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특한 마스크, 압도적 존재감, 리얼한 연기력. 배우 정하담을 수식하는 ‘상찬’을 우리는 기억한다. 봉준호, 이해영 등 감독들이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배우로 언급했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 김지운 감독의 <밀정>(2016)에서도 그 즈음, 작지만 선명한 크레딧을 차지했다. 박석영 감독의 ‘플라워 3부작’ <들꽃>(2015), <스틸 플라워>(2016), <재꽃>(2017)에서의 ‘하담’은 그렇게 등장과 동시에 주목받으며 성장해 온 한국영화의 새로운 배우였다.
지금 정하담은 경력 10년 차의 배우다.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 <젊은이의 양지>(2020), <헤어질 결심>(2022) 같은 영화 작업뿐만 아니라 <위대한 유혹자> <스위트홈> 등 TV 시리즈에도 출연해 왔다. 그러고보니 근 10년 사이 정하담의 필모그래피는 쉴 틈 없이 빼곡했다. 그 시간을 거치는 동안 배우 정하담이 풀고 있는 숙제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주목받는 신예’라는 수식은 지난 10년간 정하담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까. 상찬이 혹 부담이 되지는 않았을까. 데뷔작 <들꽃>에서 ‘하담’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쓴 캐릭터로 등장한 후, 유독 무겁고 다크한 존재감으로 한국영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배우의 현재를 점검하고 싶어졌다.
마침 적절한 계기가 주어졌다. 양근영 감독의 <모르는 이야기>에서 정하담은 척추질환 장애로 병상에 누운 젊은 여성 ‘기은’을 연기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간 정하담에게서 보았던 어두운 이미지로 유추해 낸 ‘아는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영화 속 기은은 잠을 자는 동안 꿈속을 유영하며 다른 모습으로 무한한 롤플레잉을 하는데, 그 모습들이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다. 기은이 잠에 빠질 때마다 병은 사라지고 멋있는 패셔니스타로, 부유한 건물주로, 호기심 많은 유튜버로, 또 아이의 엄마로, 비장한 사냥꾼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아니, 지금까지 나도, 여러분도 한 번도 상상하거나 보지 못한 정하담의 ‘밝은 에너지’ ‘상큼한 이미지’가 아이러니하게도 아픈 기은의 역할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멀티버스의 세계관 속에서 당면한 현실의 고통을 잊는 기은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하담의 모습, ‘모르는 이야기’다. 역할이 바뀔 때마다, 기은뿐만 아니라 그런 표정을 지은 배우 정하담이 흥미롭고 궁금해진다. 이제 막 삼십 대에 진입한 정하담에게서, 연기와 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요즘 그의 생각들을 나눠 보았다.

오늘 인터뷰 장소가 명동인데요. 이 지역이 친근한 편인가요.
아니요. 오늘은 이 근처에서 라디오 출연도 있어서 마침 이곳에 와서 주변도 둘러 보고 산책했어요. 전 주로 마포구에서 지내요. 집 근처라, 최대 멀리 가면 경복궁 정도요. 한가할 땐 가까운 사람들이랑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해요. 활동적인 편은 아닌데, 요즘은 작품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 늘어서 같이 만나게 돼요. 한 작품을 하면 그만큼 사람들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그렇더라고요.
박석영 감독의 작품 ‘플라워 시리즈’에서 성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먼저 봐서였을까요. 취미나 생활이 가늠이 되는 배우들도 있는가 하면, 하담씨는 그에 반해 작품의 캐릭터로 더 깊게 각인되어 왔던 것 같은데, 이번 작품 <모르는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 더 궁금해졌어요. 정하담이라는 사람 개인에 대해서.
영화 보신 지인분들이, 감독님이 하담이 너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속속들이, 다양한 모습들로 저를 표현해 주셨다고. 너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하시더라고요. 기존의 어두운 면에서 벗어난, 밝은 모습들이 있는 캐릭터라 저한테도 신선했던 작업이에요.
양근영 감독과는 먼저 단편 <왜냐고 묻지 마세요>(2019) 작업으로 인연이 있으셨죠.
사실 감독님이 그 작품 찍고 나서 해외로 가서 영화 공부를 하셔서 연락을 꾸준히 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동안 인사하고 지내다 보니 저의 다양한 모습을 봐주신 것 같더라고요. 저라는 사람을 어떤 작품으로 생각한다기보다 그냥 인간으로 생각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기존 캐릭터에서 찾아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면이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온 것 같아요. 드라마, 시리즈 작업할 때도 느끼는데, 저를 잘 모르셔서 오히려 다른 이미지들을 요구하고 그게 보이는 것들이 재밌더라고요.

