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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의 Aroom] 조현철과의 시간은 선(線)으로 흐르지 않았다(feat.광화문)

씨네플레이

‘A room’은 <Actor's room> 즉, <배우의 방>을 뜻합니다. 배우의 공간에서 배우의 생각을 들어다 봅니다. (캐릭터에 빠져 사는) 배우가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묻고자 하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그가 종종 들르는 광화문광장 근처 커피숍에서
그가 종종 들르는 광화문광장 근처 커피숍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괴물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현실에선 내성적 성향의 사람인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그 엄청난 낙차를 만날 때마다 상상한다. 평소엔 저 에너지를 어디에 숨겨두고 사는 걸까. 말수 적은 배우란 이야길 익히 듣긴 했지만, 조현철은 상상한 것보다 낯을 더 가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고 살아왔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7년을 준비해 내놓은 연출작 <너와 나>에 그 증거가 가득했으므로. 수학여행 전날에 벌어지는 두 여고생의 이야기를 백일몽처럼 그린 영화를 보며 나는, 조현철이 타인의 고통을 섬세하게 살피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관찰하며 살아가는 창작자가 아닐까 예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조현철과 대화를 나누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조현철은 말이 느리다. 목소리 데시벨도 매우 낮다. 그러므로 이 인터뷰 속 조현철의 말을 0.8 배속으로, 살짝 부끄러워하는 뉘앙스를 얹어서 읽어주면 이날의 분위기가 조금 더 잡히지 않을까 싶다.

 


-혹시, 텃밭 일구고 계신가요?

=네. 올해 초부터 시골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시작했어요. 정원 일도 하고요. 감자, 고추, 애호박, 고수… 꽤 많이 심었는데, 여름에 제주도 한달살이하면서 잠시 쉬었더니 고추만 남았더라고요.

-시골 생활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어떤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상황적으로 그렇게 됐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시골집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갔는데, 저와 잘 맞더라고요. 자연 속에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SNS를 올린 사진들을 보면서 꽃이 피고, 지고, 단풍이 색을 입는 계절 변화에 관심이 많다고 느꼈어요.

=서울에서 한창 생활할 땐 몰랐어요. 가니까 보이는 게 그것밖에 없다 보니, 더 유심히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낯설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에도 숲속에서, 자연과 매우 가깝게 산 경험이 있어서요.

-제주도에선 어디서 머물렀는지 여쭤도 될까요?

=서귀포 쇠소깍 근처요. 아침에 뛰고, 바닷가 수영하고, 카페 가고…그렇게 혼자 지내다 왔어요.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인가 봐요.

=그런 편이에요. 도시 속에 혼자 있는 거 말구요. 자연 속에 혼자 있는 건 좋아해요.

인터뷰로 마주한 곳은 광화문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조현철이 안내한 장소로, 그가 종종 들르는 커피숍이라고 했다. 그의 오른쪽 팔목에 채워진 노란색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REMEMBER(리멤버) 2014’

 

그의 오른쪽 팔목에 채워진 노란색 팔찌. ‘REMEMBER 2014’
그의 오른쪽 팔목에 채워진 노란색 팔찌. ‘REMEMBER 2014’

조현철은 개인적인 사고를 겪은 후, 삶과 죽음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 그것이 2016년 2월. 2달 뒤가 세월호 3주기였다.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식에 참석한 후 그는, 자신의 의지를 떠나서 이 이야길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그즈음에 세월호 선체 인양도 이뤄지면서 여러 가지가 타이밍적으로 그를 잡아끌었노라고.

-지난 3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나와 나>를 본 후, 조금 앓았습니다. 제 인생의 화두가 ‘죽음’과 ‘시간’인데, 두 가지가 너무 진하게 앉아 있는 영화여서 오랜 시간 잔상이 가시질 않았어요. 그전에도 죽음에 관심이 많았던 건가요? 죽음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바뀐 것인지도 궁금하군요.

