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 촬영 현장

벤 애플렉이 훌륭한 배우냐고 묻는다면 '꽤 괜찮은 배우'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에게 '훌륭한'이란 수식어가 붙을 곳은 따로 있으니까. 사실 <굿 윌 헌팅>, <아마겟돈>, <진주만> 등 데뷔 초반 작품들 외에 배우로서 타율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안정적인 연기력을 가진 배우이지만, 두각을 드러낸 인상적인 씬이나 작품이 크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재능으로 빛을 본 분야는 바로 각본과 연출이다. 벤 애플렉의 작품엔 사회의 변두리에 서있는 이들에 대한 포착과 예리한 시선, 기교 없이 현실적인 담백한 태도가 곳곳에 묻어나 있다. 배우이자 각본가로,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포스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 인정받은 벤 애플렉의 각본, 연출 참여작을 소개한다.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1998

<굿 윌 헌팅>
<굿 윌 헌팅>

최고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MIT 대학의 복도. 수학과 램보(스텔란 스카스가드) 교수는 복도 칠판에 적혀있던 고난도 수학 문제가 하루아침에 풀려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범인은 다름 아닌 청소부 윌(맷 데이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거칠게 살아왔지만 그 누구보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윌의 잠재력을 알아본 램보는 윌을 자신의 친구인 심리학 교수 숀(로빈 윌리엄스)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오길 거부하는 윌과 윌의 과거를 알게 된 숀. 윌은 숀과 시간을 보내며 상처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벤 애플렉은 윌의 동네 친구 처키로 출연해 실제로 막역한 사이인 맷 데이먼과 호흡을 맞췄다.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는 <굿 윌 헌팅>이 벤 애플렉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이유는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각본을 집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맷 데이먼이 과제로 쓰던 희곡을 벤 애플렉이 도와 장편 시나리오로 발전시켜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굿 윌 헌팅>이다. 그리고 이듬해 두 사람은 제7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된다. 무려 최연소 각본상 수상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굿 윌 헌팅>팀. 로빈 윌리엄스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굿 윌 헌팅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맷 데이먼

개봉 1998.03.21. / 2016.08.17.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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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아이야, 가라>
Gone Baby Gone, 2007

<가라, 아이야, 가라>
<가라, 아이야, 가라>

<굿 윌 헌팅>이 공개되고 10년 동안 배우로 부지런히 필모를 쌓아 왔지만 상업적 성공은 거뒀을지언정, 각본가로서 이뤄낸 성취 이상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벤 애플렉. 그는 첫 연출작 <가라, 아이야, 가라>를 통해 다소 비판적이었던 자신에 대한 평가의 흐름을 뒤바꾸는데 성공했다. 영화 <가라, 아이야, 가라>는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 「가라, 아이야, 가라」(Gone, Baby, Gone)을 각색한 영화로, 아동 실종 사건을 통해 미국 내 아동 보호에 대한 사회적인 맹점과 학대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냈다. 보호받지 못하는 인물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사실적이면서도 긴장감 있게 그려내는 벤 애플렉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작품. 단순한 아동 실종인 줄만 알았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고, 단서의 향방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면서 드러나는 반전들이 인상 깊은 여운을 남긴다. 벤 애플렉의 친동생 케이시 에플렉이 주인공 사립탐정 패트릭 켄지 역을 맡았다. 벤 애플렉은 이 영화로 여러 영화제에서 감독상 및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헬렌 역을 맡은 에이미 라이언은 2008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가라, 아이야, 가라> 촬영 현장
가라, 아이야, 가라

감독 벤 애플렉

출연 케이시 애플렉, 미셸 모나한, 모건 프리먼, 에드 해리스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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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The Town, 2011

<타운>

자신이 인질로 잡았던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 이 한 줄로 <타운>을 로맨스 영화를 추측했다면 오산이다. 벤 애플렉의 필모그래피는 로맨스를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로맨스의 탈을 쓴 범죄, 스릴러물이랄까. <에어>를 제외하곤 그의 모든 연출작이 범죄 혹은 스릴러물인 점에서 미루어보아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가라, 아이야, 가라>의 성공 이후 그는 두 번째 연출작 <타운>을 통해 자신의 재능이 결코 운에 달린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게 된다. 줄거리는 간결하다. 범죄 도시 보스턴에서 강도 짓을 일삼던 강도단의 리더 더그(벤 애플렉)는 자신이 인질로 잡았던 은행원 클레어(레베카 홀)가 동네 이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감시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그날의 기억을 반성하며 조직에서 손을 떼려 하지만, 남은 동료들은 그의 태도를 탐탁지 않아 한다. 결국 거액이 걸린 마지막 한 탕을 위해 나선 길, 사고가 터지며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FBI까지 가세하게 되는데.

