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얼굴은 무엇일까. 포스터? 주연배우? 어떤 이미지? 그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작품의 제목이야말로 영화의 얼굴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를 설명해야 할 때, 결국 영화 제목을 말해서 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가 제목에 살고 제목에 죽듯, 각 영화는 심사숙고해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그 흔적을 좀 더 재밌게 엿볼 수 있는 건 한국영화의 영어 제목이다. 한국 제목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기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하고, 새로운 뜻을 담아 영어권 사람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도 한다. 2023년 개봉작 중, 나름 센스 있는 영어 제목을 선택한 한국영화 몇 편을 전한다.


30일 → Love Reset


10월 3일 개봉해 100만 관객을 돌파한 다크호스 <30일>. <30일>의 영어 제목은 30 Days나 Monthly가 아닌 Love Reset(러브 리셋)이다. 원제와 영제가 한참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 내용을 살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첫눈에 빠져 결혼에 성공한 남녀가 끝내 이혼을 선택하기 직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기억을 모두 잃는다. 이들에게 이혼까지 남은 시간은 30일. 그러니까 한국 제목은 그 기간인 30일에 초점을 맞췄고, 영어 제목은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는 영화 설정에 중점을 뒀다. 다소 스릴러스러운데 대신 궁금한 30일과 톡톡 튀는 로맨스스러운 감성이 묻어나는 러브 리셋. 양쪽 다 영화와 꽤 잘 어울리는 듯하다.

30일

감독 남대중

출연 강하늘, 정소민

개봉 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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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3  → THE ROUNDUP : NO WAY OUT


올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유일한 영화 <범죄도시3>. <범죄도시> 시리즈는 영어 제목이 꽤 독특하다. 1편에선 ‘무법자들’이란 의미의 The Outlaws라는 제목을 사용했는데, 경찰도 뒷돈 받고 범죄자들도 제멋대로 날뛰는 작중 환경을 잘 전달한다. 그러다 2편에선 마석도의 캐릭터성 변화를 반영하고 싶었는지 ‘검거’를 뜻하는 The Roundup이란 제목을 사용했다. 그리고 3편에 와서 드디어 부제가 붙으며 <The Roundup: No Way Out>, 그러니까 번역하자면 ‘검거: 탈출구는 없다’ 정도이지 않을까. 우리나라 제목은 시리즈 순서를 착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데 비해 해외 팬들이라면 다소 헷갈릴 법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레이더스> <인디아나 존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순서를 헷갈리는 것처럼.

범죄도시3

감독 이상용

출연 마동석, 이준혁, 아오키 무네타카, 이범수, 김민재, 이지훈, 김도건, 고규필, 전석호, 안세호

개봉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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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 Smugglers


<범죄도시3> 다음으로 가장 흥행한 한국영화는 여름 시장을 겨냥한 <밀수>다. 하이스트 영화 <밀수>는 류승완 감독의 재기 발랄한 연출력 아래 펼쳐진 밀수꾼들의 속고 속이는 심리전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영어 제목도 한국어 제목과 많이 차이가 나진 않는다. 원제가 '밀수'라는 행위에 집중한 것과 달리 영어 제목 Smugglers는 '밀수꾼들'이라고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만 다르다. 아무래도 서양권에 인기 많은 밀수꾼 캐릭터들이 많다는 점을 노린 건가 싶다.

밀수

감독 류승완

출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 주보비

개봉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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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모음.zip → Body Parts


신체의 일부분을 공포의 소재로 다룬 단편 6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신체모음.zip>은 제목부터 참신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밈을 사용한 것. 그림파일을 올린 게시물엔 그림파일 확장자를(.jpg .gif), 장문의 글을 쓴 게시물엔 .txt를 붙이듯 여러 단편을 모았다는 점에서 압축파일의 확장자 .zip을 제목에 사용했다. 이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밈을 영제에 그대로 사용하긴 부담됐는지, 영어 제목은 <Body Parts>라고 붙였다. 이것도 꽤 훌륭한 번안인데, 영화 소재가 신체 일부분이란 점과 영화가 단편으로 이뤄졌다는 점 모두 ‘Parts’라는 부분에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

신체모음.zip

감독 최원경, 전병덕, 이광진, 지삼, 김장미, 서형우

출연 김민석, 김채은, 권아름, 혁, 강준규, 김아현, 조우리

개봉 202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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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 분노의 적자 → Jango: Uncharged
좌: <잔고:분노의 적자> 포스터, 우: <장고: 분노의 추적자> 포스터.

매번 참신한 소재와 코미디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백승기 감독의 신작 <잔고: 분노의 적자>는 제목만 봐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 패러디임을 직감할 수 있다. 장면이나 캐릭터 설정까지 유쾌하게 패러디한 <잔고: 분노의 적자>는 영제에서도 그 센스는 엿볼 수 있다. 원작의 원제 ‘Django Unchained’를 따와 ‘Jango: Uncharged’라고 지은 것. 적었을 때나 읽을 때나 무척 흡사한 언체인드와 언차지드로 언어유희를 잡은 것은 물론이요, 적자라는 부제의 뉘앙스도 담아냈다. 과연 '부천의 자비에 놀란' 감독답다.

잔고: 분노의 적자

감독 백승기

출연 정광우, 서현민, 손이용, 손규진

개봉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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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복순  → Kill Boksoon


<길복순>의 영제는 ‘킬복순’(Kill Boksoon). 사실 길복순 이름 위로 피가 한 줄기 튀는 영화 속 타이틀이나 포스터 타이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애초 주인공 캐릭터의 성을 길로 지은 것부터 이런 언어유희를 사용하기 위함이 아녔을까 싶다. 다만 여기엔 '킬러 길복순'을 의미하는 것 외에도 <킬 빌>과의 유사성을 녹여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킬 빌>에서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보스 빌과 동료들에게 죽을 뻔한 이후 빌을 죽이기 위한 여정을 떠나듯, 복순(전도연) 또한 차민규와 동료들의 손에 죽을 뻔했다가 차민규를 죽이기 위한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기 때문. 킬과 복순을 붙여 쓰지 않은 이유가 ‘길복순을 죽여라’와 <킬 빌> 같은 구성 모두를 아우르기 위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길복순

감독 변성현

출연 전도연, 설경구, 김시아, 이솜, 구교환, 김성오, 이연, 최병모, 김기천, 박광재

개봉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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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 → Road To Boston


마라토너 손기정과 서윤복의 금메달 도전기를 그린 <1947 보스톤>은 영제가 ‘Road To Boston’(보스톤 가는 길)이다. 직역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제목인데, 영제가 다른 이유가 뭘까. 아마도 문화권마다 1947년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1947 하면 광복 직후의 시대가 떠오르지만 영어권에선 냉전 시대가 도래하는 시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 그렇게 1947년을 제목에서 빼내고 ‘Road To’를 붙여서 보스톤으로 향하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부각한다. 영화를 관람한 입장에선 영제보다는 원제가 훨씬 어울린다고 본다. 

1947 보스톤

감독 강제규

출연 하정우, 임시완, 배성우, 김상호

개봉 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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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