=어릴 때 자주 아파서 죽음을 무서워했어요. 유년 시절 엄마(여성운동가이자 소설가인 안일순) 곁에서 접했던 것들도 있고요. 환경적인 부분과 제 개인의 상태가 겹치면서 죽음에 가깝게 느끼고 있었는데, 사고를 겪고, 뭉뚱그려서 얘기할 수 없는 세월호의 존재들을 감각하면서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영화에 그렸듯, 두려워하던 죽음을 조금은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D.P.>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에서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말하기도 했죠.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요. 죽음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고, 기억으로 그들을 되살리는 모습도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친구가 하는 블로그가 있어요. 거기에 린 마굴리스라는 미생물학자에 대한 이야길 친구가 올렸더라고요. 린 마굴리스는 2011년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그분 아들 도리언 세이건이 추도사로 했던 말(“어머니가 자주 가던 그 연못 어딘가에, 어머니의 몸에 붙어있던 이끼나 미생물이나 다 떠 있을 것이다”) 중에 인상적인 게 있었어요. 그 추도사에서 영감받아 아빠에게 전한 말이었어요.

-물리학자 김상욱도 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물리학적으로 죽음이란 원자의 소멸이 아니라 원자의 재배열”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흩어져 다른 것의 일부가 되는 것뿐”이라고요. 감독님 수상소감과 이 책을 보면서 죽음에 관한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왜 죽을까’에서 ‘인간은 죽을 걸 알면서도 왜 아득바득 살까’로 말이죠. 혹시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는지요.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으려고 아등바등했던 게 <너와 나>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해서 쓴 건 아니거든요. 그저 제 주변의 어떤 고통,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게 삶의 의미라는 건 ‘나도 편안해지고, 너의 마음도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에 가까워요. 이것 말고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번다거나, 집은 산다거나…이런 건, 잘 모르겠어요.

〈너와 나〉에 출연한 박준 시인
〈너와 나〉에 출연한 박준 시인

-영화에 박준 시인님이 물리 선생님으로 등장해서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준 시인의 어떤 시는 단편영화 같은데, <너와 나>는 시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떤 인연인가요?

=신이수, 최아름 감독의 단편영화 <이름들>(2013)이라는 영화에서 시집을 막 출간한 젊은 시인을 연기했어요. 그 캐릭터 모티브가 박준 시인님이었죠. 자주는 아니지만, 그 인연으로 시인님을 종종 뵀어요. 그러다가 시나리오를 쓸 때, 매체가 다르긴 하지만, 시인님의 시 같은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시인님에게는 물리학 강의를 부탁하고 싶더라고요. 시인님이 하는 강의를 보고 싶어서요.

-엇, 박준 시인님이 강의를 진짜 하신 건가요?

=네. 보조 출연자들을 상대로 강의를 실제로 하셨어요. 그 상황을 끊지 않고 찍은 거고요.

-연기라기보다, 진짜가 담긴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얼핏 국어 선생님 역으로 부탁할 법한데, 물리 선생님으로 설정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유가 없진 않은데요… ‘빛의 이중성’이라는 주제가 중요했거든요. 이 영화에선.

-‘빛의 이중성’이라 함은…….

=양자역학과 관련됐어요.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길 들은 기억이 얼핏 났다.

-양자역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고 들었어요. 아인슈타인도 이해 못 했다고요. 어떤 지점에 영감받아 영화에 녹였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요.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보긴 했는데, 그중 (양자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이 있었어요. 그 책을 다 읽은 날 꿈을 꿨어요. 성초이 작가(<구경이> 작가 2인)와 셋이서 인왕산을 갔는데, 메뚜기 떼가 갑자기 지나가더니 친구들은 사라지고 저만 남아서 길을 잃었어요. 그때 어떤 인격체가 나타나서 ‘양자의 세계’를 보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양자의 세계를 본다는 건 불가능한데 말이에요. 순간 파란빛이 점멸하더니 내레이션 같은 게 나와요. “이것은 무(無)인 동시에 유(有)이고, 존재인 동시에 비존재이고, 물질인 동시에 물질이 아니다.”라고.

-무(無)인 동시에 유(有)…그러고 보니 <너와 나>엔, 이젠 우리 곁에 없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들이 가득하네요.

=네. 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제겐 중요한 주제여서 시나리오 쓰는 내내 관련된 것들을 많이 찾아봤던 것 같아요.

검은색 백팩에서 몰스킨 노트를 꺼낸 조현철
검은색 백팩에서 몰스킨 노트를 꺼낸 조현철

-혹시 <오펜하이머> 보셨나요? 그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양자역학을 시각적으로 상상해서 구현했더군요.

=제가, 실은…놀란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데요. (웃음) 양자역학을 시각화한다는 게 뭐랄까. 조금 난센스 같더라고요.

-영화적 상상이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인 건가요? 그런데 영화라는 건, 상상을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매체이기도 하잖아요.

