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디테일한 면부터 크게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좌우되기도 하는 만큼 영화 제작 단계에서 캐스팅이 차지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많은 이들이 우려 또는 반대를 표하는 캐스팅도 수없이 많다. 인종차별 및 여러 사유로 인해 캐스팅 단계서부터 논란이 있었던 작품들을 모아봤다.  


<닥터 스트레인지>

<닥터 스트레인지> 틸다 스윈튼

할리우드 내에서도 인종차별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캐스팅만으로도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되곤 하니까. 그중에서도 끊이지 않고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화이트 워싱'이다. 화이트 워싱은 원작의 유색 인종 캐릭터에 백인을 캐스팅하거나, 백인이 유색인종처럼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화이트 워싱 논란에 휘말리는 경우, 캐스팅된 배우가 역할에서 하차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 에인션트 원 역에 캐스팅된 틸다 스윈튼도 화이트 워싱이라는 지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승인 에인션트 원은 원작에서 티베트 노승이자 남성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주요한 인물 중 하나로서, 아시아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인 틸다 스윈튼이 캐스팅되자 화이트 워싱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마블 제작진들은 티베트와 중국의 상황을 고려해 "중국 개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라고 말하며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한 이유를 밝혔다. 중국이 영화 시장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만큼 검열을 통한 개봉 불가 판정을 최대한 피해 가고 싶었다는 이유다. 우려와는 달리 영화가 개봉한 후 틸다 스윈튼은 원작 캐릭터와는 별개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호평받아 논란은 많이 사그라들게 되었다. 

(왼쪽부터) 영화, 코믹스 속 에인션트 원 비교
닥터 스트레인지

감독 스콧 데릭슨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틸다 스윈튼, 치웨텔 에지오포, 레이첼 맥아담스, 매즈 미켈슨

개봉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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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스칼렛 요한슨

<닥터 스트레인지> 화이트 워싱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던 할리우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로 또다시 화이트 워싱의 역풍을 맞았다. 일본의 시로 마사무네 만화가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루퍼트 샌더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미국에서 리메이크 실사화가 이루어진 케이스다. 화이트 워싱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 캐스팅이 진행되면서다. 원작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가 현지화되면서 '미라 킬리언'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주연 배우로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한 것. 이는 전형적인 화이트 워싱에 해당하는 일로 미라 킬리언뿐만 아니라 쿠제, 닥터 오우레 등 주요 인물들에 대다수 백인을 캐스팅해 원작 팬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져 갔다. 네티즌들은 "적어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를 캐스팅했어야 했다" 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논란과 우려가 끊이지 않았으며, 극중 화이트 워싱의 이유를 나름 설득하려 했음에도 이는 직접적인 흥행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왼쪽부터) 원작, 영화 속 캐릭터 비교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

감독 루퍼트 샌더스

출연 스칼릿 조핸슨

개봉 20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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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인어공주>

<인어공주> 할리 베일리
 
지난 24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우려 속에 디즈니 실사 뮤지컬 영화 <인어공주>가 개봉했다. 캐스팅 단계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만큼 개봉 직전부터 영화와 캐릭터에 대해 시끄러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유는 하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이다. 인어공주 에리얼은 붉은 머리에 흰 백색의 피부, 빨간 입술을 지닌 캐릭터인 만큼 백인이 캐스팅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미국의 흑인 가수이자 배우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된 것이다. 이는 화이트 워싱과는 반대인 '블랙워싱'이자 흑인화로, 디즈니는 캐스팅이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적인 비판과 논란에 휩싸여야 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엔 '#NotMyAriel'(우리에리얼아님)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는 등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디즈니 관계자는 인어공주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에 유일했던 인물이 할리 베일리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디즈니는 자회사인 FreeForm SNS를 통해 '불쌍하고 불행한 영혼들을 위한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반박글을 발표했다. "덴마크 사람과 인어가 흑인일 수도 있다"라는 내용과 함께 캐스팅에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인어공주>

이후 인어공주의 아버지 트리톤 왕에는 하비에르 바르뎀이, 왕자 에릭 역에는 스테레오 타입의 백인 남성 조나 하우어 킹이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디즈니의 무리한 캐스팅이 원작 애니메이션을 망쳤다는 불만과 함께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 추구에 여러 의견이 맞부딪혔다. 그리고 <인어공주>가 공개된 지금. 다행인지(?) 일각에서는 할리 베일리의 목소리와 노래 실력, 연기력에 호평하며 비난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진 상태다. 이미 완성하고 개봉한 영화, 이제 막 돛을 달고 길에 오른 <인어공주>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인어공주

감독 롭 마샬

출연 할리 베일리, 멜리사 맥카시, 조나 하우어-킹, 하비에르 바르뎀, 아콰피나, 제이콥 트렘블레이, 다비드 딕스

개봉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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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노 타임 투 다이>
<캡틴 마블>

