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얼마 전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준비를 하다 보니 이것저것 궁금하게 생겼다는 게 이유다. 예단은 어떻게 했으며 예식장을 고르는 기준은 뭐였냐는 다양한 질문들. 하지만 뒤따르는 친구의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너희 반지는 어디서 했어? 너 그때 남편이 다이아 반지 해줬다고 하지 않았나?”
등골은 무슨, 간담까지 서늘하다. 이사하면서 내가 반지를 어디 챙겼었지. 이내 온 집을 뒤지기 시작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반지 케이스. 이거 큰일 났다! 정말 큰일 났다! 다이아 반지의 행방이 기억나지 않는다!
물고기는 3초가 지나면 기억을 잃는다지
나는 인간인데 왜 이러는 거지?
영화 <도리를 찾아서>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목이 익숙하다면 당신은 아마 <니모를 찾아서>를 관람했을 것. <도리를 찾아서>는 <니모를 찾아서>의 속편이다. 그렇다면 도리는 누구일까? 아들 니모를 찾아 나섰던 아빠 말린의 친구다. 친구의 아들을 찾기 위해 기꺼이 함께 나서준 의리파 캐릭터란 말씀.

하지만 도리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건망증이다. 이는 <니모를 찾아서>에서도 종종, 아니 자주 드러났던 모습이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마는 도리. 본인은 전혀 걱정 없이 살아가지만 옆에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적지 않게 답답함을 느낀다. 그야말로 기억력 3초! 너 물고기니? 어류를 향한 조롱에 딱 맞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아 물론, 도리의 기억력인 3초가 아닌 10초지만 말이다.
그런 도리가 웬일로 과거를 기억해 낸다. 불현듯 부모님의 존재와 옛날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집 주소를 떠올린 것이다. 언제나 혼자였다고 생각했던 도리는 자신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이 기억을 또 잊을 새라 바삐 여행 채비를 한다. 자신이 누구인 줄 모르고 살았던 도리였기에 이번 기억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니모를 찾을 때 도리에게 크게 도움을 받은 말린은 이번엔 그녀가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 그렇게 도리는 엄연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했다.
도리를 찾기 전에
반지부터 찾으렴
ㅠㅠ
결국 반지는 찾지 못했다. 이사를 한 지 세 달이 지났기에 잃어버린 경로를 추적하는 일도 무의미했다. 이사 나온 집에 연락을 해도 "모른다",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해도 "모른다".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답은 똑같았다. "몰라, 몰라,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여태껏 잃어버린 수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반지를 잃어버린 건 내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차라리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이사하면서 결혼반지 하나 제대로 안 챙기는 여자가 어딨단 말인가. 우리 부부의 소중한 물건이자 추억이자 기념이지 않는가. 스스로를 책망하다 끝끝내 이런 생각까지 하고 만다. 어쩌면 도리가 나보다 낫겠다는. 모든 기억은 잃어버려도 소중한 가족에 대한 일만큼은 기억하는 도리가. 기특하기도 짠하기도 했다.
도리는 자신과 관련된 단서나 흔적들을 발견하며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모든 것을 잊는 도리지만, 가족과 관련된 소중한 기억은 쉽사리 잊지 못했던 걸까.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가족들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도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간절하다.
도리에게 친구가 있듯
나에게는 남편이 있네

도리는 사실 조롱의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럴 만도 한 게 도리는 자신의 이름까지도 가끔 까먹는다. '도리? 도리? 그게 누구지? 아! 내 이름이구나.' 이런 도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괄시와 멸시뿐. "저리 가서 다 잊기나 해, 그게 네 특기잖아!"라는 놀림을 당해도 도리는 할 말이 없다. 어쩌면 <도리를 찾아서>의 배경인 바닷가는, 우리네 삶과 매우 닮아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조금 부족한 이를 보며 우월감에 사로잡혀 깔아뭉개기 바쁜 사람들. 그리고 이로 인해 위축되는 도리와 같은 사람들.
그런 도리의 곁에도 좋은 이들은 있다. 도리의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까지 길을 인도해주는 거북이들. 초반부 도리를 속이기도 하는 짜증 많고 투덜대는 캐릭터지만 끝내 부모를 찾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는 문어 ‘행크’, 그리고 <니모를 찾아서>에서부터 명실상부 도리의 동행자인 니모의 아빠 ‘말린’. 물론 짧은 기억만으로 먼 길을 떠나려는 도리를 말리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하지만 도리의 절박함을 이해하며 결국 함께 따라나서는 것 또한 이들의 업이다.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영화의 빌런이기도 한 도리. 여정 중간중간 도리는 '허파 뒤집어질 만한' 행동을 꽤 많이 한다. “내가 무슨 말 하려 그랬지?” 라며 자신을 믿고 따라나선 친구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가 하면, 낯선 곳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탓에 사람의 손에 잡혀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도리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어 도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도리의 친구들을 보며 계속 생각났던 존재. 바로 남편이다. 결혼 전 연애 시절에도 나의 ‘정신없음’은 지금과 똑같았다. 잘 잃어버리고 잘 까먹고 그야말로 사고뭉치 여자친구를 보듬어 온 것은 남편의 역할이었다. 얼마 전 밤길 운전을 하다 차 옆판을 다 긁어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안 다쳤으면 됐지. 다음부터는 조심해.” 회사 노트북에 물을 쏟아 쌩돈 70만원을 날릴 뻔했을 때도 그는 침착했다. “놀랐겠다. 뭐 어쩔 수 없지.”
스트레스 안 받는 게 신기하네
하지만 남편은 때때로 뼈 있는 말을 남긴다. '스트레스 안 받아서 좋겠다' '뭐 잃어버리고도 멀쩡하네' … 그리고 <도리를 찾아서>를 감상하며 날리는 묵직한 팩폭. "도리랑 자기랑 참 닮은 것 같아."
도리는 무한긍정 물고기다. 그의 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쉽게 드러난다. "계속 헤엄쳐, 계속 헤엄쳐." 가히 사랑스러운 낙천주의자. "유리 상자에만 갇혀 있지 말고 바다로 나가자!" 도무지 계획이라고는 세울 수 없는 캐릭터이지만,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능을 갖췄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야." "파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대로 가." 좋게 말하면 무한 긍정. 나쁘게 말하면 생각 없음. 한 끗 차이지만 어쨌든 도리가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남편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을 테다.
도리는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결국 도리는 부모님을 만난다. 도리 본인에 대한 정체성을 결국 찾아낸 것.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도리를 찾아서>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도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남편의 동행으로, 나는 어찌 됐건 우리만의 바닷속을 잘 헤쳐나가는 중이다. 어느 때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서, 또 어느 때는 실수로 놓쳐버린 기회를 찾아서. 실수 좀 하면 어때! 앞으로 잘 하면 되지! 다시 힘내서 찾아가면 되잖아! 이는 물건이 될 수도 또 다른 무형의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테다.
흠흠 그렇지만 일단은
…
반지부터 찾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