=원자 모형이 원자의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듯이, 본질적인 어떤 것에 다가가려는 데에 있어서 시각적인 표현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거 같거든요. 하지만 놀란의 영화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그것을 시각적인 스펙타클로 납작하게 표현해버리니까 어느 순간 감흥이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한편으로 영화는 표면을 다루기에 최적화된 매체잖아요? 영화예술의 본질적인 한계이자 매력인데, 요새는 그런 화법이 많이 퇴색된 거 같긴 해요. 앞으로 제가 추구하고 싶은 방식이기도 한데, 감정의 서술이 아닌 표면적인 것들의 조형성과, 충돌, 리듬을 통해 내면에 다가가는 어떤 것을 해보고 싶어요. <너와 나> 시나리오 작업 끄트머리에 본 게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2020)였는데, 그 영화는 표면만으로 뭔가를 구성하는 걸 굉장히 잘한다고 느꼈어요.

〈소년 아메드〉
〈소년 아메드〉

-어떤 면에서요?

=가령, (벨기에에 사는 10대 무슬림 소년) 아메드는 이슬람 급진주의에 빠진 데 이어, 어린 시절부터 본인을 돌봐준 선생님을 배교자로 보고 칼로 찌르려는 계획을 세워요. 이때 칼을 양말 속에 넣고 살인을 모의하면서 자신의 방을 왔다갔다 하는데, 그 장면에서 대사 혹은 감정연기로 뭔가를 굳이 표현하지 않아요. 그저 배우의 신체 움직임만을 보여주죠. 그런데 그 행위만으로도 그의 감정부터 상황 모든 게 쫙 설명되죠.

이전에 그런 표현을 제일 잘했던 사람은 에드워드 양 같아요. 이를테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의 거의 모든 장면이 그런 식으로 구현돼있는 느낌이에요. 영화에 주인공 아버지가 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 한국에서 그 장면을 똑같이 찍는다면, 고문받으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찍지 않았을까…그런데 에드워드 양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커다란 얼음덩어리 위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여주죠. 저는 그게 영화가 납작해지지 않으면서, 더 많은 레이어를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뭔가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 썼다는 몰스킨 노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뭔가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 썼다는 몰스킨 노트

-아까 박준 시인님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너와 나>의 영어 제목인 <The Dream Song>도 시인 존 베리먼의 ‘꿈의 노래’(The Dream Song)에서 왔죠.

=신이수 감독님이 주신 책인데,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된 시라서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읽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마음에 계속 두고는 있었는데, 그게 딱 영어 제목을 지어야 할 때 타이밍적으로 오더군요.

-타이밍이라고 하셔서 문득 궁금해졌는데, 인연을 믿으시나요.

=인연을 믿는다라… 결정론에 관해 물으시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감은 계속 들긴 해요.

-나의 선택이 ‘진짜 나의 선택인 건가’ 하는?

=네. 어떠한 스케일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달라지긴 하는데요. 가령 사회적으로 봤을 때, 시스템 안에서의 ‘개인의 의지’라는 게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거든요. 우리가 SNS 등의 매체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잖아요? 그런 것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주로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들이죠. 당장, 영화라는 것도 제가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만들 수 있지 않고요. 그런 것들을 알기에, 의심하면서, 조금이라도 어떤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너와 나> 찍을 때도 그런 과정에 있으셨나요.

=저희 영화는 (시스템에 의해서) 투자 등 여러 가지로 거절을 많이 당했어요. (웃음) 영화 제작 지원 사업도 여러 번 떨어졌고요. 계속 고꾸라지면서 여기까지 왔죠.

〈너와 나〉
〈너와 나〉

-작년인가? SNS에 <너와 나> 흔적과 함께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영상을 하나 캡처해서 올리셨더군요. 마도카가 “난 ‘호무라’(마법소녀)도 절대 잊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이었어요. 뭔가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어서 올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앞 대사를 찾아봤더니,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라는 맥락이었어요. 과하게 의미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너와 나>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정서가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죠.

=혹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보셨어요?

-솔직히 잘은 몰라요. 감독님이 올린 걸 보고 뒤늦게 조금 찾아봤습니다.