공장 노동자가 겪는 리얼함과 판타지가 뒤섞인 작품이었는데요.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거르지 않고 보여줘요. 가령, ‘구더기’ 같은 것을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독특함을 표현한 작품이었는데요.
처음에 시나리오 봤을 때는 조금 평범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나고 보니 감독님이 촬영감독 출신이고 연출은 처음인데 궁금하더라고요. 감독님에 대한 흥미로움이 오히려 만나고 나서 커졌어요. 독특한 영화,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 내시는 걸 보고 아 이래서 영화는 시나리오를 보고 다 알 수 없구나 싶더라고요. <모르는 이야기>도 시나리오만 봐서는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단편을 하면서의 기억이 있잖아요. 너무 궁금하고 같이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쓰셨을까 알고 싶었어요.
현실에서는 척추질환의 고통 때문에 진통제에 의존하지만, 꿈의 세계로 진입하면 그곳에서는 못할 게 없는 여성 기은의 모습을 연기하는데요. 한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시도하는 역할이라 배우로서는 정말 탐낼 만한 캐릭터다 싶었어요.
맞아요. 그리고 한 영화에서 진짜 계속 바뀌니까 배우로는 흔하지 않은 좋은 경험인 것 같았어요. 게다가 톤 자체도 어둡고 다크하다기보다는 꿈으로 진입하면 굉장히 밝은 이미지들이 요구되니까,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현장에서 많이 이야기 나누면서 동작이나 설정을 더해 갔는데,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감독님이랑 소통이 잘 되어서 재밌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 것 같아요.
패셔니스타, 건물주, 유튜버, 엄마, 사냥꾼 등 다양한 캐릭터의 옷을 입고, 호기심 있거나 자신만만하거나 비정한 성격들을 연기하는데요. 특히 카리스마 있는 사냥꾼 연기는 가장 힘을 준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다른 역할들이 대사가 적고 이미지적으로 표현을 했다면 사냥꾼 역은 극화된 부분이 컸어요. 힘을 주어야 했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래서 수월하기도 했죠.

꿈속의 기은이 활동적이라면, 현실의 기은은 작은 동작으로 큰 감정선을 표현해야 했는데요. 클로즈업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감정이 울림을 주는 씬이었어요.
처음엔 많은 설정을 두려고 했는데, 심플하게 접근하려고 했어요. 감독님께서 어떤 질병인지, 심리적으로 어느 단계인지 영화에서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원인 불명으로 앓고 있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톤을 잡아나가면서 히키코모리처럼 은둔하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눈물신이 저도 신기했는데, 음악이 빰 하고 나오면서 눈을 뜨면 좋겠다. 눈을 뜬 게, 이제 내가 죽어서 불행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울한 상태인 건지 물어봤죠. 그런데 감독님이 절대 이 영화는 그런 영화는 아니래요. 그래서 마지막이어도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떴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뭔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천사가 천장 위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왠지 눈물이 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감독님이 모니터를 보면서 그때,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제가 딱 눈물이 났대요. 그런 게 통해서 장면을 만들어 내게 되고,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함께 시도하고 맞춰가면서 찾아가는 과정에서 온 결과들이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거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 촬영 끝나고 뒤풀이 할 때 제가 감독님한테 말했어요. 이 영화 찍으면서 너무 즐거웠다고요. 이 영화가 어떻게 나오든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고, 현장이 정말 즐거웠다고요. ‘어떻게 나오든’ 이라는 말은 이번에 처음 해봤어요. 그전까지 저는 항상 어떻게 나올까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었거든요. 지금은 어떻게 나오든, 제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잘 나왔으면 좋겠지만, 제가 걱정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엔 이렇게 영화를 되돌아보고 이야기하면서, 이 작품을 내가 잘 보내주고 있다, 예의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여 연기를 하면서 예전과 다르게 갖게 되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들꽃>으로 새로운 얼굴, 신예 배우로 주목받은 게 2014~2015년이었어요. 어느새 10년이 지났네요. 확실히 처음엔 ‘플라워 시리즈’의 이미지를 많이 요구하던 시기가 있었지요.
<들꽃> <스틸 플라워>로 알려지면서 당시에는 오디션을 보러가면 “평소에도 우울하냐”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셨어요. (웃음) 우울할 때도 물론 있지만, 전 그냥 평범한 편인데 그런 모습을 오히려 요구받은 적도 많고요. “그 모습이 실제 너 아냐?”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죠. 연기를 처음 시작하던 시기의 작품들이다 보니,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해서 보여준 게 아니냐는 얘기였죠. 제 나름대로 그때도 열심히 해서 연기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자신이 없을 때도 있었어요.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음에도 한편으로는 ‘하담’이라는 본인 이름을 쓰고, 또래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영화가 가진 리얼리티에 ‘배우’로서의 접근과 노력이 가려진 측면도 있는 거네요.
