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진행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제주 4.3 학살을 소재로 한 <포수>가 한국경쟁 부문 단편 대상을 수상했다. 언뜻 <포수>는 기사를 통해 제주도에 사는 할아버지가 4.3 학살의 피해자였다는 걸 알게 된 감독(양지훈)이 할아버지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려는 과정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 스스로를 카메라 앞에 노출시키고 느닷없이 인서트와 음악을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4.3 관련 다큐멘터리들에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포수>를 비롯해 인왕산 산불을 시작으로 사진을 소비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테이큰>과 재일한국인인 지인을 만나러 나고야로 가는 여행 브이로그 형식을 차용한 <도라지> 두 신작을 한자리에서 소개하는 개인전 『다르게 총 쏘기』 (~12월 31일)를 진행 중인 양지훈 작가를 만났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수상과 개인전 축하드립니다. '작가님'과 '감독님' 중 어떤 호칭이 편하세요?
지금까지도 제가 영화를 찍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미술작가가 되려고 하는 중이지 않나 싶어요. 생각지도 못 해본 호칭이다보니 감독이라는 게 더 부담스럽긴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반감으로 미술 영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이었는데. 작년에 전시에 참여해 <포수>를 발표했고, 사람들이 영화제 한번 내보라고 한 게 덜컥 단편경쟁 후보까지 오른 거라, 영화제 동안 감독님 소리를 듣는 게 굉장히 어색했죠.
<포수> 이전에 사진 연작 <서옥에서>를 진행하셨죠. 그 이전엔 무엇을 찍었나요?
미군 부대 안의 사람들을 찍었어요. 미군 부대도 정쟁에 많이 이용되는 곳이잖아요. 하나의 섬처럼 덩그러니 놓여져 있고 달라붙어 있는 말들도 되게 많은데, 친구가 카투사 근무할 때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저분들은 별생각 없이 나름 돈 벌러 와서 평범하게 살고 계시더라고요. 그때도 그들의 일상을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태극기 집회도 한창 많이 열렸을 때 찍었고요. 그 아저씨들은 젊은 날의 영광을 코스프레 하듯이 모여서 친목을 하는 위주였던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혐오 대상이 되니까 왜 이렇게만 이야기를 하지? 싶었던 게 있었죠. 사진 할 때도 계속 비껴가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사진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서, 그때는 조금은 다르게 찍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어요.

사진을 전공하신 건가요?
시각디자인과를 나왔어요. 아무래도 사진 입시를 하면 집안에서 좋아하지 않으세요. 사진 입시를 하면서 아버지랑 많이 싸우다가 타협점으로 디자인과를 갔던 거죠. 아버지는 제가 자동차 같은 걸 디자인할 줄 아셨던 것 같아요.
제주 4.3 학살을 다룬 한겨레 기사 「어머니는 굴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빈 젖을 물렸다」로 할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돼 <서옥에서>를 작업하기 시작하셨죠. 기사를 읽기 전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읽기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냥 할아버지예요. 뭐 저한테 엄청나게 애정이 있는 대상도 아니고. 사실 영상에서도 제가 그렇게 예의 바르진 않잖아요. 할아버지는 저한테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분입니다, 라고 말하면 또 이상해질 것 같고. 카메라 있을 때만 가고 카메라 없이는 찾아뵙지도 않고 전화나 가끔 드리는 정도의 관계밖에는 안 됐어요. 할아버지의 기사를 봤을 때 반성을 했던 게, 저는 찍을 거리를 찾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걸 찍으면 좋겠다는 바로 생각이 들었는데, 제 스스로가 너무 이상한 것 같은 거예요. 내가 나쁜놈이구나... 그렇다고 이걸 안 쓸 순 없으니 처음부터 <포수>처럼 할아버지를 겨누진 않고 제주도에 내려가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것부터 했어요. 할아버지도 왜 왔는지 묻지 않으시고 그냥 와서 사진 찍는구나 하셨겠죠.
