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정책에 따르면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고 지난 10년간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정착한 탈북민의 수는 연평균 1,000여 명 정도다. 그리고 이들의 탈북 당시 연령대 분포를 조사해 보니 2 ,30대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탄압과 가난, 폭력과 압제의 사회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이들은 오로지 이웃 땅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청춘을 새롭게 펼쳐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차갑고 매섭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혐오로 점철된 다툼이 끊임없는 대한민국에서 탈북민들이 찾던 ‘코리안 드림’은 싸늘하고 냉혹한 현실 앞에 좌절되고 만다.
국경 하나를 두고 서로 인접한 이웃 나라지만, 대한민국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들은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사회 구조를 배워야 했다. 한평생 익숙하게 지내왔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야만 무사히 대한민국이란 사회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의 첫걸음은 전부 서툴고 어렵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의 서툰 발걸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이들에게 적응할 시간이라는 여유를 주지도 않는 혹독함은 이들의 삶을 더 가파르게 만들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도 탈북민들의 삶을 가혹하게 좁혀오지만, 무엇보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차별과 편견으로 점철된 사회의 시선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고독함이 이들의 삶을 엄습하게 만드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탈북민의 적응과 일상의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여기 탈북민들의 삶을 다룬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이 영화들은 우리 사회에 일말의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믿을 수 있는 사람> dir. 곽은미
영화의 오프닝. 한영(이설)은 ‘왜 관광통역안내사가 되고 싶냐?’는 면접관들의 질문에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기 때문’이라는 답변한다. 한영이 중국 공안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돈을 많이 벌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녀는 북한에서 탈출하여 중국에서 머물 당시 샤오(박세현)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를 배운다. 그리고 그 능력을 활용하여 중국인들을 상대로 가이드 업무를 하는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발급받는다. 그렇게 한영의 한국살이는 순탄할 것만 같았지만, 대내외적인 상황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사드 배치로 인해 중국에서는 금한령이 내려졌고, 중국인 관광객 수는 반토막이 났다. 먼저 탈북한 동생 인혁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녀와 같은 처지의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친구 정미(오경화)는 남자친구와 함께 이민을 준비한다. 이제 정말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한영은 사라진 동생과 남겨진 가족들의 짐까지 모두 떠안은 채 생계의 압박 속에서 허덕이는 중이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자기 동료 가이드처럼 역사를 왜곡해서 중국인의 환심을 사기도 하고, 관광객들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인센티브를 더 챙기려고도 했다. 하지만 한영에게 돌아오는 것은 동료의 신고로 인한 해고와 경력 단절이었다. 그녀는 식당 종업원을 하며 생계를 간신히 이어 나가게 되었고, 전 직장의 동료는 그녀의 자격증을 무단 도용하도록 허락하면 큰돈을 챙겨주겠다며 그녀를 유혹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한영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반대로 사회는 그녀의 순수한 신뢰를 이용할 뿐이다. 한영은 끝내 모든 것을 그만둔다. 그녀는 일하던 호프집을 관두고, 자격증을 집에 둔 채, 홀로 캐리어를 싼 채 떠난다. 그녀의 곁에는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이 풀린 중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간다. 사회는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고, 그녀가 가진 선의마저 앗아갔다. 그런 사회에게 그녀는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려 한다.
<파이터> dir. 윤재호
<마담 B>(2016), <뷰티풀 데이즈>(2018) 등을 통해 자신의 영화 세계 안에서 꾸준히 탈북민의 삶을 다뤄온 윤재호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파이터>(2020)는 탈북민 진아의 삶과 복싱을 통한 그 삶의 회복을 그려내고 있다. 이제 막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나온 탈북민 진아(임성미)는 서울에 자취방을 얻고 본격적으로 한국살이를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식당에서 주 6일 일을 하며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것은 너무 버거웠기에, 진아는 탈북민들의 마당발인 ‘별이 오빠’의 소개로 한 복싱 체육관의 청소 일을 병행하게 된다. 그녀의 눈에 여성 복서의 모습은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체육관의 복서들은 그녀에게 멸시의 눈빛을 보낸다. 설상가상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공인중개사는 술에 취한 채로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졸지에 공인중개사를 다치게 해 그의 병원비를 물어줘야 할 신세가 되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한영처럼 진아의 삶을 짓누르는 것은 생계의 압박과 차별의 시선이다. 다만 진아가 한영과 다르다면, 진아의 곁에는 그녀를 가족처럼 품어주는 태수(백서빈)와 관장님(오광록)이 있었다는 것. 태수와 관장은 그녀에게 프로 복서의 길을 걷는 것을 제안하고, 그녀는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어릴 적 가족을 버리고 먼저 탈북에 성공한 어머니(이승연)의 존재였다. <파이터>에서 복싱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진아에게 복싱은 그녀의 뒷배경에 산재한 현실을 희미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다. 윤재호 감독은 답답하고 옥죄어 오는 현실의 상황을 끈질기게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인물의 얼굴 외에 공백은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 듯한 연출은 임성미 배우의 실감 나는 서북 방언 연기와 함께 혹독한 압박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dir. 박동훈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레퍼런스가 명확한 영화다. 구스 반 산트의 <굿 윌 헌팅>(1997)에서 수학적인 모티브에 착안하고, <파인딩 포레스터>(2001)에서 멘토-멘티의 콤플렉스에 대한 구도, 인물의 성장과 학교생활에 대한 적응기 등을 따왔다. 이는 박동훈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멘토인 수학자는 탈북민 출신 청소부라는 설정이다. 최민식이 연기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은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여 탈북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멘티 역할이 될 한지우(김동휘)는 가난한 형편에 사회적 약자 배려 전형으로 학교에 입학한 터라, 차별과 멸시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수포자, 즉 수학에 약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지우는 친구들의 일탈을 숨겨준 죄목으로 기숙사 한 달 퇴소 처리를 받고, 갈 곳을 잃은 채 정처 없이 학교의 숨겨진 공간 ‘과학관 B103’을 전전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입시 제도에 대한 일갈로 읽힐 수도 있고, 멘토-멘티의 따뜻한 성장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사건은 입시 비리에서 비롯되었고, 주인공 지우의 성장은 이학성의 무뚝뚝하지만 애정 어린 교육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묘사한다면, 우리는 탈북민 이 악성으로의 삶을 누락시키게 된다.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으로 넘어왔지만, 아들은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학교 폭력을 당하고 끝내 월북을 시도하다 총살되었으며, 자신은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이 학설의 삶 말이다. 그는 리만 가설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공개를 꺼린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수학이 아들을 빼앗아갔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입시제도에 얽매인 청소년의 삶과 탈북민으로서 차별의 시선에 노출되었던 수학자의 삶이 공명함을 통해 성장을 이뤄낸다. 이 공명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레퍼런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든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