=이 만화는 ‘마도카’가 종국엔 마법 소녀가 되는 이야기에요. ‘호무라’라는 캐릭터는 처음에는 빌런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반전이 있는 게 알려지는 인물이죠. 어떤 타임라인을 반복하는 능력이 있구요. 호무라는 같은 시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마도카가 마법 소녀가 되는 걸 막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마법 소녀가 되면 아주 비참하게 죽거든요. 불행한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게 마법 소녀라서 호무라는 마도카가 마법 소녀가 되는 걸 저지하기 위해 수 없이 싸우고 수없이 시간을 반복하죠.

시간을 돌려서라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그러나 마도카는 결국 마법 소녀가 됩니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거든요. 그 대가로 세상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돼 버리는데, 그렇게 사라지면서 호무라에게 말해요.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난 언제나 호무라 곁에 있을 거야”라고. 맞아요. <너와 나>와 관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세상에서 사라지는 마도카가 남겨진 자를 도리어 걱정하며 건네는 위로. <너와 나>도 그렇다. 떠난 이가 남아있는 자를 염려하고 안아준다. “미안해”라고, “사랑해”라고

몰스킨 노트에 기록된 글은 '비밀'이라고 했다
몰스킨 노트에 기록된 글은 '비밀'이라고 했다

-티빙 ‘전체관람가+: 숏버스터’에서 찍은 <부스럭> 때 “가상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뭔가를 부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스럭>과 <너와 나>가 일견 이란성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 관심사가 두 영화에 투영되지 않았나, 하는.

=부수겠다고 한 건 조금 부끄럽고요. (웃음) 뭔가 확실하게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희미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긴 해요. <너와 나>도 그렇고 <부스럭>도 그렇고.

-백상 시상식 때 수상소감만큼이나 눈에 띄었던 의상이었어요.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이었던 ‘박남옥’의 모습이 그려진 셔츠를 입으셨죠. 그러고 보니, <차이나타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구경이> 등 근 몇 간 주목받았던 여성 서사 콘텐츠엔 당신이 있었더군요. 엄마와 이모(가수 안혜경) 영향인 건가요?

=박남옥 감독님이 그려진 셔츠는 <너와 나> 촬영 감독님(DQM, 정다운) 의견이었어요. 직접 의상을 섭외해 주셨죠. <너와 나> 촬영장은 여성 스태프 비율이 꽤 높았어요. 특히나 여성 촬영 감독은 영화판에서 드문데, 판에 박힌 영화판의 어떤 것을 조금 바꿔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함께 하자고 한 부분이 있었죠.

-여고생 이야기라서 여성 스태프 비율을 높인 게 아니라, 구조적인 이유가 컸던 거군요.

=네. 구조적인 부분을 바꿔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스태프 구성에 신경을 썼어요.

조현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재학시절 만든 단편 <척추측만> <뎀프시롤: 참회록> <로보트: 리바이벌> 등으로 영화계에서는 일찌감치 눈도장을 받은 연출가다. 그러나 범 대중이 조현철에게서 먼저 발견한 건 ‘연기 재능’이었다. 영상원 시절, 동기들 작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차이나타운> <호텔 델루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D.P.> <구경이> 등을 거치며 존재감을 하나씩 드러냈다. 특히 <D.P.>에서 연기한 조석봉 일병, 그러니까 평범했던 청년이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을 뼈 아프게 전하며 대중의 망막에 깊게 각인됐다. 나는 그에게, ‘배우 조현철’의 자아는 감독일 때와 다른지 물었다.

=제가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진 않아요. 배우로서는 눈앞에 놓인 걸 그냥 하는 거라서, 연기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딱히 드릴 말씀이 없더라고요. 제가 연기를 잘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요.

많은 배우에게 자극을 제공해주는 예술적 허영이나 욕망도 그에겐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연기를 하게 하는 동력은 뭘까.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 (웃음) 이걸 해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지속적으로 연기를 작게나마 했으니까 <너와 나>도 쓸 수 있었죠.

-연결 짓는 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지난 6월 부친상 조의금을 군 인권센터에 기부한 것이 타인에 의해 알려졌어요. 돈을 벌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좋은 데 써야 한다는 마음도 그만큼 큰 것 같습니다.

=그게… ‘좋은 데 써야지’라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지만, 내가 갖고 있을 돈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돈이 들어왔고, 노동의 대가로 이 돈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경계했던 것 같아요. 갑자기 인기를 얻어서 잘 된다거나, 일한 노동의 가치보다 큰돈을 번다거나, 횡재한다거나…이런 것들을 경계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착취가 많이 발생하잖아요. 어떤 희생이나 고통의 결과로 이 돈이 나에게 들어온 거라면, 그걸 내가 가지고 있을 자격이 있나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고요.

