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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그림자는 결국 실체를 잡아먹는다 〈삼국무영자〉

성찬얼기자
〈삼국무영자〉
〈삼국무영자〉

 

그림자는 빛의 작용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선 그림자를 볼 수 없다.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어둠 자체가 빛의 반작용이듯, 어둠 속에서 비로소 그림자는 보다 확연해진다. 빛에 의해 드러난 그림자는 그렇기에 ‘그림자의 그림자’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림자는 암약한다. 빛 아래서 그림자는 그림자 자체로 또렷하지만, 그래서 더 그림자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가 아니라 빛의 실상을 역으로 되비치는 진짜 그림자의 ‘가면’일 것이다.


중국의 명인, 왜 무협물은 신통찮았을까?

 

중국영화는 1960년대 이후, 주로 무협 장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호금전이나 장철 같은 고전 무협극의 거장들은 지금까지도 서양의 다양한 액션 장르에 ‘그림자’를 비칠 정도다. 현재 활동 중인 많은 (홍콩, 대만 포함)중국계 영화감독들 중 저마다 특유의 무협 영화를 한두 편 제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 아니다. <붉은 수수밭>(1988)이나 <국두>(1990)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장예모도 마찬가지다.

 

장예모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 연출 등 중국의 중요한 국가 행사에 부름을 받는 거물이다. 시진핑 독재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의 맨파워는 중국 감독들 중에서도 여전히 막강하다. 그런 이유로 국가 선전물이나 만들어내는 국수주의자, 혹은 어용인사라 비난받기도 한다. 한국의 영화계 좌파나 리버럴을 자처하는 인사들의 비판은 유독 심하다. 그의 행적과 연관해서 사실 왜곡되거나 모종의 선입견이 작용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도 무협 영화를 여러 편 제작했다. 대표적인 게 <영웅-천하의 시작>(2002), <연인>(2004, 원제는 ‘십면매복’) 등이다.

 

둘 다 영상과 캐스팅만 요란했을 뿐, 태작에 가깝다. 중국 특유의 과장과 허세는 둘째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서사와 인물들의 전형성은 호화찬란한 영상미를 되레 천박한 색채의 과잉으로 추락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연인>의 경우, 장쯔이와 금성무의 말끔 또박한 얼굴만 무슨 광고 영상처럼 뇌리에 맥락 없이 새겨놓을 뿐이었다. 장예모 스스로도 그런 자각이 있었을까. 한동안 그는 블록버스터 무협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삼국무영자>(2018)는 장예모가 14년 만에 내놓은 무협물이다.


삼국지에서 따온 그림자들

〈삼국무영자〉
〈삼국무영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중 ‘형주공방전’에서 인물과 줄거리를 따온 내용이다. 『삼국지연의』 자체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소위 ‘대체역사물’이다. 그걸 다시 이름과 지명 등을 바꿔 허구로 꾸몄으니 역사적 사건과는 상관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그게 주요 사항도 아니다. <삼국무영자>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중국의 대표 철학서인 『주역』의 기본, 그중에서도 ‘음양’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물과 불, 남과 여, 빛과 어둠 등 상호 대칭되는 자연 원리가 대놓고 인용되는데, 영화의 기본 영상 톤부터 노골적이다.

 

주로 회백색이다. 의상도 건물도, 무기도 자연도 그렇다. 사람의 살 정도만 명확한 색감을 지니는데, 후반부 전투 씬부터 핏빛이 그 위에 겹친다. 제목부터 ‘그림자’이니 당연하다 할 만도 하다. 디테일한 음영이 웬만한 컬러보다 더 세세히 부각되고 인물의 심리 또한 회색과 흰색 또는 검은색 사이로 미묘하게 변화하며 흘러간다. 불과 물(야외 장면은 내내 비가 내린다)이 뒤섞여 흐르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가짜와 진짜, 빛과 그림자가 얇은 옷감 속에서 뒤채이듯 시시각각 농도를 바꾼다. 변화무쌍한 수묵담채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때로 고요하고 때로 섬뜩하다. 일단, 장예모의 특장이 효과적으로 발휘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패국의 장수인 도독(고유명사가 아니라 직책이다)은 염나라 장수 양창(후준)의 검에 베어 부상을 당한 이후, 일선에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에 도독은 자신의 숙부가 어릴 때 경주(‘삼국지’의 형주를 바꾼 지명)에서 데리고 온,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물을 ‘카게무샤’로 내세운다. 경주에서 났다고 해서 이름도 경주(도독과 경주를 덩챠오가 1인 2역한다)라 불린다. 도독 대신 주공(정개) 앞에 나선 경주는 염나라를 치겠다고 알린다. 주공은 반대한다. 주공은 겉으론 주색잡기에 빠진 허깨비 시늉을 하지만, 눈치가 잽싸고 계략과 술수가 뛰어난 인물이다. 이를테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주공의 ‘그림자’인 셈이다.