할아버지의 피난길을 따라간다는 <서옥에서>의 콘셉트는 어떻게 잡힌 건가요?
처음엔 대형 필름 카메라가 있고 사진 작업밖에 할 줄 모르는데 뭔가를 찍긴 찍어야 하니 찍을 거리를 찾아다니는 정도였던 것 같아요. 의미 없는 수행 같은 거죠. 아무튼 4.3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어요. 절대로. 기저에는 깔려 있되, 그게 슬펐습니다 처참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유발하는 건 사실 비겁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거니까. 이걸 다채롭게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죄의식 같은 것도 있었고요. 할아버지한테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할아버지를 마스크로서 담아내는 건, 4.3의 생존자 중의 한 명으로만 존재하게 하는 게 부채감이 들어서 차라리 내가 할아버지의 피난길을 따라가면서 할아버지를 몰래 위로해보자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그건 <포수>에서도 극복되지 않았지만.

사진 작업 <서옥에서>와 다큐멘터리 <포수>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포수>는 직접적으로 할아버지를 괴롭히죠. 매체도 바뀌고. <포수> 첫 화면에서 거울에 저 비치면서 “할아버지 카메라 하나 더 가져왔어요” 하잖아요. 그 ‘더’가 저한테는 사진에서 영상으로 넘어와서 다룰 것이라는 의미였어요. <서옥에서>를 찍으면서도 4.3에 대한 기사나 다큐멘터리가 출구 없이 만들어졌구나, 잠깐 슬프고 연민을 느끼는 선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게 가둬버리고 있구나, 불만이 있었어요. 이걸 내가 불만이라고 말하면 4.3에 반대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죠. 제주도는 그냥 서울 사람들한테는 1년에 두어 번 가는 여행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공항에만 내려도 야자수로 쫙 깔리면서 "당신은 지금 새로운 곳에 왔습니다" 말하는 것 같고. 제주도에서도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지 살아갈 수 있으니까. 4.3 학살도 육지에서 토벌대들이 소통이 안 되니 저들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들었는데, 그게 4.3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나는 거예요. 굳이 제주어로 인터뷰를 해서 표준어 해석을 덧붙이고, 한라산을 한국이라기보다는 외국의 산처럼 보이게 만드는 전략들이 그때 학살의 방식이랑 뭐가 다르지? 싶었어요. 그 전략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는 돼요. 제주 4.3은 말해진 지 얼마 안 됐고, 거기에는 ‘전국화’라는 목적이 있더라고요. 사람들한테 익숙한 코드들을 심는 것이 불만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사진 작업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없겠다 싶어서 다큐멘터리로 그 불만을 드러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왜 하필 다큐멘터리였나요?
사람들이 봤을 때 불편했으면 좋겠었거든요. 말을 끌어내기 위한 액션도 하고, 그 영상이 더 잘 나오기 위해서 조명을 사야겠다고 중얼거린다거나, 노출값을 다룬다거나, 카메라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계속 심어뒀어요. 제목 ‘포수’도 저를 의미하는 건데, 대상인 할아버지를 겨누면서 비참한 말들을 끄집어내요. 그런데 또 그게 없으면 안 되잖아요. 예를 들면 홍콩 민주화 때도 사람들이 카메라를 갖고 모였고, 대부분 연대하는 사람들이었겠죠. 몇몇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도 솔직히 거기서 최루탄 같은 게 터졌으면 좋겠다,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은근히 기대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필요 없는 건 아니잖아요, 사진을 찍어서 기록해야 하니까. 그런 윤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나는 다르게 다루기보다 나도 그들이랑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니까 굳이 구분짓기보다 거기로 들어가서 그런 것들을 보여주면서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거죠.
할아버지한테 집요하게 묻거나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조명을 설치하는 등의 태도는 부러 위악적인 걸 드러내기 위함이었나요?
