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은 1926년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1926년의 할리우드는 영화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시기이다. 가장 큰 변화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을 맞이한 해이며, 할리우드로 영화의 꿈을 안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메이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시스템이 재편되는 시대였다. <바빌론>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투영하며 영화판의 변화와 제작자, 배우들을 통해 격변기 시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바빌론>은 <위플래쉬>, <라라랜드>를 연출했던 ‘데이미언 셔젤'의 신작으로 황홀하고 위태롭던 1920년대 할리우드 이야기를 매혹적이고 강렬하게 풀어낸다. 역사를 토대로 재구성한 영화이니만큼 과거 할리우드의 주요인물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라인업도 화려하다.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잭 콘래드 역은 ‘브래드 피트'가, 배우를 갈망하는 넬리 라로이 역은 마고 로비가 맡았다. 여기에 영화 제작자를 꿈꾸는 매니 토레스 역은 이 영화로 스크린 데뷔를 한 신예 ‘디에고 칼바'가 캐스팅되어 놀라운 연기로 앞서 소개한 배우들과 빛나는 연기 앙상블을 보여준다.
격변의 시대에 할리우드는 어떻게 변했나?
<바빌론>을 재미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의 할리우드 상황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할리우드 역사를 다룬 영화인 만큼 스토리와 캐릭터의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인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27년에 등장한 첫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를 시작으로, 자막이 아닌 소리가 더해진 영상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이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혼란의 시기에 적응하지 못한 무성영화배우들이 자진해서 영화산업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영화제작 현장을 스튜디오로 이동시켰으며, 스튜디오를 소유한 제작자의 스타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렇게 변화된 할리우드 영화계는 1929년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유성영화의 흥행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환경을 만들게 되었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욕망의 씨앗
영화의 오프닝은 잭 콘래드가 주최한 파티로 시작된다. 마약과 섹스, 술과 음악이 넘치는 광란의 파티에서 영화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청년 ‘매니’는 타고난 스타성으로 배우를 꿈꾸는 ‘넬리'를 만난다. 여기에서 넬리는 파티에 참석한 제작자로부터 캐스팅을 제안받고, 매니는 잭의 눈에 띄어 그의 어시스트로 일하게 된다. 광란의 파티가 그들의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싹을 틔우며 할리우드로 입성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바빌론>의 충격적인 파티 시퀀스는 1920년대에 팽배했던 당시 할리우드의 쾌락주의적 관행과 대중의 시선을 고증하여 셔젤 감독이 의도적으로 오프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와 현실과의 대비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파티 장면은 중간중간 계속 등장하는데, 특히 후반부의 LA 지하 파티 장면은 초반의 저택 파티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구조로 영화의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초반 저택의 파티에서 기회를 얻은 인물들은 후반의 지하 파티에서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는 시기로, 상황의 역전과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 해당 파트는 영화 속 인물의 행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다.
욕망을 쫓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
무성영화 시기 흥행 보증수표였던 잭 콘래드는 화려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유성영화로 바뀐 환경 때문에 과거를 그리워한다. 목소리나 발음 연기를 위해 연극배우와 재혼하며 노력을 해보지만, 관객들의 외면을 받은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고 로비가 연기한 넬리 라로이는 타고난 스타성을 지닌 배우로 타고난 매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결과 영화계의 관심을 받고, 모두가 그녀에게 환호한다. 하지만 유성영화의 시대에 약과 술에 중독된 그녀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결국 어두운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 욕망이 가득했던 청년 매니 토레스 역시 탁월한 제작 능력으로 제작사의 임원까지 역임하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사랑했던 넬리의 재기를 돕기 위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그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파멸한다.
이처럼 영화는 화려한 삶을 꿈꾸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던 인물들의 과거와 현실을 냉정하게 비교한다. 추억과 팬들의 환호에만 머물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착잡하다. 꿈을 향한 노력과 열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순수함을 잊고 집착에 빠질 때 어떤 결과를 도래하는지, <바빌론>은 무대 위 화려함 뒤로 고독하고 쓸쓸한 현실도 놓치지 않는다.
영화의 중심에 우뚝 선 할리우드
<바빌론>은 20년대 초창기 자유분방한 환경 속에서 어떤 규제도 규율도 없이 지어진 요새와 같은 할리우드를 조망한다. 위대한 제국의 대도시였지만 타락과 욕망으로 가득 찼던 도시인 ‘바빌론'이 1920년대 할리우드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단어로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이다.
100년 전의 모습을 담기 위해 셔젤 감독은 <바빌론>을 과거 방식인 필름으로 촬영하였으며, 이를 통해 피부에 와닿는 생생한 모습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15년 전인 2008년에 <바빌론>을 구상했고, 배우들의 앙상블과 장대한 대서사시를 가진 영화로 완성했다. 극중 등장하는 인물과 여러 가지의 서사는 비록 쾌락과 욕망으로 물든 어두의 과거의 모습일지라고 현재의 영화가 존재할 수 있게 한 뿌리임에 틀림없음을 강력하게 전한다. 셔젤 감독은 인터뷰에서 <바빌론>이 비단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닌, 오늘날과 같이 불안한 과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비슷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빌론>은 개봉 당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작품이다. 3시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큰 맥락의 스토리 라인이 부재하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과 뛰어난 미장센은 각종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미술상을 거머쥐며 완성도를 입증했다.
<바빌론>은 가장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할리우드의 과거를 들춰내지만, 그곳에 대한 애정이 깔린 영화이다. 사람들에게 환상과 꿈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욕망의 기계가 된 할리우드, 그 100년간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아마 이 같은 감상은 비단 할리우드와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닐 테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각자의 영사기에서 끊임없이 상영되는 희로애락의 시네마이니깐.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