그림자는 버려진다, 정말 사라지는 걸까

〈삼국무영자〉
〈삼국무영자〉

 

도독은 자신만의 밀실에서 경주를 훈련시켜 모종의 계략을 짠다. 도독의 아내 소애(쑨리)는 남편의 뜻에 따라 경주와 부부 행세를 하는데, 경주가 점점 자신에게 연모를 느끼게 되자 마음이 흔들린다. 이 관계 설정이 영화의 주요 포인트로 작용하는 것도 상투적인 듯 절묘한 구석이 있다.

 

주공은 염나라와의 화평을 주장하며 자신의 여동생인 장공주(관효동)를 양창의 아들인 양평(오뢰)과 정략 결혼시키려 한다. 장공주가 오빠에게 반발한다. 염나라 측에선 양평은 이미 혼약이 있으니 장공주를 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전갈을 보낸다. 모욕주기나 다름없다. 주공은 그래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 한다. 주공의 신하 중에는 장공주를 사모하는 장수 전전(왕첸웬)이 있다. 전전은 주공에게 대들다가 평민으로 지위 하락한다. 그러다가 도독의 밀명 아래 뭉친 경주와 전전 등이 경주를 함락하러 비밀리에 출동한다. 그리고 피바람이 분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주군은 모처에 숨어 안위를 보살피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정치적 계략.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도 비슷한 설정이었다. 영화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모종의 권력을 움켜쥔 집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정략이자 전술이다. 그럴 경우 대리인, 즉 ‘그림자’는 쓸모가 다하면 버려진다. 그림자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잠행하거나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림자’는 필수적 존재이자, 빛이 강해질수록 지워내거나 떼어놓아야 할 짐일 뿐이다.


그림자는 더 깊은 어둠을 찾는다

〈삼국무영자〉
〈삼국무영자〉

 

실체는 숨어있다가 빛이 찬연할 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정작 드러나야 할 때 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버리는 것도 실체다. ‘그림자’를 이용해 먹는 실체들의 속성이 대체로 그러하다. 그림자가 점점 커질수록 실체가 감춰지는 것 같지만, 그림자가 실체를 완전히 삼켜버리는 순간, 실체 또한 명확해진다. 이게 ‘음양’의 법칙이고 순리다. 그걸 알면서도 그림자 뒤로 숨은 실체는 더 깊은 어둠을 필요로 하고 더 짙은 가면으로 자신을 감추려 한다. 영화에서 도독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자객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죽는다. 마지막 몇 분 동안 영화는 여러 차례 반전이 일어나는데, 모두 특정 인물의 계략과 술수가 스스로의 목을 베어버리는 양상이다.

 

‘그림자’는 그렇게 스스로를 찢고 실체가 된다. 영원한 비밀도, 영원한 권력도 없으니 저 스스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게 결국 살아남는 일이거나 명예롭게 죽는 일이 된다. 이 역시 ‘음양’의 원칙이고 교훈일 것이다. 도독은 자신만의 밀실에 태극도를 깔아놓고 그림자를 교육한다. 도독과 소애는 금(琴)을 합주할 때 최상의 선율로 최고의 음양이 된다(영화 초반부에 이미 암시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소리일 때에야 결국 우주적 진동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흑백의 음영이 또렷해지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색(色)들이 춤을 추는 듯한 환영이 그 순간 영상에 가득하다. 왠지 소리로만 듣거나 눈을 감고 봐야 하는 영화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지나친 태극, 혹은 분명한 그림자

그림자는 필시 실체를 끌고 온다. 사람은 자신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스스로 밟을 수 없다. 영원한 분리인 동시에 영원한 한몸이다.
그림자는 필시 실체를 끌고 온다. 사람은 자신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스스로 밟을 수 없다. 영원한 분리인 동시에 영원한 한몸이다.

태극(太極)은 양극(兩極)이자 조화이다. 쪼개진 두 곡선이 아귀 맞춰 서로의 끝선을 여밀 때 비로소 완전한 원이 된다. 빛과 그림자도 조화이고 물과 불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나. 그림자는 필시 실체를 끌고 온다. 사람은 자신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스스로 밟을 수 없다. 영원한 분리인 동시에 영원한 한몸이다. 영화는 그 ‘태극’을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게 흥미롭기도, 부담스럽기도 하다. 스토리는 허술하나 영상과 인물의 밀도는 음영 짙게 또렷하다. 사람은 결국 그림자로 타인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는 존재라는 범박한 결론은 일단 참조만 하는 게 좋겠다. 자꾸 어른거리는 태극 문양 위로 최근 대한민국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모 단체의 수장이 난데없이 비치는 것도 ‘그림자’의 현혹인 듯싶으나 자세한 언급은 삼가자. 그림자, 그리고 총대 멘 대리자는 결국 들통나고 쫓겨나는 법이니까. 짝짝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