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본 영화 시장은 끝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보인다. 실제로 일본 영화 시장은 만화 문화가 익숙치 않은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애니메이션 실사화 영화가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 영화 트렌드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갈라파고스화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느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상한 애니 실사화만 만들잖아’라고 하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일본 영화의 최전선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여주는 장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설 원작 영화다. 

이 구역 최고의 인기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부터 지난해 11월에 개봉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까지. 두 작품이 크게 흥행해 어쩐지 국내에서는 ‘일본 소설 원작 영화 = 로맨스’라는 공식이 굳어진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그렇진 않다. 오늘은 누구도 흥행을 예측하지 못했지만, 스토리가 가진 힘만으로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일본 소설 원작 영화들을 소개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감독 미키 타카히로
출연 미치에다 슌스케, 후쿠모토 리코, 후루카와 코토네, 마츠모토 호노카

<오늘 밤,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진다해도>(2022)

지난해 11월에 개봉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오세이사’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입소문을 타며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국내 개봉 일본 실사 영화로서는 21년 만의 일로, 최종적으로는 <주온>을 제치고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실사 영화 2위 자리를 거머쥐었다. <오세이사>를 수입했던 미디어캐슬 강상욱 대표 역시 이렇게 흥행에 성공할 줄은 전혀 몰랐다고. “작게는 20만 명에서 크게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년 / 46만여 명) 정도 흥행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센세이셔널하다”고 감상을 전했다. 

10대~20대 여성에게 특히 흥행했기 때문인지, 틱톡에서는 <오세이사>의 명장면을 따라하거나 편집한 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오세이사> 같은 영화 추천해달라는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 흥행의 정도를 짐작케 했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세이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여고생 마오리(후쿠모토 리코)와 동급생 도루(미치에다 슌스케)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눈을 뜨면 사고 이후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는 마오리는 기록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도루는 마오리의 병을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그의 곁을 지킨다. 한때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로맨스 영화가 열풍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세이사>의 소재가 30대 이상에게는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과거 영화들을 보지 않은 1020 세대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을 거라는 게 수입사 대표의 의견이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감독 미키 타카히로

출연 미치에다 슌스케 , 후쿠모토 리코, 후루카와 코토네, 마츠모토 호노카

개봉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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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
감독 유키 사이토
출연 후쿠모토 리코, 마츠다 겐타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2023)

<오세이사>로 국내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배우, 후쿠모토 리코가 또다시 일본 로맨스 소설 원작 영화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로 돌아왔다.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은 타임 루프 학원 로맨스로, 소설가 사쿠라 이요의 데뷔작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은 원래 웹 소설인데, 조회수 600만 회를 넘기며 일본에서 대단한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 누적 발행부수 23만 부를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은 여고생 미유(후쿠모토 리코)가 교통사고를 당한 연인 슈야(마츠다 겐타)를 구하기 위해 사고 당일을 반복하는 타임 루프 로맨스다. 일본 로맨스 영화 특유의 감수성을 잘 살린 이 작품은 타임 루프를 소재로 삼고 있으나 SF적인 연출보다는 청춘 로맨스에 조금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할리우드 타임 루프 영화가 ‘서술 트릭을 파헤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이건 타임 루프라는 소재를 계기로 무르익어가는 두 사람의 감정에 집중했다. <오세이사>를 재밌게 본 이라면 단연 추천할 작품.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

감독 유키 사이토

출연 후쿠모토 리코, 마츠다 겐타

개봉 20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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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드라이브 마이 카>(2021)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일본 소설 원작 영화라면 가벼운 로맨스 장르만 떠올렸던 이들의 편견을 깨주는 작품으로, 제74회 칸 영화제 각본상, 제94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제79회 골든 글로브 비영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연출은 201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는 일본 영화계 신예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맡았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이 네임 밸류에 딱 맞게 평가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하마구치 류스케 연출이라면 믿음직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일본 사회와 구성원의 심리를 포착하는데 능한 하마구치 감독 작품 답게,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실을 딛고 살아가는 인물을 끈기있게 그려낸다.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연극 배우, 그의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각본가다. 20년을 별 탈 없이 살아 온 두 사람이지만, 균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 것. 그는 지금까지 쌓아 온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해 불륜을 침묵하기로 한다. 그리고 오토는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한다. 오토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가후쿠는 남겨지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 가후쿠는 의뢰를 받아 히로시마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난다. 처음엔 차 키를 넘겨주는 것도 영 탐탁찮아했던 가후쿠는 미사키와 함께 여정을 떠나며 점차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로드 무비 장르의 특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여정 끝에 집에 돌아왔을 때, 이전과 다르게 견고해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그의 현실에 응원을 보내지만, 이는 곧 여정을 함께했던 자신에게 보내는 말이다. 영화는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됨을 말한다. 상실 이후 다시 일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 이라면 동승해보는 건 어떨까.

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개봉 2021.12.23. / 2022.12.2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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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감독 츠츠미 유키히코
출연 시노하라 료코, 니시지마 히데토시, 사카구치 켄타로, 카와에이 리나

<인어가 잠든 집>(2022)

<인어가 잠든 집>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인어가 잠든 집>은 뇌사 상태에 빠진 딸 미즈호(이나가키 구루미)를 살리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붙드는 부부 카즈마사(니지시마 히데토시), 카오루코(시노하라 료코)의 이야기다. 심장은 뛰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의사는 부부에게 장기기증을 권하고, 부부는 회복 가능성을 포기하고 결국 이를 받아들인다. 그때, 부부는 미즈호의 오른손이 미약하게 움직이는 걸 느꼈고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된다. 

영화는 마치 다른 장르의 두 영화가 붙어 있는 것처럼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따뜻한 가족 휴머니즘 영화로 시작한 영화는 후반부, 스릴러로 변모한다. 딸을 향한 엄마의 애착이 처음엔 애틋하게 보였지만, 점차 주변 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선득해진다. 영화는 ‘존엄사’ 논쟁을 시작으로, “‘목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 관객은 영화를 곱씹으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을 자연스레 고민하게 된다. 

인어가 잠든 집

감독 츠츠미 유키히코

출연 시노하라 료코, 니시지마 히데토시, 사카구치 켄타로, 카와에이 리나

개봉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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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출연 닛츠 치세, 오이다 요시, 아리무라 카스미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2022)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재일 한국인 2세 작가 이주인 시즈카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첫 이별을 경험한 소녀가 상실을 딛고 성장하는 모습을 서정적인 풍광과 함께 따뜻하게 담아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야카(니쓰 지세)는 자신과 어쩐지 처지가 비슷한 시바견 루를 만나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그렇게 우정을 쌓아가던 두 친구는 심장병으로 루가 세상을 떠나게 되며 마침표를 찍는다. 더 이상 루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야카는 루와 함께 했던 공간들을 홀로 걷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이 든 카페 주인 후세(오이다 요시)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후세 역시 아들을 잃었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남겨진 자의 연대로 서로 루와 아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어느 날, ‘기다리지만 말고 찾으러 가자’며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픔과 상실도 결국엔 스스로 치유하며 성장해가는 작은 소녀의 모습에서 관객은 자신 안의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상처 입은 어린아이를 보듬으며 사야카가 그랬듯 자신을 치유하게 된다. 사랑스러운 사야카와 루의 사계절은 자칫 깊게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동화처럼 색칠한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출연 오이다 요시, 아리무라 카스미, 닛츠 치세

개봉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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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