그렇죠. 저의 욕망을 계속 드러내려고 했어요. 더 못된 태도를 드러내려고 했던 건 할아버지 증언 때문도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거기 등장인물은 두 명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더 나빠져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그것까지 나오게 했는데… 처음에 듣고는 이걸 세상에 공개해도 되나 싶었어요.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증언이었으니까.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그걸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것도 할아버지한테 순백의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4.3은 7년 동안 있었던 일이고 그 과정에서 누구든 살기 위해 할아버지의 역할이 바뀌었던 것도 하나의 피난길이었을 텐데 그걸 내가 묻어버리면 그것도 이상하겠다 싶은데, 할아버지가 4.3 가해자로 다뤄지는 거니까 그럼 이게 할아버지한테 감당 못할 걸 심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걸 계속해서 파해하는 방법으로 제가 나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장치였던 것 같아요.

저는 <포수>를 먼저 본 후에 한겨레 기사를 읽었는데, 기사 속에서 양서옥 님은 완전히 피해자로 서술하고 있기에 <포수>의 그분의 고백이 더 기묘하게 느껴졌어요.
개인을 피해자의 서사로 규정하는 게 우리 세대에서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를 쫓고 쫓기게 만들어서 이웃끼리 죽이게 하는 국가가 짜놓은 시스템 안에서 살기 위해서 도망 다녔던 사람들이 아주 많을 텐데. 할아버지 증언에서도 토벌대를 하면서 만난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들이 다 죽어서 제사를 지내러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잡혀서 토벌대가 돼서 같이 다니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은 역사에서 너무 생략되어 있지 않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포수>는 양서옥 님이 귤을 먹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실제로 고기를 먹으면서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누고, 증언에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먹는다는 행위를 강조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건가요?
증언에서 고기 얘기는 할아버지가 토벌대 서사를 말씀하시기 전에 했던 이야기인데, 그건 할아버지를 카메라를 갖고 찍기 전에도 들어서 알고 있던 거였어요. 4.3 증언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기대를 하잖아요. 저 사람이 얼마나 처참한 말을 꺼내줄까 기대하면서 보고 있다가 결국 “소고기는 말고기보다 몸에 안 좋다”고 끝내버리면 사람들이 처참함을 기대한 것에서 미끄러지게 만들지 않을까? 해서 그런 의미 없는 증언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략이 처음엔 쓸데없는 말, 보상금 문제라거나 배제된 것들을 가져오면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미끄러지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술과 고기에 대해서 많이들 이야기하시는데, 제가 화면에 나와야 했어요. 왜냐하면 카메라 뒤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면서 같이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됐었고, 또 솔직하게는 나름의 당사자성을 가져가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할아버지와의 관계성이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토벌대 얘기하면서 사람들 17명 쫓아다니는 걸 말하는 중에 고기 얘기가 나오는데, 저희는 고기를 굽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고기를 계속 구운 건 저희의 식습관 때문도 있었지만, 제가 편집 과정에서 그걸 넣게 된 건 고기를 굽는 것의 섬찟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기들이 여러 장면에서 선택되지 않았나 싶어요. 고기 먹을 때 술이 더 맛있으니 할아버지도 그때 유독 말씀을 더 많이 하시기도 했고.
조화롭지 않은 풍경 인서트와 음악이 계속 끼어드는 건 교란의 의도처럼 보여요.
집중이 안 되고 거슬리게 만들고 싶었고, 형식에서 잘 만든 영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사람들이 집중해서 보는 흐름이란 게 있잖아요. 내가 영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게끔 하면 집중이 잘 되도록 하는 영상일 텐데, 내가 지금 영상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계속 들었으면 해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인서트는 증언을 안전하게 설명하지 않았으면 했고, 할아버지가 말하는 리듬을 줌으로 따라간 것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이 화면을 끊으려고 하는 것도 있었죠.

<포수>의 음악도 <도라지>의 원형우 님이 만든 거죠?
