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서 쓴다.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의 기조는 확실하다. 벌고 써서 새로운 작품을 내고 그만큼 벌면 또 쓰고. 그렇기에 넷플릭스는 이제 스트리밍 서비스를 넘어 '콘텐츠 제작사'로도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는데, 영화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넷플릭스는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투자하며 여러 오리지널 콘텐츠를 생산했다. 지난 2023년에도 <포켓몬 컨시어지>, <이토 준지 매니악>, <스콧 필그림, 날아오르다!>, <치킨 런: 너겟의 탄생> 등 다양한 작품을 공개한 바 있다. 그중 글로벌기업 넷플릭스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애니메이션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11월에 공개한 <푸른 눈의 사무라이>다.
※ 이하 내용은 성인 콘텐츠를 다루고 있으며, 구체적인 묘사 등은 최대한 배제하였음을 명시한다.
19금+사무라이+복수극

<푸른 눈의 사무라이>. 제목만 들으면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3)가 떠오를지 모른다. 'PTSD에 시달리는 백인이 소박하고 고요한 일본의 문화에 감화된다'는 내용은, 이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그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충(忠)은 사라지고 힘과 돈에 제압된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나 혼혈(푸른 눈)이란 이유로 평생 악마 취급받은 한 인간의 복수극을 그린다.
주인공 미즈는 색이 있는 안경을 쓰고 일본 전역을 떠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이 태어날 당시 일본에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외국인 남자 4명을 처단하는 것. 혼혈을 인간 취급하지 않던 17세기 일본에서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간신히 이어나갔고, 눈먼 도공과 지내며 훔쳐배운 검술로 복수에 나선다.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동의하겠지만, '넷플릭스다운' 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 때로는 구태의연한 클리셰의 총합을 뜻하고, 때로는 여타 매체에서 쉽게 손대지 않는 신선한 소재를 뜻한다. 시종일관 혈흔이 흩날리는 복수극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넷플릭스답지만, 그 정도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제작사의 시선을 투영한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17세기 에도 시대의 호황이 아닌, 그 저변에 깔린 욕망들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즈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여러 갈래를 통해 귀족 가문의 아케미와 진짜 사무라이 타이겐의 이야기를 경유한다.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약속받지만, 미즈의 등장으로 전혀 다른 방면을 맞는다. 미즈에게 패배한 타이겐은 아케미의 부탁에도 '명예'를 되찾고자 미즈를 쫓고, 타이겐이 사라지자 아케미는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로 당시 일본 사무라이들이 내세운 명예라는 가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동시에 귀족 여성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사회의 이면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일본사회의 빈약한 틈을 파고든, 욕망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 아비야 파울러다. 미즈가 노리는 외국인 4명 중 한 사람인 그는 일본사회에 약이나 총 등 바다 건너의 유해 물품을 들여와 부를 쌓아 올렸다. 지배계층은 그가 나누는 재물에 홀려, 암암리에 그의 존재를 용인한다. 그의 존재가 곧 일본 에도 시대, 사무라이 문화의 맹점이자 위선인 셈이다. 겉으로는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내부에서 좀먹는 인물은 덮어두다니. 그 결과 파울러는 일본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으로까지 변화한다.

이렇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기존의 사무라이극들과 궤를 달리한다. 추측건대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서구 제작사이기에 가능한 접근이지 않았나 싶다. 일본 문화권에서 사무라이를 외세에 밀려난 전통으로서 조명한다면,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당시 문화가 그저 허울만 좋은 껍데기였음을 지적한다. 사무라이라는 소재와 일본 배경만을 보고 '일뽕애니' 혹은 '와패니즈(일본 문화를 과하게 옹호하는 서양인) 애니'라고 치부하기엔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무척 아까운 작품인 건 이런 부분 때문이다.
실사로 찍어 옮긴 훌륭한 액션

위와 같은 관점을 차치하더라도,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충분히 볼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미즈가 빼어난 실력의 사무라이로 그려지는 만큼, 시리즈에 등장하는 액션들이 모두 수준급이기 때문이다. 미즈와 검을 맞댈 만한 타이겐은 물론이고, 미즈를 잡기 위해 파견한 무리나 충돌을 빚는 적들도 다양한 액션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 시리즈만의 장점은 미즈가 전통적인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를 추적하는 적들처럼 그 또한 검에만 의지하지 않는다(개인적으로 이 서프라이즈가 정말 신선했다). 1화부터 강렬한 액션을 퍼붓기에 '뒤에서 더 보여줄 게 남았을까' 걱정마저 드는데, 클로나 창 같은 다양한 무기로 펼치는 액션이 시청자들을 홀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만 이어지는 작품은 아니지만 ‘양보다 질’이라고,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선보이는 액션은 애니메이션의 상상력과 타격감 넘치는 실제 무술 사이를 줄타기하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처럼 훌륭한 액션 시퀀스를 구성할 수 있는 원동력은 각종 움직임을 실제로 촬영한 영상으로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공개한 제작기(Blue Eye Samurai | Behind the Animation)를 보면 이번 작품에 제작으로 참여한 제인 우(Jane Wu)가 의상을 입고 연기하는 모습과 스턴트 배우들이 재현하는 액션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전 작업들이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현실감에 힘을 실어준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흥행에 실패했다. 공개한 첫 주에 톱10에 간신히 이름을 올렸다가 금세 순위밖으로 밀려났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였다. 유혈낭자에 이상성욕 관련한 묘사가 있는 19금 애니메이션이니까. 하지만 흥행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다보니 <푸른 눈의 사무라이>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말하는 '포브스 선정'의 그 포브스도 추천 기사를 썼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이 기세를 몰아 12월 중순, <푸른 눈의 사무라이> 시즌 2 제작을 공식화했다. 과연 미즈는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넷플릭스의 믿보 IP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시즌 2 공개 즈음에 다시 점쳐봐도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팁을 덧붙인다. 이 작품을 볼 때 가능한 한 일본어 더빙으로 보길 추천한다. 영어를 원어로 제작한 작품이지만, 일본어 더빙이 특유의 비장미를 잘 잡아낸다. 케네스 브래너의 파울러를 못 만나는 건 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