<타운>

<굿 윌 헌팅>부터 <가라, 아이야, 가라>를 지나 <타운>까지. 벤 애플렉은 주로 빈민가를 배경으로 인물이 속해 있는 무리 또는 사회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폐쇄성을 견지하며 그들의 현실을 고발한다. <타운> 역시 마찬가지다. 범죄가 대물림되는 도시에서 그 대물림의 족쇄를 단지 사랑으로 끊어내기란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점을 직시하게 만든다. 벤 애플렉은 전작에서 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스케일로(물론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절대 크지 않다) 적재적소에 추격신과 총격신을 사용해 범죄물의 재미를 더했다. 더불어 각본과 연출뿐만 아니라 <타운>에서는 주연까지 맡아 극에 몰입감을 더했다. 

타운

감독 벤 애플렉

출연 벤 애플렉, 존 햄, 레베카 홀, 블레이크 라이블리, 제레미 레너,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크리스 쿠퍼

개봉 201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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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
Argo, 2012

<아르고>
<아르고>

앞서 두 편의 작품 모두 작품성에 호평을 받았던 벤 애플렉은 세 번째 연출작 <아르고>까지 성공시키며 감독으로서 커리어 하이를 달성한다. <아르고>는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피신했던 6명의 인질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CIA의 비밀 구출 작전 '캐네디언 케이퍼 작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첩보 스릴러물이다. 6명의 대사관 직원들을 무사히 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CIA 구출 전문 요원 토니 멘데스(벤 에플렉) 투입되고, 자신의 아들로부터 힌트를 얻은 토니는 'SF 영화 제작을 위한 촬영 장소 헌팅'이라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잠입한다. 

<아르고>

벤 애플렉의 장기는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거다. 큰 스케일이 가미된 연출 없이 말이다. 주로 범죄 장르에 속했던 전작들을 통해 입증해 온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아르고>에서 십분 발휘하였다. 최첨단 장비가 동원됐다거나, 거대한 폭발, 피 튀기는 격투 없이 <아르고>에서는 오로지 '탈출'만을 활용해 긴장감을 견고하게 쌓아나간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펼쳐지는 공항 탈출신은 긴장감에 뒷목까지 저릿해질 정도다. 벤 애플렉은 자신이 그려낼 수 있는 그림들을 최선의 방법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 직접 주연을 맡아 연기와 연출을 동시에 해내며 '포스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영화로 벤 애플렉은 그해 골든글로브, BAFTA 등 해외 유수 영화제를 석권하며 연출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각색상과 편집상뿐만 아니라 작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굿 윌 헌팅> 이후 두 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이었다. 각본상과 작품상을 다 받은 셈이니 감독이자 각본가로서는 커리어의 최정점에 오른 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벤 애플렉
아르고

감독 벤 애플렉

출연 벤 애플렉, 존 굿맨

개봉 2012.10.12. / 2012.10.31.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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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Live by Night, 2016

<리브 바이 나이트>
<리브 바이 나이트>

<아르고>로 승승장구하던 벤 애플렉은 정통 범죄물인 마피아/갱스터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전작의 호평과 성공을 업고 5년 만에 공개한 네 번째 연출작 <리브 바이 나이트>다. 데뷔작 <가라, 아이야, 가라>의 원작 소설을 집필했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이 2012년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1920년대와 30년대, 갱스터가 질서를 잡고 흔들었던 야만의 금주법 시대. 보스턴 경찰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범죄 조직에 들어서게 되면서 주류 밀수업자, 갱스터로 살게 된 조 코글린의 이야기를 그렸다. 벤 애플렉은 영화의 연출뿐만 아니라 각본, 주연, 프로듀서를 맡아 소화했다.

