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뮤지컬은 사랑을 타고
사랑은 비를 타고. 영화의 제목으로도 유명하지만 창작 뮤지컬의 전설처럼 회자되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뮤지컬 작가 오은희는 소극장 살롱 뮤지컬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동숭동 연가’ ‘번데기’ ‘달고나’ ‘진짜 진짜 좋아해’ ‘대장금’ 등의 뮤지컬을 썼고,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작가였다.
1991년 ‘아바돈을 위한 조곡’으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뮤지컬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각색과 정극 희곡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작가다. 특히 광주의 아픔을 다룬 ‘슬픔의 노래’를 각색했고, 영화 <학생부군신위>의 대사 윤색도 그의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적은 1995년 초연한 ‘사랑은 비를 타고’다. 이 작품은 노총각 형과 사고뭉치 동생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유쾌하고 따스하게 그려낸 살롱 뮤지컬이다. 당시 톱스타였던 남경읍, 남경주 형제와 신예 최정원이 합류하여 매진 행렬을 기록하면서, ‘지하철 1호선’과 함께 대학로 장기 공연 작품의 대표 격이 되었다.
장기 공연은 스타의 산실로 이어졌다. 17년 동안 오만석, 유준상, 노현희, 엄기준, 서범석, 소냐 등 수많은 배우가 이 작품을 거쳐 갔고, 2007년 라이선스가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뮤지컬 미다스의 손이라 불렸던 오은희 작가. 난 그를 ‘숨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한 편의 인생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서슴없이 ‘동사서독’을 선택했다.
2.
동사서독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으로, 1994년 개봉했다. 김용의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을 원작으로 제작된 프리퀄 형식의 이야기다. 원작은 있지만, 감독의 해석이 훨씬 중요한 영화라고 평가받는다.
<동사서독>은 결코 친절한 무협 영화가 아니다. 무협에 편향을 가진 일반적 대중의 취향은 이 영화에 없다. 만연한 독백, 불친절한 인물 설명, 부족한 액션 장면…. 무협이지만 무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작품이지만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꼽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왕가위 감독은 원작의 명성만 활용한 것처럼 보인다. 외로운 영웅의 서사와 가슴 적시는 메시지, 인물이 보여주는 깊이와 사막을 배경으로 만든 영상미의 삼박자는 지금도 누아르 영화의 교과서처럼 활용된다.
이야기는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된다. 사막에서 객잔을 운영하는 구양봉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이 교차하며 서로의 엇갈린 인연과 운명이 물결처럼 조망된다. 동사서독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독고구패의 기원, 훗날 원수가 되는 홍칠공과 구양봉의 과거사 등의 설정으로 원작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원작인 「사조영웅전」을 보지 않았어도 영화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서사를 보여준다. <영웅본색>이 홍콩 누아르로 가장한 무협 영화라면, <동사서독>은 훌륭한 무협 영화로 위장한 왕가위표 누아르라고나 할까?
작품은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출연진만큼은 정말 화려하다. 장국영, 임청하, 양가휘, 양조위, 장학우, 유가령, 양채니, 장만옥. 홍콩의 유명 배우가 총동원된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다.
영화에는 기억을 잃는 술 ‘취생몽사’가 판타지 장치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과거를 잊고 싶은 마음에 술을 마셔 보지만, 기억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조각조각 붙여진 듯하면서도 영화가 끝나면 하나처럼 느껴지는 영화. 우리는 모두 생존 중이고, 영웅도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사막은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모래 덕분에 생존의 욕망은 더욱 강하게 분다. 왕가위 감독은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나뭇가지도 아니고, 네 마음일 뿐이다"라는 불경 구절을 보고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영화의 OST에 참여한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 요요마의 선율이 무상과 유상의 경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것에 관한, 그리고 장국영이 보고 싶어지는 이야기.
3.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는 지난여름 개봉한 엄태화 감독의 작품이다.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서울이 폐허가 된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단 한 곳, 황궁아파트만은 그대로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외부 생존자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는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주민 대표 ‘영탁’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생존과 반전이 교차하며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평소였다면 행복을 위해 열렸을 입주민 회의는 자기만의 생존을 위한 극악의 정치로 변질되고, 세상이 무너졌어도 하나 남은 아파트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욕망이 초라하게 들끓는다. 밖에서 생존 중인 외부인들은 어떻게든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고, 아파트는 재난 전이나 재난 이후나 대한민국 사람들의 최고 욕망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남겼지만,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배우 이병헌은 드라마 '내일은 사랑’으로 청춘스타가 되었고, <공동경비구역 JSA>, <달콤한 인생>,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에 출연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로 우뚝 섰다. 뵨사마로 불리며 한류열풍의 주역이 되었고, 2009년 모든 배우가 꿈꾸는 할리우드까지 진출한다. 그는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상자로도 선정되면서, 오스카의 레드 카펫을 처음으로 밟은 한국 영화인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필모에서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떤 욕망이 지금의 이병헌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곽도원은 이병헌에 대해 "다른 배우들은 연기할 때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비치기 마련인데 이병헌은 그런 게 안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분명 그에겐 특별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매력이 숨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숨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욕망을 모두 분출한 것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국을 대표해서 2024년 오스카 외국어 장편상에 도전한다. 부디 작품과 배우 모두 생존하기를.
4.
따르거나 떠나거나 살아 남거나
생존이 화두인 시대다. 폭력과 안전, 권력 집중과 양극화, 기후 위기 그리고 기승전/돈의 개인화. 지금 사회는 그야말로 ‘대결핍의 시대’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무능하고, 종교는 무력하다. 반목과 혐오가 극심해진 시대에 국민은 안심하고 기댈 곳이 사라진 상태다.
동사서독은 동쪽의 모래와 서쪽의 외로움으로 직역할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화 제목은 동양대 박해천 교수의 책에서 제목을 따 왔다. 이 책은 한국 아파트 문화를 다루고 있다. 직역하면 시멘트, 모래, 자갈이 뒤섞인 이상향이다. 두 제목 모두 돌같은 희망보다 모래같은 절망을 상징한다.
우울한 사건이 많은 세상이라서 어두운 영화가 많은 요즘이다. 그래서 더더욱 오은희 작가의 밝고 경쾌한 뮤지컬이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2015년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20주년 간담회에서 오은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비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소재다. 비라는 건 자연이 줄 수 있는 가장 정화된 형태다. 울적해졌을 때 내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지만 비가 그쳤을 때는 무지개가 올 수 있다는 ‘상징성’도 전하고 싶다.”
그래, 희망이 가치 없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지만 누군가는 끝없이 생존 뒤의 희망을 이야기해야 되겠지. 살아 남자! 끝.
글쓰는 기획자, 김우정
김우정의 '영화 라면'은 각계각층의 명사가 추천하는, 반복해서 보고 싶은 인생영화와 함께 최신 작품을 버무려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영화 한 편을 심층 분석하는 비평이나 최신 영화를 평가하는 평론은 아닙니다. 그저 한 번 사는 인생의 서로 다른 가치를 영화 속에서 찾고 싶고, 라면을 먹은 것처럼 잠시나마 사소한 행복을 선물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음화는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의 '카사블랑카'가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