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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인류는 변태(變態)하노니, 새로운 사랑을 발명하라! 〈티탄〉

성찬얼기자

프랑스의 여성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의 영화 <티탄>(2021)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영화라 할 수밖에 없다. 아주 상투적인 감상이지만, 달리 표현하는 게 별로 탐탁지도, 적확하지도 않을 정도다. 관객의 일반적인 평가가 대체로 그러하고, 영화적인 표현 방식이나 이야기 전개도 그러하다. 역겹다거나, 어이없다거나, 도통 이해할 수 없다거나 하는 등의 반응도 그 ‘충격’에 대한 나름의 판단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7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것도 누군가에겐 충격일 수 있을 사실이다. 도대체 어떤 충격일까?


기계를 이식한 몸, 몸이 된 기계

요즘 사람들에게 웬만한 시각적 충격이나 선정성 따위는 만성이 된 지 오래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접속하게 되는 정보들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극단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런 것들에 비해 영화는 한물간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심한 물리적 자극과 그로 인한 해소를 요구하게 되는데, 비단 감각적 쾌락 차원만은 아니다. 심리적 욕구 충족이나 분출, 스트레스 또는 (정치적?)판단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마저도 기계에 의존하게 된 상태다. 기계가 또 하나의 몸이 됐다는 말도 이제 식상하지 않은가.

사람의 감정 또한 그렇게 자극받고 새롭게 ‘형성’된다. <티탄>은 현재 인간의 그러한 존재 양태를 때론 현란하게, 때론 암울하게, 또 때론 파격적으로 진단하는 영화다. 영상의 화려함만큼 메시지는 묵직하고, 비틀린 인물들의 엽기적 행각만큼 주제는 선동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애절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최종적으로 남은 감정은 그 애절함이다. 무엇에 대한 애절함이냐면 결국 사람이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방식과, 그것의 영원한 불가능성, 또 그렇기에 더 간절해지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이라고나 말하겠다. 그 어떤 표현의 과격함보다 그 애절함이 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건 별다른 감흥이다.

어릴 때 아버지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뇌에 티타늄을 심은 채 어른이 된다. 모터쇼의 댄서로 활동하며 남성들에게 인기 절정이다. 알렉시아는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이다. 어릴 적 사고 이후 부모와는 줄곧 냉전 상태. 집적대는 남성들에게 무분별한 분노마저 느낀다. 결국 알렉시아는 내재된 폭력 충동을 폭발시키며 연쇄살인범이 된다. 살해 방식은 늘 머리에 꽂고 다니는 비녀 등 주로 뾰족한 금속 재질이다. 알렉시아에겐 자동차(로 대표되는 기계)애착증이 있다. 경찰에 쫓기던 알렉시아는 변신을 꾀하는데, 애정없는 난교를 일삼다가 임신한 상태다.


새로운 ‘예수’는 왜 이토록 폭력적인가

마침 소방구급대 대장 뱅상(뱅상 랭동)이 10년 전 잃어버린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다. 알렉시아는 뱅상의 아들을 자처한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친부모(집에 불을 질러 살해했다)로부터 물려받은 사회적 역할마저 내동댕이치는 거다. 뱅상은 단단하고 강인한 남자지만, 밤마다 스스로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야할 만큼 병든 상태다. 그런 뱅상에게 알렉시아는 구원이나 마찬가지, 알렉시아는 끝끝내 자신을 숨기며 뱅상의 아들 아드리앵이 된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드러나는 갈등은 사랑의 밀도에 정비례해 사뭇 폭력적이다.

뱅상은 알렉시아/아드리앵을 자신의 소방구급대에 합류시킨다. 대원들에게 아들을 소개하며 자신이 대장이니 아들은 ‘예수’라 일컫는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명백한 성경 비틀기라는 사실은 영화를 다 보고나서 환기된다. ‘예수가 백인 게이였군’이라며 빈정대는 대원도 있는데, 이 영화를 보는 사람 중 일부는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자각 역시 영화를 다 보고나서다. 이 또한 사회적 젠더 규정이나 그로 인한 편견과 억압을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이토록 함의가 다양하고 전복적이다.

알렉시아/아드리엥은 스스로 남성을 선택하면서도 임신한 상태이다. 그 사실을 뱅상에게 들키지 않으려 끝내 애쓰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추기는 힘들다. 붕대로 배를 꼭꼭 동여매고 가슴을 숨기려 해도 한집에 사는 아버지를 완전히 속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런데, 뱅상은 알렉시아/아드리앵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되레 그래서 뱅상이 그(녀)가 원래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확증이 생겨난다. 나아가 뱅상은 그(녀)가 보통 사람과는 분명 다른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는 눈치다. 그러나 둘은 아무것도 사실 그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내 아들에 대해 아무 말로 하지 마!”