그 친구가 음악을 너무 잘해서 이런 거 이런 거 원한다고 말하면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줘요. 저는 음악을 모르니까 뉘앙스만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만 듣고도 이거 어떻냐고 들려주고. <포수>의 음악은 뚝뚝 끊기는 게 저의 인상에서는 피아노가 탕 탕 하면서 방해하는 요소로 쓰였던 것 같더라고요. <도라지>는 일본 음악 같은 거, <너의 이름은.> OST 같은 걸 레퍼런스로 줬거든요. 열받게 만들고 싶어서. 일본 영화처럼 보이게, 일본 영화처럼 찍지도 않았으면서 음악으로 애처롭게 만들고 싶었어요. (웃음)
인왕산 산불이 발생한 2023년 4월 2일을 기록한 <테이큰>은 두 개의 화면으로 진행됩니다.
같은 영상이에요. 날것 그대로 한 건 멀미 나길래 중간에 푸티지로 가려버리고, 나머지는 프로그램을 써서 떨림 방지를 보정한 걸로 갔어요. 원테이크 영상이거든요. 저는 그걸 잃고 싶질 않았는데, 계속 그걸 만들면서 위에다가 푸티지를 얹게 되고 하니까 이야기를 개진하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더라고요. 제 능력 부족으로. 그렇다고 원테이크로 찍은 그날의 영광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 개로 가야겠다고 결정했죠.
그럼 뒷산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걸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요?
당시 미술학원에서 일할 땐데, 집 뒤까지 불이 났다고 기사가 뜨고 집에 창문이 열려 있고 아무도 없다고 하니 패닉이 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인왕산 산불’을 엄청 많이 검색했어요. 그런데 그 이미지가 날라지고 복제되는 방식들이, 검색어가 거기 모이니까 야동 사이트 같은 이상한 광고들이 키워드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걸 찍어 올리면서 유쾌한 말들이 붙기도 하고, 하나의 축제가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이 그걸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는 지금 집에 무슨 일이 있을까봐 미치겠는데. 다행히 집에 가니까 별일이 없더라고요. 언론에서 말하는 것보다 불이 심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사람들도 나와서 구경을 하고 그랬겠죠. 그래서 나도 저기서 즐기는 사람 중 하나가 돼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바로 세팅을 해서 카메라를 들고 간 거죠. 끊지 않고 바로 가야겠다, 언젠가 저지될 텐데 거기까지 뛰어야겠다 싶었어요. 헬기부터 산불까지 잇는 과정은 당연히 그땐 없었고. 그때 앰비언스가 헬기 소리로 가득했어요. 익숙한 동네인데 헬기 소리가 무슨 전쟁 난 것 같기도 하고. 당시 날씨가 너무 좋아서 꽃 구경 하는 사람들이 멀리서 산불까지 구경하는 이미지들이 기사에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꽃 구경이랑 불구경이랑 뭐가 다를까, 불구경이 조금 더 재미있는 것 아닐까…
푸티지를 편집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부터 푸티지를 모았어요. 사람들이 다루는 방식도 화면 녹화해서 캡처하고. 집에 와서도 또 이미지를 모으고. 그때는 이 푸티지들로 리듬을 만들고 음악도 넣어보기도 했는데, 제가 너무 비아냥대는 사람 같은 거예요. 그런 사람이기도 한데. (웃음) 너무 비아냥밖에 안 남는 게 좀 그래서 그런 것 좀 덜어내고 헬기부터 전쟁까지 보여주며 사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 남대문도 결국 불났으니까 의미 있지 않았나, 지금 아무도 관심 없지 않으냐, 그런 비약을 설득하는 과정들을 푸티지로 만들었죠.
사진을 소비하는 방식 중에 이상하게 느꼈던 게 있다면.
사진을 '이미지'로 상정하고 대답을 드리자면, 인스타그램에 아기들 사진이 많잖아요. 그 아기들이 광고 노동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들은 본인 얼굴은 절대 숨기고. 그들은 분명히 노출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일 텐데, 아기는 하나의 소유물이구나... 언젠가 아기 얼굴이 가려진 걸 봤는데 되게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오히려 들더라고요. 외국에서는 얼굴을 다 가리는데, 왜 얼굴을 가렸지? 라는 생각이 드니까 얼굴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달까, 그래서 <도라지> 때 얼굴을 가리게 되는 걸로 갔던 것 같아요.
