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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저 하늘에도 슬픔이〉〈갯마을〉… 한국영화계의 거장 김수용의 작품세계

주성철편집장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던 회고전 당시 포스터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던 회고전 당시 포스터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감독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거장 김수용 감독이 지난 3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이날 오전 1시 50분쯤 요양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하여 1999년 <침향>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만든 김수용 감독은, 111편을 만든 고영남 감독을 제외하면 한국 영화감독 중 최다 연출 기록을 가지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한편, 이번 장례식은 고인의 연출부 출신인 정지영 감독과 이장호 감독, 배우 안성기, 장미희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아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김수용 감독은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높았고, 1945년 해방 직후 3·1 운동에 관한 연극인 <대지의 노을>의 희곡을 쓰고 직접 주연과 연출을 맡는 등 일찍부터 연출에 재능을 보였다. 졸업 후 서울사범학교를 다니며 연극부 활동을 이어갔고, 1951년 육군 통역장교로 입대한 그는 1954년 국방부 영화과에 배속되어 20여 편의 군 홍보, 교육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던 중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정불화를 겪는 곰탕집 주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의 코미디물 <공처가>(1958)로 데뷔하게 되는데, 여전히 군인 신분이었던 탓에 토요일 오후 퇴근하여 월요일 새벽 귀대할 때까지 촬영하는 등 놀랍게도 주말에 시간을 내서 연출한 작품이라 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이후 본격적으로 <벼락부자>(1961), <청춘교실>(1963), <내 아내가 최고야>(1963) 등 주로 코미디물을 내놓다가, 1960년대 당시 28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를 통해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우뚝 섰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당시 대만에 수출까지 했는데, 이후 영화 필름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가 2014년 대만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영상자료원이 디지털 복원하기도 했다. 복원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전편 관람 가능하다. 이후 그는 1984년에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직접 리메이크해서 내놓기도 했다. 

이후 <혈맥>(1963), <갯마을>(1965), <안개>(1967), <만선>(1967), <산불>(1967), <토지>(1974), <화려한 외출>(1977), <만추>(1982)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리얼리즘 계열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 이전에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를 1982년에 리메이크한 사람이 바로 그이며, 최근 <헤어질 결심>을 통해 다시 주목받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그에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안겨줬다. 초기 코미디물 외에 주로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이들 작품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영화 모더니즘의 장인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오영수 원작의 <갯마을>은 작은 해변마을에서(지금의 기장군에서 촬영) 살아가는 주인공 해순(고은아) 일가를 통해 어민들의 삶과 정취를 탁월하게 묘사한 걸작으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갯마을〉(1965)
〈갯마을〉(1965)
〈안개〉(1967)
〈안개〉(1967)

보통 김수용 감독은 1960년대 이후 문예영화의 전성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감독으로 거론된다. 문예영화(文藝映畵)란 보통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유명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일컫는다. 1920년대 일본의 영향 아래 등장한 표현이긴 하나, 문예영화라는 이름을 통해 근대 예술로서 영화가 가진 예술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던 1950년대 이후부터는 ‘오락영화’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으로 여겨졌으니,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른바 ‘예술영화’를 그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해외 영화제에 출품됐던 이범선 원작, 유현목 감독 <오발탄>(1961)을 비롯해 나도향 원작, 신상옥 감독 <벙어리 삼룡이>(1964), 오영수 원작, 김수용 감독 <갯마을>(1965), 이효석 원작, 이성구 감독 <메밀꽃 필 무렵>(1967), 선우휘 원작, 이만희 감독 <싸리골의 신화>(1967), 황순원 원작, 유현목 감독 <카인의 후예>(1968) 등이 대표적 작품들이다.  