의심을 품은 대원 하나가 그(녀)의 수상함을 눈치채고 뱅상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있다. 뱅상은 대뜸 뿌리치며 화낸다. “내 아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들의 실종은 뱅상에겐 오랜 결핍이자 그리움이었다. 그 아들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10년 만에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존재가 정말 자신의 아들이 맞는지 따윈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뱅상에게 중요한 건 그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아들’이라는 존재다. 그게 누구인지, 무슨 존재인지 따지는 건 아무 의미없다.

일종의 대체물이랄 수도 있고, 억지로 메운 괄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뱅상의 태도를 보면 아들이 공룡이나 호랑이 새끼였어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을 정도다. 그야말로 맹목이다. 그런데 그 맹목이 괴이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나아가 그게 로봇이거나 자동차라면 어땠을까 싶은 상상도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알렉시아/아드리앵이 종국에 벌이게 되는 엽기적 성행위(예측 가능할 수도 있으나, 스포일러일 수도 있기에 자세한 설명 생략한다)를 목도한 후의 감상이다. 뱅상은 그저 자신의 오랜 구멍(?)을 메워줄 유일무이한 존재를 온몸 바쳐 사랑할 뿐이다. 그러니 결국, 뱅상에게 아들은 ‘예수’인 게 맞다.

명백한 사실보다 더 확실한 진실은 자신의 믿음과 애정에 의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사실은 오도되고 왜곡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워낙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속성이 강하고, 사랑과 관련해선 더 심하다. 그건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닌 오류이자 결점이지만, 그로 인해 또 누군가 혹은 어느 경우엔 그 믿음과 사랑으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게 종교의 괴력이다. <티탄>은 그 ‘괴력’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까발릴뿐이다.


새로운 신의 탄생을 축도하라!

영화 초반 모터쇼 장면에 인상적인, 그러나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대사가 있다. 요란한 색상과 디자인의 자동차들 위에서 역시 요란하고 다양한 복장의 여성 댄서들이 춤을 추는 장면. 모터쇼가 늘 그렇듯 남성들을 위한 관음무대다. 화염처럼 노랗고 벌건 캐딜락 위에서 알렉시아는 명백하게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춤을 춘다. 다른 댄서들도 마찬가지다. 이때, 한 젊은 남성이 댄서에게 손을 댄다. 커다란 덩치의 경비원이 대뜸 제지하며 말한다. “눈으로만 만지시오!” 실물임에도 눈으로만 만져야 할 것들 천지인 세상이다. 반대로, 눈으로는 분명한데 결코 실물로서 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 넘쳐난다. 오래전엔 신이 그런 존재였을 것이나, 지금은 다양한 영상과 소리의 형태로 떠다니는 존재들이 신을 대체한다. 그것이 진짜건 가짜건 그저 부유하며 시선을 잠식하면서 실제 감각들을 혼융시킨다. 경배도 경멸도 동시적이고, 환멸과 경외도 불꽃처럼 명멸한다. 그러다가 결국 새로운 거대한 신(Titan)이 탄생한다.

지금은 다양한 영상과 소리의 형태로 떠다니는 존재들이 신을 대체한다. 그것이 진짜건 가짜건 그저 부유하며 시선을 잠식하면서 실제 감각들을 혼융시킨다. 경배도 경멸도 동시적이고, 환멸과 경외도 불꽃처럼 명멸한다. 그러다가 결국 새로운 거대한 신(Titan)이 탄생한다.
지금은 다양한 영상과 소리의 형태로 떠다니는 존재들이 신을 대체한다. 그것이 진짜건 가짜건 그저 부유하며 시선을 잠식하면서 실제 감각들을 혼융시킨다. 경배도 경멸도 동시적이고, 환멸과 경외도 불꽃처럼 명멸한다. 그러다가 결국 새로운 거대한 신(Titan)이 탄생한다.

몸 속에 기계를 이식한 새로운 신, 그리고 그것을 낳고 받아내는 상처투성이 인간들. 사랑은 늘 인간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그렇기에 사랑엔 언제나 폭력과 피가 공존한다. 핏줄이 진동하지 않으면 사랑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 ‘발생’이 인위적인 것들의 총합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발명’이 된다. 눈으로만 만져야 할 것을 온몸을 다해 받아내며 충돌을 일으키는 새로운 사랑. <티탄>은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차가운 투시로 일관하는 영화다. 기계 없이 살 수 없게 된 인간은 이내 기계와 교미해 새로운 종으로 변태(變態)한다. <티탄>이 전해주는 충격은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랑이라는 유구하고 익숙한 테마가 이토록 역겹고 낯설어지니, 그 또한 새롭지 아니한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