<007 노 타임 투 다이> 라샤나 린치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으며 캐스팅 단계부터 개봉까지 수없이 몸살을 앓아야 했던 <007 노 타임 투 다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로 확정된 작품인 만큼 그의 뒤를 이을 배우에 관심과 기대가 모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영국 배우 애런 테일러 존슨이 차기 제임스 본드 역과 관련해 미팅을 진행해 유력한 후보 물망에 오른 상황. 그와 별개로 007 시리즈 캐스팅과 관련해 한 가지 떠오른 논란이 있으니. 가장 최근 있었던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007 역 캐스팅이다. 영화 <캡틴 마블>에서 마리아 램보 역으로 얼굴을 알린 라샤나 린치가 그 주인공. 2019년부터 그가 새로운 007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2020년 라샤나 린치가 '하퍼스 바자' 12월 호를 통해 "제임스 본드를 대체해 코드명 007을 물려받았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가 본드걸이 아닌 제임스 본드를 대체할 007이라는 점에서 팬들 사이에 즉각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라샤나 린치가 (바람둥이 백인 남성이란 기존 007 이미지와 정반대인) 흑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기존 팬들의 반발에 대해 라샤나 린치는 "나는 한 명의 흑인 여성일 뿐이다. 만약 다른 흑인 여성이 이 역할에 캐스팅됐어도 지금처럼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며 "혁명적인 변화의 일부라는 사실을 늘 상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 그것도 흑인이 새로운 제임스 본드냐는 추측에 대해 <007> 시리즈 제작자 바버라 브로콜리는 "차기 제임스 본드는 남성"이라 말하며 논란을 일축했다. 영화가 공개된 후, 라샤나 린치가 맡은 역이 MI6의 에이전트 '노미'이자 은퇴한 007의 코드네임을 이어받은 후임 요원임이 밝혀졌다. 결국 라샤나 린치 007설은 보도된 내용이 오독돼 퍼지며 일어난 일에 가까웠고, 라샤나 린치는 다니엘 크레이그 못지않게 인상적인 액션 신들을 선보이며 개봉 후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감독 캐리 후쿠나가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라미 말렉, 레아 세이두, 라샤나 린치

개봉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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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포스터

<클레오파트라> 갤 가돗

클레오파트라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제작 및 공개되고 있는 요즘. 두 편의 작품 모두 캐스팅 논란에 휩싸이며 클레오파트라의 명성에 누가 되고 있다. 먼저 갤 가돗이 출연하는 영화 <클레오파트라>다. 제작 초반 <원더우먼>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패티 젠킨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갤 가돗을 주연 배우로 캐스팅하였다. 문제는 갤 가돗이 이스라엘 출신의 배우라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문제 및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심한 이집트이기에 고대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를 이스라엘인이 연기한다는 점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평가들까지 우려와 함께 "갤 가돗이 맡을 바엔 아랍 또는 아프리카 배우가 고대 이집트 여왕을 연기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갤 가돗은 인터뷰를 통해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인이다. 프로듀서들은 클레오파트라에 어울리는 마케도니아 여배우를 찾고 있었고, 결국 찾지 못했는데 마침 나는 그 역할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었다"라며 합류하게 된 계기를 고백했다. 영화는 갤 가돗을 최종 주연으로 낙점해 현재 촬영이 마무리되었으며, 패티 젠킨스 감독이 일찍이 하차하고 드라마 <팔콘 앤 윈터솔져> 연출을 맡았던 카리 스코그랜드가 메가폰을 이어받아 완성했다. 정확한 개봉일은 미정이다.

넷플릭스 <퀸 클레오파트라>

다음으로는 지난 10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서 왕좌와 가족,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를 재연한 다큐드라마다. 해당 작품이 논란이 된 건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흑인화 캐스팅이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해 주요 인물들이 흑인으로 캐스팅되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밝혀진 역사적 사실로도 알 수 있듯 흑인이 아니다. 이는 엄연히 역사 왜곡에도 해당하며, 수많은 역사 학자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백인이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의 주장은 허구"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캡틴 마블>
<캡틴 마블>

<캡틴 마블> 브리 라슨
 
브리 라슨은 호감과 비호감 사이, 대중들로부터 호불호가 갈리는 배우 중 하나다. <룸>을 통해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에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는 연이어 마블의 새로운 솔로 무비 프로젝트 <캡틴 마블>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대세로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리 라슨을 향한 여론이 단숨에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스탠 리의 사망이 논란의 씨앗이 됐다. 마블의 대부이자 명예 회장인 스탠 리가 사망하고 수많은 배우와 제작진, CEO 등이 사진과 함께 추모 글을 올렸는데 브리 라슨이 글과 함께 게재한 사진이 문제가 된 것. 사진 속에서 브리 라슨은 추모와는 거리가 먼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한 손에 칵테일을 든 채 삐딱하게 앉아 옷과 신발, 가방을 자랑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사망 직전 미투,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던 스탠 리의 추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브리 라슨은 마블 내 팬덤과 네티즌들로부터 '고인 모독'을 이유로 거센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으며, 퇴출을 요구하는 미국 청원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업로드됐던 브리 라슨의 추모글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수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등 할리우드에서 활약했던 국내 배우 수현도 한차례 캐스팅 논란을 겪은 바 있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트레일러가 공개되기 전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수현의 역할이 볼드모트의 호크룩스이자 말레딕터스(피의 저주로, 인간에서 서서히 짐승이 되는 저주에 걸린 캐릭터를 일컫는다)인 내기니임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것. 해당 시리즈가 주연 배우들이 모두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백인 중심의 캐스팅으로 비판받은 가운데, 백인 남성인 볼드모트가 수족처럼 부리는 내기니에 동양인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불거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해리포터 시리즈를 집필한 조앤 K 롤링은 "내기니는 ‘나가(Naga)’로 인도네시아 신화에 등장하던 뱀", "인도네시아는 자바인, 중국인, 베타위인 등을 포함해 수백 가지 인종 그룹으로 구성된 나라"라고 언급하며 인종차별 논란에 해명글을 올렸다. 배우 수현 역시 이후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논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 역시 외국에서 일하는 아시아 배우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후속작에서 내기니가 좀 더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에선 등장하지 않았고, <신비한 동물사전 4>(가제)은 제작이 불투명하게 되면서 수현이 연기한 내기니의 향방은 아쉽지만 알 수 없게 되었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