앞서 세 편의 영화가 호평을 받으며 성공궤도에 안착한 듯 보였던 벤 애플렉은 이 영화로 삐끗하고야 만다. 문제는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였다. 전작 <타운>을 답습한듯한 연출과 납득이 되지 않는 개연성, 어색하게 느껴지는 벤 애플렉의 연기까지. <리브 바이 나이트>는 아쉽게도 비평과 흥행 면에서 모두 실패하며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제작비 6,500만 달러 대비 전 세계 박스오피스 2,2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으며, 워너브라더스는 약 7,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흥행 참패로 이후 벤 애플렉은 연출 예정작이었던 '배트맨 솔로 영화'에서 하차하게 된다. 그는 성명을 통해 “수백만 명의 마음속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특정 캐릭터가 있다. 이 역할을 수행하려면 집중력, 열정,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라고 전했다. 

리브 바이 나이트

감독 벤 애플렉

출연 벤 애플렉, 조 샐다나, 엘르 패닝, 시에나 밀러, 브렌단 글리슨, 크리스 메시나, 크리스 쿠퍼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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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2016년 이후 배트맨으로 활약하며 배우와 프로듀서 활동에 전념해왔던 벤 애플렉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통해 각본가로 복귀하였다. 그것도 맷 데이먼과 함께! 각본가로선 <굿 윌 헌팅> 이후 24년 만의 재회였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 네드 벤슨의 <엘리노어 릭비> 시리즈와 유사하게 각 인물들의 시선을 빌려 하나의 이야기를 구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1장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과 2장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 각본을 담당해 두 남성의 시선에서 결투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풀어내었다. 3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여성의 시선에서 그려내야 했기에 여성 각본가 니콜 홀로프세너가 집필했다고.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벤 애플렉이 맡은 피에르 백자

영화는 영문과 교수 에릭 제거가 집필한 동명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은 각본뿐만 아니라 배우로도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아쉽게도 벤 애플렉은 최후의 결투의 주인공이었던 기사 자크 르 그리 역을 맡으려 했으나, 타작품에 캐스팅되면서 스케줄이 맞지 않아 조연인 피에르 백작 역을 맡게 됐다. 해당 배역은 <하우스 오브 구찌>로 리들리 스콧과 호흡을 맞춘 아담 드라이버에게 돌아갔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맷 데이먼, 벤 애플렉

개봉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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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Air, 2023

<에어>
<에어> 벤 애플렉은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로도 출연했다.

<리브 바이 나이트>로 쓴맛을 봐야 했던 벤 애플렉이 7년 만에 들고 온 신작 <에어>. 1984년 스포츠 브랜드 업계 꼴찌였던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과 손을 잡고 시그니처 '에어 조던'을 탄생시킨 희대의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벤 애플렉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히 알려진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의 극적인 계약 성사나 위대한 실화를 상기시키기보다 실화를 만들어냈던 소수의 인물들을 조명해 이야기를 일궈낸다. 주인공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를 포함해 업계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무모함에 걸어야 했던 직원들과 아들을 위해 협상을 거듭해야 했던 마이클 조던의 부모. 그들이 내린 최선의 결정이 과거와 미래의 나이키를 어떻게 이끌게 되었는지 영화 <에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에어>

영화 <에어>는 7년간 벤 애플렉이 절차탁마의 자세로 영화를 탐구한 결과다. 주로 범죄, 스릴러 장르를 연출했던 그는 <리브 바이 나이트>에서 들었던 괴상한 무게감을 내려놓고 기존의 담백함과 촘촘한 각본으로 승부 보기를 택했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각본(완성도가 있으나 제작 미정의 시나리오)이었던 <에어>를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을 터. 거기에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긴장감의 고조를 계약 성사 과정에 적재적소 사용하여 재미를 더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건 절친한 친구 맷 데이먼이다.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에어>를 통해 <굿 윌 헌팅>,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에 이어 세 번째로 협업했다. 감독과 주연, 주연과 조연으로 만난 셈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밀고 나가는 나이키의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 역을 맡았으며, 벤 애플렉은 그런 소니를 지지해 주는 나이키의 창립자 필 역으로 출연해 함께 호흡을 맞췄다. 

에어

감독 벤 애플렉

출연 맷 데이먼, 벤 애플렉, 제이슨 베이트먼, 말론 웨이언스, 크리스 메시나, 크리스 터커, 비올라 데이비스

개봉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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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기자 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