마무라 쇼헤이, 1979

앞서 언급한 아시아 영화 10선에서 봉준호가 김기영 외에 두 작품을 고른 또 하나 있다. 일본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1964년 작 <붉은 살의>와 1979년 작 <복수는 나의 것>을 꼽았다. 그 중 10년 전에도 <사이트 앤 사운드> 리스트에서 선택한 <복수는 나의 것>을 다시 한번 최고의 영화로 선택했다. 제목에서 잘 드러나듯 박찬욱 감독 역시 이 작품에 존경을 바치며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을 차용했다. 1963년부터 2년간 5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니시구치 아키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키 류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니시구치 아키라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의 행적까지 소상히 훑어 다큐멘터리적인 맛까지 더한 원작에 맞춰 이마무라 쇼헤이 역시 주인공 에노키즈 이와오와 그와 연을 가진 캐릭터들을 아우르면서 감독이 평생 그려온 갖가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에노키즈의 비정한 행적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분노의 주먹
Raging Bull
마틴 스코세이지, 1980

봉준호는 <기생충>으로 오스카 작품상 수상 소감 중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영화 공부할 때 되새겼고 이 말은 위대한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가 한 이야기라며 (<아이리시 맨>으로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객석의 스코세이지에게 존경을 바쳤다. 그리고 이번 리스트에서도 스코세이지의 걸작 <분노의 주먹>을 선택했다.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복서 제이크 라모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분노의 주먹>은 라모타가 권투 선수로서 승승장구하고, 이후 방탕하고 폭력적인 삶을 이어가다가 몰락하는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한 사람의 복잡한 면모를 그려냈다. 복싱 경기의 다이내믹함을 완벽하게 구현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에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처넣는 인간의 어리석은 면모까지 지독하게 포착하는 연출에 명감독들의 열렬한 지지가 이어졌다. 한편 봉준호는 좋아하는 스코세이지 영화로 <분노의 주먹>과 더불어 <특근>(1985)과 <좋은 친구들>(1980)을 지목했다.


비정성시
悲情城市
허우 샤오시엔, 1989

대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역시 봉준호가 꾸준히 흠모를 드러내온 걸작이다. 대만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1945년 8월 15일부터 1947년 2월 28일까지의 시간을 담은 <비정성시>는 대만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으로 회자되는 '2.28 사건'을 소재로 했다. 영화는 대만의 광복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지룽의 부호 임아록의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문을 열지만, 이후 임아록의 네 아들이 각자 하나씩 망가지는 과정을 풍경처럼 멀찌감치서 바라보면서 대만 현대사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비정성시>를 통해 1989년 당시 신인이었던 양조위가 널리 얼굴을 알렸다. 영화에서 양조위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넷째 아들 문청을 연기했는데, 이는 홍콩 출신으로 대만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던 양조위의 핸디캡을 고려한 설정이었다. 그동안 복잡한 판권 문제로 상영되는 기회가 드물었는데, 얼마 전 4K로 복원되면서 더 많은 곳에서 선보일 수 있게 됐다.


큐어
キュア
구로사와 기요시, 1997

한국에서는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에 영향을 줬다고 잘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릴러. 도쿄 등지에서 일련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가해자는 모두 최면에 걸린 듯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해자들이 만난 마미야가 붙잡히는데, 정신병을 앓는 아내를 돌보고 있는 담당 형사 타카베는 마미야에게 이끌린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당시 일본에 개봉했던 <양들의 침묵>(1991)에 감명 받아 이미 범인이 붙잡힌 상태에서 형사와 범인이 심문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에 느닷없이 발생하는 살인을 그리는 방식과 전대미문의 캐릭터 마미야가 내뿜는 음산한 분위기 등이 아트하우스 영화 팬과 호러 마니아를 두루 사로잡았다. 1990년대 초 자국에서 저예산 비디오 영화를 주로 연출하던 실력자로 평가 받던 구로사와 기요시는 1997년 공개된 <큐어>를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작년 한국에 처음 개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조디악
Zodiac
데이비드 핀처, 2007

비교적 동시대 작품인 21세기 영화들이 3편이나 포진된 점 역시 봉준호의 리스트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은 10년 전 리스트에 포함된 유일한 21세기 작품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는 조디악 킬러의 연쇄살인사건과 그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삽화가, 기자, 경찰 세 사람의 추적을 그린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그 캐릭터)가 쓴 논픽션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원작에 맞춰 영화 역시 현재까지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아서 리 알렌을 범인인 것처럼 전개된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박현규를 그리는 방식과 유사한 편. 살인을 재현하는 시퀀스는 데이빗 핀처 특유의 현란한 연출이 돋보이는 한편, 범인을 추적하는 인물들의 행보는 차분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그들이 오랜 시간 느낀 피로를 2시간 40분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 자체로 전달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2015

조지 밀러의 필모그래피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멜 깁슨 주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액션 영화 <매드 맥스>(1979)로 데뷔해 시리즈를 연이어 성공시킨 후 코미디(<이스트윅의 마녀들>, '꼬마돼지 베이브' 시리즈), 가족 드라마(<로렌조 오일>), 어린이 애니메이션('해피 피트' 시리즈) 등 장르를 종횡무진 하는 영화 세계를 선보였다. 그리고 <매드 맥스 3> 이후 30년 만의 속편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내놓았다. 2013년 개봉된다던 영화가 2년이나 미뤄진 바 있는데, 대개의 경우처럼 결과물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기술시사에서 영화를 본 제작자들이 너무 흡족한 나머지 예산 문제로 찍지 못한 장면들을 추가로 찍어달라고 청하게 되면서 생긴 딜레이였다. 조지 밀러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통해 녹슬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어마어마해진 액션 연출 솜씨를 뽐냈고, 전세계 영화인들이 찬사를 바치면서 201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됐다. 봉준호는 이번 리스트에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이를 연출한 밀러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봉준호의 <기생충>을 선택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알리체 로르바케르, 2018

봉준호의 리스트 속 최근작은 이탈리아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2018년 작 <행복한 라짜로>다.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시골마을, 순박한 청년 라짜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지주인 후작부인에게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다. 도시에서 마을로 찾아온 후작부인의 아들 탄그레디는 라짜로를 이용해 납치극을 꾸미고, 그로 인해 경찰이 찾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당대 가장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구축하고 있는 촬영감독 엘렌 루바르가 16mm 필름에 담아낸 아름다운 풍광은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한데, 영화는 어떤 분기점을 맞아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보다 잔인하고 숭고한 풍자극으로 도약한다. <행복한 라짜로>가 첫 연기인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순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우화를 따라가다 보면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비관을 마주하게 된다. 봉준호는 근래 흥미로운 감독들을 추천하는 자리에서 알리체 로르바케르를 지목하며 "부패한 거물과 맞서는 순수한 인물들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조합"이라고 그의 영화 세계를 설명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