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의 제작 비하인드를 담은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2016)가 KBS '독립영화관'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KBS1 10월 27일 금요일 23시 30분) 2003년 11월 21일에 개봉해 32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올드보이>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전 세계 평단과 관객에게 한국영화의 위상을 알린 작품이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한 이 영화의 제작기를 담은 <올드 데이즈>는 평범한 촬영 현장 기록물이 아니다. 거기 담긴 모든 순간이 곧 영화인들의 찬란했던 도전과 성취의 역사다. <올드 데이즈>가 담아낸 촬영현장의 마법 같은 순간을 소개한다.
2003년 11월 21일 개봉. 어느덧 개봉한지 20년이 지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주인공 오대수가 영문도 모른 채 갇혀 있었던 15년이라는 시간보다도 더 긴 시간을 보낸 작품이 되었다. 그러니까 <올드보이>와의 20년은 곧 한국영화계의 고속 성장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영화계는 놀라운 발전을 이뤘고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영화와 드라마를 쏟아낼 수 있는 현장이 되었고, 무려 영화 관람 2억 명 시대를 맞이하던 순간을 제대로 즐길 새도 없이 판데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위기를 겪었다.
21세기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왜 재미있는지, 왜 충격적인지, 왜 지금도 여전히 파격적인 화두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지를 소개하는 것이 곧 <올드 데이즈>라는 다큐멘터리의 재미와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진의 연출 의도가 곧 <올드보이>의 역사적인 매력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올드 데이즈>는 감동적인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다큐멘터리다. 영화 촬영장에서 벌어졌던 일들만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영화 본편을 볼 때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 영화의 재미를 보장하기 위해선 몇 가지 넘어야 할 허들이 있다. 누군가가 영화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래도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려면 영화 본편을 보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혹은 아예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텐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올드 데이즈>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작진들이 공통으로 회고하는 점이기도 하지만, <올드보이>의 촬영 현장은 한국영화인들이 가장 젊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 순간으로 가득 찼던 곳이었다.
<올드 데이즈>는 DVD와 블루레이 등을 제작하는 회사 '플레인아카이브'가 <올드보이> 개봉 1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블루레이에 수록된 다큐멘터리다. <올드 데이즈>가 일반적인 영화 촬영현장의 기록 영상과 다른 접근을 한 이유가 있다. 대개 현장을 기록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제작진의 인터뷰와 당시 현장 기록들의 삽입 정도로 이뤄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올드 데이즈>는 박찬욱 감독 이하 배우들과 제작진을 이끌고 당시 촬영 현장을 다시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꾸렸다는 점이다. 주연배우 최민식을 데리고 그가 연기했던 오대수가 군만두를 맛보던 중국집 촬영장을 다시 찾아가 질문을 던지거나, 영화의 첫 장면을 장식했던 자살남을 연기했던 배우 오광록이 당시 촬영장이었던 아파트 옥상을 다시 찾아가 제작 당시를 회고하는 식이다. 이는 <올드 데이즈>라는 다큐멘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컨셉이다. <올드보이>를 만든 제작진을 향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기획인 것.
영화는 가상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지만, 촬영현장은 실제로 촬영이라는 행위가 벌어졌던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결국 어떤 행위의 과거를 기록한 창작물이기도 한 것이다. <올드 데이즈>는 바로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입으로 직접 <올드보이>의 전체 컨셉이 출발하게 된 사연을 듣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왜 가뒀는지가 아니라 왜 풀어줬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박찬욱 감독은 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떠올렸다고 한다.
<올드보이>를 이끌어가는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위대함이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강혜정이라는 신인배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과연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었을까? 혐오와 진실, 복수와 용서와 같은 무겁고 진지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배우의 캐스팅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지만, 강혜정 배우가 오디션 현장에 직접 사시미 칼을 들고 들어가 제작진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사연과 실제 오디션 영상 등이 <올드 데이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올드보이>가 태동하던 순간의 설렘, 우연, 열정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은 대선배가 된 유지태 배우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촬영장에서 연기를 이어 나가던 모습,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최민식 배우의 노련했던 현장 모습, 오대수의 헤어스타일을 두고 “썩은 초가집 같은 머리가 뭐냐? 너무 패셔너블한 거 아니냐?”라며 송종희 분장감독과 대치하다가 결국 박찬욱 감독의 중재로 채택됐던 사연 등은 지금 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다. 제작진의 그런 치열함이 없었다면 대중을 압도했던 <올드보이>의 스타일은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올드 데이즈>가 공들여서 소개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당시 <올드보이>라는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탄생시켰던 제작진의 면면이다. 지금은 한국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올드보이>를 찍을 당시에는 경력이 많지 않았던 신인들이었다는 점, 박찬욱 감독의 비전을 믿고 무리한 스케줄과 늘어나는 제작비를 감당해야 했던 제작자들의 사연 등이 자세하게 소개된다. 지금도 좋은 한국영화와 드라마 등을 내놓고 있는 대형 제작사가 된 용필름, 사나이픽처스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현장을 누비던 프로듀서 출신들이 독립해서 만든 회사들이다. 그들의 입으로 직접 촬영 당시의 무용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제는 할리우드가 찾는 촬영감독이 된 정정훈 촬영감독의 풋풋했던 모습도 <올드 데이즈>에 담겨 있다.
이러한 제작진 모두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올드보이>는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올드 데이즈>에 등장하는 많은 배우들의 사연과 말 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것은 배우 윤진서의 말이다. 그녀는 “<올드보이>를 찍고 난 이후 모든 영화 촬영현장이 다 <올드보이> 현장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현장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이 영화 이야기만 하고, 너무 서로를 위하고, 밤새도록 하는 게 영화를 찍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는 그녀의 말이 곧, <올드보이>의 촬영현장을 기억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언급하게 되는 이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때 얻어지는 결과물.
지금의 한국영화산업이 새롭게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드 데이즈>가 보여주는 촬영장의 마법 같은 순간들에 있지 않을까.
<올드보이> 제작과정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플레인아카이브에서 출시한 <올드보이> 디지털 리마스터링판 블루레이에는 더 많은 촬영 뒷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랫동안 박찬욱 감독의 촬영 현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한세준 스틸작가의 놀라운 아카이브 자료와 인터뷰를 시작으로, 무려 3시간 분량이 넘는 메이킹 영상을 제작 순서별로 편집하여 제공한다. <올드 데이즈>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서 완성도가 뛰어나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근간이 되는 메이킹 영상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올드보이> 블루레이에 수록된 기록 영상은 분량도 어마어마하고 그 디테일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올드보이> 제작현장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기록과 아카이빙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입증한 작업이다. 심지어 박찬욱 감독이 1999년에 만든 단편 영화 <심판>도 수록되어 있다.
김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