-혹시 세상에 ‘행복지수보존법칙’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행복에 총량이 있어서, 누군가가 불행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행복할 확률이 있다는.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은 합니다. 요즘 택배가 많잖아요? 제가 사는 곳이 용인인데, 이전과 달리 도로에 나가면 화물차가 많아졌어요. 물류센터가 근처에 많이 생겼거든요. 그 물류센터들을 짓는 과정에서 많은 산과 나무가 잘려 나갔어요. 내가 누린 대가들이 이런 곳에서 발생했구나,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거죠.

-<너와 나>엔 수많은 화초와 푸른 식물이 나와요. 그뿐 아니라, 고양이, 강아지, 앵무새, 참새 등 동물도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의도한 게 있을 것 같군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계속 눈에 들어왔어요. 인간 종이 가진 오만함이랄지 자의식에서 벗어나서 동물이나 나무 등을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는… 인간을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지 않아요. 인간은 손에 쥐고 있는 편리함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고,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고, 많이 싸죠. 큰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한, 인간의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마침, 세상의 종말을 그린 <유쾌한 왕따>를 촬영하셨죠.

=아, <유쾌한 왕따>는 정말 장르물이에요. 사회학적인 어떤 것은 읽을 수는 있겠지만, 장르적 재미로 봐야 하는 작품이죠.

-그럼 조석봉을 연기한 <D.P.> 땐 어땠나요.

=비슷했어요. <D.P.>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긴 해도, 그 역시 엄밀히 말해 장르물이잖아요?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군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는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그대로 대변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 폭력과 달리, 현실에서 작동하는 폭력은 더 교묘하고 복잡하니까요. 이 영화가 우리의 현실이라고 해 버리면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봤죠. 그런 생각이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논리로 조석봉을 이해하려고 하면 잘 안되더라고요. 장르적으로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조금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현실과 ‘거리 두기’하며 연기하셨지만, 조석봉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파급력은 상당했어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대중의 그런 반응은 어떻게 다가왔습니까.

=음……. 영화가 어떤 사회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는 있어도, 뭔가의 해결책이 된다거나 재발 방지의 계기가 되는 건 힘든 것 같아요. <D.P.> 이후에도 군대 관련해서 최근에 사고가 또 있었잖아요?

-아… 그랬죠.

=영화 이후에 우리가 어떤 말들을 할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돌아가는 건 좀 다른 것 같단 생각을 하죠.

-조심스러운 질문인데 그럼 <너와 나>는 관객에게 어떻게 닿기를 바라시나요. 영화를 보며 관객은 세월호 참사와 만날 텐데, 이후 이태원 참사라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도 있었죠.

=방금 조석봉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인데,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드는 건 아니에요. 다만, 어떤 것들이 사라졌는가를 한 번쯤 생각하시면 좋겠다 싶었죠. 요즘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잖아요? 물론 그 자체로 상업적인 가치가 있지만 그런 가치 외에, 좋은 이야기가 가지고 있었던 위로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가령, 어릴 적 잠들기 무서울 때 엄마가 읽어줬던 동화 같은 이야기들. 그런 가치도 있었다는 걸 조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연출자로서 어떤 목적성보다는, ‘어떤 이야기’일지에 더 신경 쓴다는 그를 최근 잡아끄는 건 제주도 4.3 사건이다.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온 것 역시 4.3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고 그가 말했다. 그것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제주 4.3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 왔나요.

=<너와 나> 끝내고, 겨울에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라는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숲을 지키는 사람들 이야기죠. 그즈음에 제주에 혼자 내려갔는데, 그때도 꿈을 꿨어요. 숲이 다 뽑혀 나가는. 너무 놀라서 새벽에 깨어났죠. 다시 잠들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가 시골길을 걷는데, 진눈깨비가 바람을 타고 내려요. 그때 뭐랄까. 섬 자제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제주의 숲과 4.3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뭔가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과거 어떤 인터뷰에서 ‘조현철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이라는 질문에 ‘모순’이라고 답했던데, 지금은 어떤가요.

