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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이순신’을 완성하다, 〈노량: 죽음의 바다〉가 〈명량〉과〈한산〉과 다른 두세 가지 것들

주성철편집장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같은 모습의 이순신이 등장하는 <명량>(2014)을 다시 보는 것이다. <명량>의 최민식과 <노량>의 김윤석은 전혀 다른 배우이기에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실제 명량해전(1597년, 선조 30년)과 노량해전(1598년, 선조 31년) 사이의 시차는 불과 1년 2개월이기 때문이다. ‘이순신 3부작’의 가운데 작품이지만 가장 나이 어린 48세의 이순신(박해일)이 주인공인 <한산: 용의 출현>(2022, 이하 <한산>)은 시기적으로 1592년(선조 25년)으로 가장 앞서 있어, 다소 거리감이 있다. 말하자면 <한산>의 이순신은 40대고 <명량>과 <노량>의 이순신은 50대다. <명량>과 <노량>만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이순신 PART1: 명량>과 <이순신 PART2: 노량>으로 묶어도 말이 된다.

〈한산: 용의 출현〉의 이순신(박해일)과 〈명량〉의 이순신(최민식, 사진 오른쪽)
〈한산: 용의 출현〉의 이순신(박해일)과 〈명량〉의 이순신(최민식, 사진 오른쪽)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는 2001년 초판 ‘책머리에’에 그렇게 썼다. 그리고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찾아가 장군의 차갑고 큰 칼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다가 돌아오며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어쩌면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심정도 그러했던 것인지 모른다. 몸에 인두를 지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명량>의 이순신은 그야말로 어두운 기운을 뿜어낸다. 옆에서 누군가 얘기를 건네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많고, 시종일관 웃는 낯을 보여주지 않으며,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악몽에 시달린다.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쇠약하여 일하다 말고 피를 토하기 일쑤다. 이런 설정은 <노량>의 이순신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의 피로는 계속 누적되고 있지만,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더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북채를 들고 여명의 바다에 쉼 없이 북소리를 울리는 모습은 가히 열반에 든 ‘초인’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다.

<명량>과 <노량>은 여러 세력들이 등장하여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를 면밀하게 조감한 김탁환 작가의 『불멸의 이순신』보다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한 이순신의 어두운 내면을 깊숙이 포착한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명량>은 한산대첩과 더불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명량대첩을 그리는 한편으로, 온갖 박해와 수난을 극복한 이순신의 불멸의 실존(實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차가 별로 나지 않는 <명량>과 <노량>은 바로 그 지점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몸져누워있는 시간이 많을 정도로,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이순신 장군이 보여주는 불굴의 집념이다. <명량>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야 한다”는 말은 그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이었다.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

<한산>과 달리 <명량>과 <노량>에서 ‘명장 이순신’과 ‘인간 이순신’은 따로 있지 않다. 옥고를 치르다가 전세가 기울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된 정유년, 그렇게 삶과 죽음의 엇갈림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그는 ‘필생즉사 사즉필생’의 태도로 전투에 임하는 영웅이자 또한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꾸려가는 인간이기도 하다.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런 수상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 또한 <노량>에서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북채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일 것이다.

〈명량〉의 임준영(진구)와 정씨 여인(이정현, 사진 오른쪽)
〈명량〉의 임준영(진구)와 정씨 여인(이정현, 사진 오른쪽)

<노량>에서 이전작들과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노량>에는 김한민 감독이 종종 묘사해 온 이른바 멜로 코드가 없다. 이순신 3부작은 아니지만, 그전에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만든 시대극인 <최종병기 활>(2011)에서도 “늦어서 미안하다”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남이(박해일)와 자인(문채원)의 사랑이 있었고, <명량>에서는 탐망꾼 임준영(진구)과 정씨 여인(이정현) 사이의 사랑이 있었다. 임준영은 폭탄을 실은 배에 포로로 묶여 있었고, 울돌목의 육지 절벽에서는 말 못 하는 정씨 여인이 치마를 흔들어 위험을 알리며 눈물 흘렸다. 그리고 <한산>에서는 그 임준영과 정씨 여인의 과거 첫 만남을 볼 수 있었다. 임준영(옥택연)이 와키자카(변요한) 진영에 들어가 와키자카의 시중을 드는 조선 여인 정보름(김향기)을 만났던 것. 여기서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름은 고문을 당하던 중 혀를 깨물어 자결을 시도하면서 <명량>의 말 못 하는 정씨 여인으로 이어졌다.