맞아요. 그때는 제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좀 버거웠어요. 제 연기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도 많이 부담스럽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는 것도 힘들었어요. 뭐랄까 내가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이 아직 없는 상태였지 싶어요. 독특한 외모로 언급된 적도 많은데,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한 번도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정말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배우가 되고 평가를 받게 되니 그런 관심이 다 낯설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 나는 뭐가 되고 싶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런 것을 아는 게 급선무였죠.
그런 고민의 시간에도 배우로서 많은 기회가 주어졌어요. ‘플라워 시리즈’로 독립영화계의 얼굴로 각인된 후 <아가씨>(2016), <밀정>(2016), <허스토리>(2018),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 등 상업영화의 빅프로젝트에 쉼없이 참여해 왔는데요. 작품들을 하면서 답이 보이던가요.
작품들을 하면서 전환점을 찾아갔어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전환점이 되어 주었는데요. 그때 저보다 어른들이 아닌 제 또래 배우들과 처음으로 같이 작품을 하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까지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불안하고, 또 연기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연기도 내가 잘했다기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 줘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그런 회의감도 컸거든요. 다른 사람들처럼 쇼맨십도 없는 편이라, 연기는 하고 싶은데 이 직업과 저는 잘 안 맞는다고 느꼈거든요. 놀랐던 건, 제가 이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다가 한번 기회가 생겨서 털어놓았더니, 친구들도 다들 저처럼 불안하고 힘들다는 거예요. 전 고등학교 때 연극부로 잠깐 연기를 했을 뿐,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시작해서 느끼는 불안인 줄 알았는데, 다들 경로는 달라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 일의 속성이라는 게 그렇구나, 그런 걸 그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평가받는 직업이긴 하고, 그 평가에 일희일비하게 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한 것에 의의를 두자, 내가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건 뭐지, 내가 노력하려고 했던 이유는 뭘까, 그런 것들을 좀 더 중점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어요.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2022)으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과도 인연이 깊은데요. <아가씨>에서 시녀 역할로 잠시 등장했다면, <헤어질 결심>에서는 짧은 등장이지만, 서사의 일부분을 차지하는데요. 이미지를 넘어서서 배우로서 각인되는 지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텐데요.
<아가씨>는 상업영화로는 첫 오디션을 본 작품이었어요. 연출부와 만났는데, 오디션 때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하고 싶다’ 그렇게 말했어요. 짧게 나왔지만 그 현장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아요. <헤어질 결심>(2022) 때는 VIP 시사 끝나고 뒤풀이 때 감독님께서, “잠깐 나와서 아쉬웠지?” 하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아니요, 영광이었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감독님께서 “한 번 봐도 잊히지 않는 이미지”라고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정말요.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하지 않고도 알려지기도 하잖아요. (웃음) 그때 이해영 감독이 ‘어머어마한 배우’라는 말로, “<검은 사제들>에서 소머리 들고 굿하는 분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는데, 당시 방송의 파급력을 실감하셨을 것 같아요.
지인이 알려줬어요. ‘라스’에 나왔다고. 근데 저 그때 방송 안 보고 있어서, “라스에 나간 적 없는데?”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막 오는 거예요. (웃음) 돌이켜보면 작품을 하게 되는 경로가 참 신기한 게, 정말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저를 보고 기억하고 제안해주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에 잠깐 등장하는데도, 그걸 보고 그 이미지를 발전시켜서 작업해 보고 싶다고 연락이 오기도 하고요. 오디션으로 만나서 또 다른 저를 발견해 주시기도 하고요. 정말 어떻게 인연이 될지 몰라요. 그런 것들이 모두 즐겁고 감사한 일이죠.
지금은 어떤 촬영 중인가요.
지금도 작은 역할을 찍고 있어요. 드라마로요. 독립영화, 상업영화, 시리즈, 어떤 작품이든 다양하게 다 하고 싶은데, 조금은 보다 인상적인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어요. 준비하는 건 똑같은데 너무 작은 역할은 잘 보이지 않으니 아쉽더라고요. 현재는 저한테 그런 역할이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그걸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 마음을 다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제 생각보다 빨리 주목을 받으면서, 저는 그런 야망을 가지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뭔가 인생이 망가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열망을 가지고 마음을 하나하나 넣어서 내 직업을 더 열심히 가꾸어 나가야지 싶어요. 저도 이제 벌써 30대가 되었고요. 연기가 직업이라는 게 이제 자신 있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