=하하하.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면 같아요. 그리고 저는, 그런 것도 불편했거든요. 백상 수상소감으로 인해 제가 깨어있거나, 좋은 사람처럼 비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들어오는 인터뷰도 다 거절한 거고요. 이 상업적인 속성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면들을 납작하게 눌러서 예쁘장하게 포장한 다음에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괜히 말을 덧붙이지 않으려 했어요. 저는 실수도 잦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인간일 뿐이니까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인 박정민 배우가 “현철이는 넘어설 수 없는 산 같다”라는 애정과 질투 섞인 말을 자주 하고 다니죠.

=(쑥스러운 몸짓) 그런데 열등감은 제가 더 큰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을까요? 한창 연기가 하고 싶었을 때는 정민이가 부럽기도 했거든요. 함께 자취 생활할 때 보면, 정민이는 학교 갔다가 대학로 갔다가 극단 갔다가…열심히 사는 걸 보면서 ‘저걸 어떻게 다 하지?’ 놀라곤 했어요.

첫 장편 '너와 나'를 들고 온 조현철 감독
첫 장편 '너와 나'를 들고 온 조현철 감독

-조금 웃긴 질문일 수 있는데, 감독님은 유명해지길 바라나요? 그런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묻습니다.

=제가 조금 극단적이에요. 관심받기 싫으면서 관심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으흐흐흐.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고 싶지만 잊혀지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이효리가 생각나는군요. (웃음)

=사람이 뜨면 좋죠. 좋긴 한데, 거기에 가치를 두는 건 많이 위험하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정신 차리고 살려고 하죠.

-정신 차리고 살지만, 유혹에 빠지는 순간도 있겠죠?

=매 순간이…으흐.

-그런 순간엔 늘 자기반성을 하나요.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거죠. 내가 조금 그랬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헛소리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이런 것들을 말이죠.

-혹시 오늘 인터뷰 끝내고 집에 가서도…?

=100퍼센트…(일동 웃음)

-오늘 너무 죽음에 대해서 여쭤봤는데, 세상에 사랑은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뭔가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게…제가 올해 초부터 ‘금강경’을 유튜브로 듣고 있어요. 듣다 보니 부처님 화법이 조금 다르더라고요. 많이들 어떤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말하는 깨달음은,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한다’였어요.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드러내는, 그런 ‘금강경’ 방식을 영화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에필로그(epilogue)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나는 그에게 ‘시간’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다. 예지몽 같기도 하고 신탁(神託) 같기도 한 세미(박혜수)의 꿈에서 시작하는 <너와 나>의 시간 감각에 매혹된 탓이었는데, 그가 작품을 준비하며 읽었다는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인식하는 건 인간의 관점이란 게 영화에 녹아있는 게 아닐까.

=제가 물리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시나리오 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 같은데요. 영화에 나오는 플래시백이라거나 꿈이나 현실이라는 것들이 그러니까…플래시백이 플래시백이 아니고, 꿈이라고 말하는 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얘기하는 게 현실이 아닌 거예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어 사진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희 아버지가 <너와 나>를 가편집 상태에서 보고 리뷰 남기신 게 있어요. 그걸 핸드폰에 찍어뒀는데, 잠시만요.” 그는 영상을 재생한 후 핸드폰을 테이블에 남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휴대폰 속에서 화분이 가득한 방에 앉아 있는 노신사가 보였다. 그의 아버지, 고(故) 조중래 명지대 명예교수였다.

아버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어, 하나님의 시간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게 같은 시점이야. 그래서 성경 말씀에 ‘네 몸이 치유되었다’ 하는 건 현재 치유됐다는 게 아니라, 지구적인 관점에선 미래에 치유될 수도 있다는 거야. 그 치유 시점이 언제라는 건 몰라.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선 치유된 거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조현철: (목소리) 그게 내 영화에 있다고?

아버지: 어! 그게 너 영화에 있잖아.

조현철: (목소리) 그걸 어떻게 느꼈어?

아버지: 시제를 보면. 영화가 흘러가는 시점하고 스토리가 중첩(여러 상태가 동시에 공존)되면서 같은 시점으로 다 다가오는 거야.

자리로 돌아온 조현철에게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정확하게 짚어서 말해 줄 때의 기분이 어떠하냐”고. 그가 말했다. “신기하죠.” 기분 탓이었을까. 원래도 살짝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유독 더 떨리게 느껴진 건.

조현철이 찾고 있다는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드러내는 것.’ 나는 그것이 이 영상에 있음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아들의 작업물을 깊게 공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전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인터뷰 끝에서 나는 ‘사랑의 증거’를 보았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