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군사정권의 암흑기가 끝나고,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한국영화는 일대 변혁을 맞게 된다. 나아가 영화산업의 맥락에서는 영화사의 허가제가 등록제로 바뀌면서 영화사의 설립이 자유로워지고, 영화제작 과정 전반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선대의 영화제작이 감독, 극장 소유주나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한 편의 영화가 배태되기 위해서) 90년대에는 이전에 전무했던 개념인 기획자, 혹은 ‘프로듀서’가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역할에는 크게 ‘기획’과 ‘제작’의 개념이 포괄된다. 초기 기획자들은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의 주축이 되었던 (황기성 사단의) 이춘연, (현진영화사의) 김경식, (명보극장의) 신철, (서울극장) 심재명, (씨네시티) 이준익, (명보극장) 김정균, (프리랜서) 안동규 등이 주축이 되었다(1991년). 이들은 극장 홍보실장, 영화사의 기획실장 등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이른바 ‘기획영화’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획영화는 “시장조사를 통해 기획된 영화”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이전 시대에서 투자자(혹은 감독)와 제작자가 프로젝트의 대강을 빚었다면 기획영화는 기획자들이 영화의 아이디어, 혹은 컨셉을 잡고, 가장 결정적으로 “사전조사”(즉 영화 제작을 위한 “정보 수집과 분석, 트렌드 반영, 독창성과 신선함, 판매촉진 전략)를 통해 영화의 전반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사전조사 과정은 영화의 제작, 홍보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의 내용, 그리고 캐릭터의 설정, 특히 한국영화가 남성과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막대한 변화를 가지고 왔다.
1992년에 개봉한 <결혼이야기>(김의석) 는 이렇게 사전 조사를 통해 기획된 ‘기획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이야기>는 한국의 1세대 기획자, 혹은 프로듀서인 신철/신씨네가 기획한 프로젝트로 “‘커리어 우먼’, ‘성 평등’ 등의 단어가 한국사회의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한국영화의 주 소비층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 도시 여성을 타깃으로 한 작품이다. 제작사인 신씨네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전에 10여 쌍의 부부를 밀착 인터뷰하여 캐릭터의 전반과 이야기를 구성했다. <결혼이야기> 의 엄청난 흥행 성공 이후로 비슷한 제작 방식과 비슷한 컨셉의 영화들이 줄줄이 기획되었다. 같은 해에 탄생한 강우석 프로덕션의 <미스터 맘마>, 1994년에 개봉한 <마누라 죽이기> 역시 이러한 기획 영화의 붐을 이끌었던 대표작들이다.
<마누라 죽이기>,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 그리고 <닥터 봉>(이광훈, 1995) 등을 포함한 기획영화의 대부분은 로맨틱 코미디였다. 전후 이래로 신파성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영화산업에서는 새로운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들은 주로 신혼부부, 혹은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 또한 이전 시대의 멜로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 영화 속 커플들은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는 캐릭터들로 특히 여성 주인공 같은 경우는 각각 영화사 대표(<마누라 죽이기>), 성우(<결혼이야기>), 영화사 직원(<미스터 맘마>), 작사가(<닥터 봉>) 등 이른바 ‘커리어 우먼’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전문직 여성이다. 이는 주로 식모, 여공, 성 노동자 등 50년대에서 80년대의 한국영화 속 여성 주인공들의 설정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 중 그 어느 (여성) 캐릭터도 남성 캐릭터에 준하는 멋진 사회인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예를 들어 <결혼이야기>는 라디오 방송국 PD인 ‘태규’(최민수)와 신참 성우인 ‘지혜’(심혜진)의 신혼 생활을 그리며 전개되는 영화다. 이들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여 즐거운 신혼생활을 보내지만,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된 갈등은 이들을 멀어지게 하고 둘은 결국 별거를 선택한다. 시간이 흐른 뒤 서로의 소중함과 사랑의 감정을 확신한 지혜는 태규가 전근 간 시골로 내려가 그와 재회한다. 영화는 로맨스 혹은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적 프레임(만남->갈등->재회)을 고스란히 따른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1. 방송국과 직장 동료들과의 일상 2. 신혼부부의 성 재현으로 구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 주인공인 태규의 노동 공간인 방송국 사무실과 그의 동료들이 이 영화의 주 배경, 주요 캐릭터를 담당하며 마치 일일 시트콤처럼 이야기를 주축하는 반면 같은 방송국에서 성우로 일하는 지혜의 노동일상은 대폭 축약되거나 생략된다는 사실이다. 방송국의 지혜가 등장할 때는 그녀가 태규와 밀회를 갖거나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지혜의 직업은 영화의 캐릭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혹은 남자 주인공인 태규와의 사회적 수준을 맞추기 위한 요소로써 지극히 피상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집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성생활 재현에 있어서 지혜는 방송국의 에피소드들과는 반대로 주도권을 잡거나, 성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강조된다. 지혜는 예컨대 소파에 당당히 앉아 태규의 ‘스트립쇼’를 즐기거나, 태규에게 자신의 누드를 보여주는 식으로 관계를 리드하는 캐릭터다. 여자 주인공이 성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설정은 또 다른 기획영화, <마누라 죽이기>에서도 반복된다. <마누라 죽이기>는 1대 여성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김미희가 기획하고 강우성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로, <결혼 이야기>에 이어 결혼 5년 차인 부부, ‘봉수’(박중훈)와 ‘소영’(최진실)을 중심으로 한다. 봉수는 영화 제작사 사장, 소영은 영화 제작자지만 봉수는 철저히 소영에게 종속되어 회사에서 아무런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봉수와 내연관계에 있는 여배우, ‘해리’(엄정화)가 이혼을 요구하면서부터 전개된다. 이로 인해 봉수는 아내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하게 되고, ‘킬러’(최종원)를 고용하기에 이른다.
<마누라 죽이기> 역시 앞선 <결혼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주된 에피소드는 직장, 즉 영화사 내에서의 소소한 사건들과 소영의 집에서의 상황극으로 구성된다. 소영의 권력은 회사에서 봉수보다 우위에 있지만 집에서의 성적인 권력은 더더욱 강조되어 드러난다. 예컨대 이들의 ‘D-Day, 디 데이’는 전적으로 소영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봉수는 디 데이 이벤트(?)를 어떡해서든 피한다는 것이 집 에피소드들의 주된 코믹 설정이다. <결혼 이야기>의 지혜와 <마누라 죽이기>의 소영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지위, 혹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며, 여성의 권력은 강한 섹슈얼리티로 대표되거나 상징된다.
※ 2부에서 계속.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