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여자와 권력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를 타고타고 올라가면 유럽의 귀족 이야기가 나온다.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이 남자 쪽의 소문을 잡고 있다면, 여자 쪽에선 헝가리의 에르체베트 바토리 백작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마흔의 나이가 되어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젊은 여자들을 잡아다 죽여 그 피를 모아 목욕을 즐겼다. 문자 그대로 젊은 피를 뒤집어쓴 그녀는 실제로 육신과 마음이 어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막대한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엽기적인 행각이었다. 그렇게 600명이 넘는 여인을 죽였을 때 바토리 부인이 눈 뜨게 된 것은 잔혹함, 그 자체였다. 어느새 피를 욕조에 채우는 것은 부차적인 목적이 됐고, 나약한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권세를 즐기게 된 것이다.

영화 <타르>(2023)의 주인공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여성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클래식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그녀는 명사와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말러의 5번 교향곡 음반 준비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첼로 단원을 뽑기 위한 오디션에도 열중이다. 그러던 중에 일전에 인연이 있었던 젊은 여자 지휘자인 크리스타 테일러가 구직 중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타르는 그녀의 이직에 훼방을 놨던 이메일을 지우는 등 혐오 흔적 지우기에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초조함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사라지지 않고, 완벽에 가까웠던 타르의 커리어에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타르는 오케스트라의 리더이자 제1 바이올리스트인 샤론(니나 호스)과 결혼한 레즈비언이며, 귀여운 딸인 페트라를 양육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타르는 그녀의 비서이자 부지휘자 후보자인 여성, 프란체스카(노에미 메를랑)와 모종의 관계였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타르를 중심으로 한 펠로우십인 '아코디언'에서 프란체스카와 크리스타를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리디아 타르는 젊은 크리스타와도 섹슈얼한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리고 권력 지향적인 그녀에게 중년인 샤론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계약적 관계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필하모닉의 플레이어 단원들은 종신직이며 지휘자는 그들의 투표로 선정된다. 그러니 지휘자에게 단원들과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자 커밍아웃까지 한 타르에게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샤론과의 관계는 필요했을 것이다. 샤론은 타르에게 전략이 아닌 (계약적이지 않은) 관계가 있냐는 물음에 우리의 딸인 페트라만큼은 제외라는 대답을 하기도 한다.

젊은 여자
베를린 필하모닉에 새로운 첼리스트가 등장한다. 러시아 출신의 예쁘고 젊은 여자인 올가(소피 카우어, 실제로도 첼리스트이다)에게 빠져버린 타르는 이젠 그녀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샤론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그리고 아마도 이전에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예상되는 크리스타의 자살은 외면한다. 크리스타의 비보를 전달한 프란체스카는 타르의 냉담한 반응에 진절머리 치며 잠수를 타버린다. 와중에 올가와 함께한 밀월 출장을 샤론에게 들키며 곤란해지는 가운데 올가에게서는 꼰대 취급을 받는다.
권력
타르는 바쁜 와중에 줄리어드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휘 클래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넓은 강의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타르를 보여주기 위해 인물의 큰 동선을 롱테이크로 잡아낸다. 여기서 타르는 바흐의 음악이 가진 위대함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바흐가 생애에서 보여줬던 여성혐오적 태도 때문에 그를 멀리하는 학생인 맥스를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 권력으로써 학생을 짓누르는 그 태도는 누군가 도촬하여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타르를 짓누르는 도구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조 지휘자였던 세바스찬을 해고하는 장면과 그 배경에서도 그녀가 권력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타르는 세바스찬 대신 프란체스카를 보조 지휘자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이에 세바스찬이 그 여자(프란체스카) 때문이냐고 묻는다. 실은 타르의 마음은 그러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이 곤란해질 것이므로 프란체스카를 기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연관계로 추정되는) 크리스타 역시 타르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자신의 출세를 점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가 깨지고 타르가 크리스타의 앞날을 말살하는 이메일을 돌리고, 이에 대해 크리스타가 항의하지만 무시하자 자살한다. 결국 횡포는 크리스타의 부모와 프란체스카에 의해 들통나고, 타르의 북콘서트장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지휘자의 위치에서 해고되는 등의 내리막을 걷는다.

그렇게 지휘자의 자리를 잃고 샤론과의 관계는 파탄 나고 페트라와는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동남아의 어딘가에서 게임 음악을 연주하게 되는 타르. 그녀의 이런 전철을 몰락이라고 봐야 할까?
언어유희
필하모닉에서 쫓겨난 타르는 집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의 비디오를 본다(첨언하자면 올해 말 넷플릭스에선 번스타인의 전기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을 공개한다). 음악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스승의 영상을 보며 그녀가 떠올린 것은 자신이 세바스찬을 해고하며 던졌던 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휘자는 떠돌아다니는 것이 숙명이며, 지휘자의 집은 단지 지휘대일 뿐."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윤리를 따지지 않는 곳에서 게임 음악을 지휘한다. 여전히 당당하고 엄숙한 태도의 그녀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다른 언어유희
글자의 배열을 옮겨 다른 뜻의 단어로 바꾸는 것을 어구전철(anagram, 애너그램)이라고 한다. 타르Tar의 철자를 재배열하면 쥐새끼Rat가 될 수도 있고 예술Art이 될 수도 있다. 즉, Tar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녀의 행적이 다르게 반영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술(품)과 예술가를 따로 떼어놓을 수 있을까?
예술가가 비윤리적이면 그 결과물도 비윤리 취급을 받아야 할까? 어떤 결과가 됐든 그 태도는 옳은 것일까? 그것은 타르 철자의 애너그램만큼이나 다양한 각도의 답을 낼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단지 예술가가 결과물을 내놓는 과정까지는 예술품에 대한 그(녀)의 권력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어떤 연유에서든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 입을 떠나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듯, 예술품 또한 관객의 평가를 받게 되면 예술가는 예술품에 대한 권력을 잃는다. 나의 순수한 예술품은 비윤리적인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만 그 파워의 중심이 관중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타르>는 그것으로 인한 결과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비윤리쯤이야…’라고 생각해 보시라는 엄중한 명제를 던진다.
그렇다면 관객으로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