<도라지>를 찍겠다는 생각으로 나고야 여행을 가신 건가요?
그렇죠. 그때도 재일한국인 다큐멘터리들을 보고 왜 이렇게만 하지?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에는 새로운 게 아니라 똑같은 게 또 나오는 것 같아서. 영화에서는 처참하고 힘든 사람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니까. <도라지>의 그 형은 제 대학 동기예요. 그냥 축구하고 술 먹고 재미있게 놀았던 형인데, 그 사람한테 조선학교를 그리는 방식들이 그려지질 않는 거예요. 이런 의도로 가서 찍어도 되겠느냐 물었더니 오라고 해서 놀러 가고, 그 형 가족들과 친구들도 보고, 마침 학교에서 운동회도 하길래 가서 보고. 그런데 정말 평범한 일반인들이에요. 그게 조선학교 다큐멘터리에서 표방해야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 괜히 괴물 아니고 빨갱이 아니고 그냥 일반인이다. <포수>의 문제의식이랑 비슷했던 것 같아요. 재일한국인과 조선학교를 그렇게만 담아야 하나.

<도라지>의 무지막지한 모자이크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은 <포수>에 대한 반성인가요?
맞아요. 말씀드렸던 아기와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도 있지만, <포수>에서 할아버지를 그렇게 찍고 그게 영화제에서 호명이 되다보니까 할아버지 얼굴이 스크린에 크게 나오는 거예요. 부끄럽더라고요. 결국 할아버지를 그렇게 소비를 하게 된 것도 맞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를 찍을 때는 남은 인생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특별한 이벤트 없이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마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찍을 저랑 비슷한 연배거나 부모 세대의 분들은 그렇게 얼굴을 공개한다 혹은 얼굴을 겨눈다는 것 자체가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지점이더라고요. 촬영할 때도 모자이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어서 운동회 장면에서는 얼굴을 부러 피해다니기도 하고. 영화제 때 그 생각이 더 커져서 병적으로 모자이크를 했고요. 그전엔 얼굴로 감정을 유발하지 않아야겠다 였다면, 이후엔 얼굴 나오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그게 형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가 아래층엔 <포수>와 <테이큰>이 있고, 위층엔 푹신한 의자와 함께 <도라지>를 볼 수 있도록 배치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담감 때문에. 아래층은 꽤 춥거든요. 관객들이 <포수>는 상을 받아서 기대를 하고 올 거고 <테이큰>도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 틀었는데, <도라지>는 아예 처음 공개하는 것이고 만들 때도 <포수>만큼 에너지를 쏟지 못했던 것 같아서 이걸 오래 보게 만들려면 위층을 따뜻하고 스크린도 크고 푹신하게 해야겠다고 정했어요.
세 작품 모두 작가님이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걸 보고 어떤 나르시시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아랑 평론가의 작가론을 보면 아니라고 밝히긴 했지만.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하게 부끄럽거든요. 프레임 단위로 모자이크를 하나하나 씌워야 했으니까 계속 제 얼굴을 보는데 정말 부끄럽더라고요. <포수>에서 할아버지 얼굴을 드러냈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도 있어서 이미지화를 하는 게 앞으로도 해야 된다는 게 고민이 되더라고요. 앞으로 인터뷰를 한다 그러면 계속 얼굴을 찍을 텐데, 안 찍고 목소리만 담을 수도 있겠다만 결국엔 찍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 얼굴만 겨누고 나는 카메라 뒤에 있는 구분이 되는 것 같아서 결국 나도 같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 컸어요. 사실 다큐멘터리는 얼굴 구경하는 맛이 큰데, 그 얼굴을 가리게 되니까 구경할 게 없는 거예요. 저는 볼 것을 제공하는 사람인데, 그럼 제 표정이나 얼굴이라도 구경하세요 싶었죠.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