〈한산: 용의 출현〉의 임준영(옥택연)과 정보름(김향기, 사진 오른쪽)
〈한산: 용의 출현〉의 임준영(옥택연)과 정보름(김향기, 사진 오른쪽)

그런데 <노량>에는 그런 코드가 없다. 3부작을 마무리하면서 최대한 곁가지를 쳐내고 온전히 ‘이순신 장군’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김한민 감독 개인의 의지로 읽힌다. 가령 <노량>에는 이순신 장군의 부인인 방씨 부인(문정희)이 등장하는데, 둘의 관계를 회상한다거나 애틋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전혀 없다.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해서도 그저 각자 담담하게 슬픔을 곱씹는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그 또한 일부 장면이 편집된 것이라 한다. 방씨 부인이 결전을 치르러 가는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에게 부족한 식량이나마 밥을 차려주는 장면이 있는데 최종 편집된 것.(맨 아래, 기자회견에서 최덕문 배우가 얘기하는 ‘촬영장을 울컥하게 만든 삭제 장면 속 명대사’ 영상 참조) 멜로 코드라고 보기 힘든 장면이기도 하나, 어쨌건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이른바 어떤 신파의 ‘감정신’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다.

〈노량: 죽음의 바다〉방씨 부인(문정희)
〈노량: 죽음의 바다〉방씨 부인(문정희)

두 번째는 <한산>이나 <명량>과는 다른 성격의 해상 전투였다는 점이다. 먼저 한산대첩은 그 유명한 ‘학익진’을 펼치기 위해 무수히 리허설을 한다. 학익진이 갑자기 기적처럼 벌어진 일이 아니라, 마치 오래도록 기다려온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그것처럼 그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계속 노를 저으며 예행연습을 했다. 즉, 끝없는 훈련의 결과였다. 명량대첩 또한 이순신 장군이 여러 번 울돌목에 답사를 가서 날씨와 조류 등을 철저히 연구한 결과다. 워낙 믿기 힘든 승리이다 보니, 마치 천지신명이 도운 신비로운 승리가 아니라 빈틈 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지난 <명량>과 <한산>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면, 바로 이순신 장군의 부단한 노력으로 인한 ‘준비된 대첩’이었다는 것을 시각화한 점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전 로케이션 답사를 비롯해 철저한 프리 프로덕션을 거쳐 최상의 완성도에 가닿고자 하는 영화 만들기의 과정과 비슷하다. 어쩌면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3부작에 매료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

반면, <노량>은 그런 사전답사와 리허설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략 전술 회의를 체계적으로 진행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어쩌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정재영)과의 담판 등 조명연합군 내에서의 이견을 청취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더 컸다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명량>의 울돌목과 <한산>의 학익진에 비교하자면, 매복과 위장 전술의 <노량>은 과감하고도 담대한 즉흥 연출에 가까웠다. 밤 10시부터 매복하고 있다가 다음 날 새벽 4시부터 치열하게 전투가 시작되어 정오까지 이어진, 말 그대로 꼬박 24시간 계속된 전투다. 그래서 노량대첩이 위대한 것이다. 그즈음의 이순신은 진정 신(神)이었다. 그 또한 영화감독의 운명과 닮았다. <노량>의 이순신 장군은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사전답사와 리허설도 진행하지 못한 상태로, 의견 충돌까지 일으킨 스태프들의 이해관계도 조율하면서,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오케이 컷을 얻어내야 하는, 심지어 러닝타임 24시간의 해전을 성공적으로 연출해야 하는 절박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노량>의 해상 전투가 길어진 이유는 바로 거기 있다. 그렇게 ‘『난중일기』의 이순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을 넘어, <노량>에서야 비로소 ‘김한민의 이순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