 

하지만 문예영화에 대해 현실감각의 부재와 사회 현실에 대한 외면을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했다. 김수용 감독도 이런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으나, 「한국영화감독론」을 쓴 김수남은 그에 대해 쓴 챕터 ‘형식적 리얼리티의 영상미학을 추구한 김수용’에서 “문예영화에 대해 보통 현실감각의 부재를 지적하는데, 김수용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오판’이라 볼 수 있다”며 “김수용은 한국 현대영화의 영상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문예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 <오발탄>의 유현목이나 <싸리골의 신화>의 이만희의 사실적 영화들의 전통과 하는 ‘사실주의적 영화작가’로 평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김영수 원작의 <혈맥>은 시대 재현과 풍자 정신이 잘 살아있고, 차범석 원작의 <산불>도 시대의 비극을 감각적인 터치와 사실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즉, 독자적인 연출자로서 원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소설의 주제를 현재적인 시점에서 탁월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선배들의 영화에 독설도 서슴지 않았던 후배 감독 하길종도 “김수용의 전위적인 실험정신을 볼 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오랜 인습에 젖어온 한국영화와 다르다”고 평하기도 했다.

〈혈맥〉(1963)
〈혈맥〉(1963)
〈산불〉(1967)
〈산불〉(1967)

실제로 김수용은 오랜 시간 정부의 검열에 시달렸던 대표적 감독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 흥행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도 비참한 산동네의 풍경이 지나치게 부각된다는 이유로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우리 삶의 진솔한 풍경에 포커스를 맞추면 현실 고발이 되는 시대였다.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을 쓴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검열의 폐해를 얘기하기 위해, 아예 그가 했던 다음의 얘기를 책에다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영화감독들은 크건 작건 영화 검열로 인해 충격받은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충격을 숙명처럼 감수하며 작품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창작과 검열이라는 상극된 모순에 시달리다가 끝내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실제로 검열의 장벽을 뼈저리게 체험한 그의 세 영화 사례를 아래처럼 소개하고 있다. 

〈가위바위보〉(1976)
〈가위바위보〉(1976)
〈도시로 간 처녀〉(1981)
〈도시로 간 처녀〉(1981)

“김수용은 일찍이 <가위바위보>(1978)에서 작품과 검열의 갈등을 심하게 겪은 바 있다. 조국을 잃은 베트남 소녀들이 제 나라의 깃발을 보고 따라가는 후반부 장면을 두고, 어떻게 망한 나라 사람들이 국기를 쫓아가느냐는 이유로 가위질을 당한 것이다.(<가위바위보>는 조국 베트남이 패망하자 탈출해서 한국 땅에 정착한 렌 부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다섯 아이들과 함께 부산에 정착한 그녀는 전쟁 후 자유국가로 다시 선 한국을 보며 조국의 필요성을 절감한다.-편집자주) 그의 다른 작품 <산불>이 각본 심의에 넘겨졌을 때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상 때문에 입산했던 사나이가 잘못을 뉘우치고 산에서 내려온 동기를 뚜렷이 밝히고, 그의 옛 직업이 교사였다는 배경 설정도 바꾸라는 개작 통고를 받았기 때문이다.(<산불>에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있다가 탈출하여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온 주인공 규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잠시나마 빨치산의 일원이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편집자주)  (중략) 당시 버스 안내양의 삶을 그리고 있는 <도시로 간 처녀>는 외부의 압력으로 상영 도중 간판을 내리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 작품이 지닌 사회성은 검열 때부터 논란을 빚었고 상당 부분 삭제된 가운데 개봉했으나 버스 노조의 집단 항의에 부딪혀 중단되고 말았다. 먼저 검열에서 잘려나간 장면을 살펴보면 버스안내양들이 알몸 수색을 당하는 대목과 이에 항의하여 여주인공 유지인이 버스회사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장면(이 부분은 재촬영 때 부상만 당해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타는 해피엔딩으로 처리) 등이다.” 

​2018년 제3회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산불〉 GV에 참석한 김수용 감독과 배우 신영균(사진 오른쪽)
​2018년 제3회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산불〉 GV에 참석한 김수용 감독과 배우 신영균(사진 오른쪽)

이후 군사독재정권 하의 강력한 통제 대상으로 검열을 통해 한국영화들이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김수용 감독은 강화된 검열 정책에 항의해 <허튼소리>(1986)를 끝으로 잠정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제작에 집중하다가 다시 연출로 복귀해 <사랑의 묵시록>(1995)과 <침향>(2000)을 끝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던 그는,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고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초대 회장이었으며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가졌으며, 2010년에는 김수용 감독의 영화 27편을 상영한 ‘나의 사랑, 씨네마’ 회고전이 열렸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