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또 다른 ‘성난 사람들’이 있다. 전혀 만날 일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지긋지긋한 악연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는 지난해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던 역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베이비 레인디어>는 어딘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4만 통이 넘는 이메일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일 스토킹을 보고 있자니, <성난 사람들>의 하드코어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주인공 도니 역을 맡은 스코틀랜드 출신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가 10년 전 실제로 겪은 스토킹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각본까지 쓴 드라마로, 공개 이후 곧장 인기를 얻기 시작해 전 세계 넷플릭스 랭킹 정상을 휩쓸었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도니(리처드 개드)는 평소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중 손님으로 찾아온, 돈이 없어 차 한 잔도 마실 수 없는 한 중년 여성 마사(제시카 거닝)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삶을 동시에 무너트릴 수 있는 마사의 숨 막히는 집착이 시작된다. 낯선 남성의 따뜻한 호의에 감격한 마사는 자신이 알고 보면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개드가 일하는 바를 찾는다. 도니를 ‘아기 순록’(Baby Reindeer)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무차별 이메일과 음성 메일의 스토킹은 물론, 도니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 준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의 라이브 스탠딩 코미디 공연장까지 찾아가 훼방을 놓는다. 고통에 시달리던 도니는 역으로 마사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녀가 이미 스토킹으로 형사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넷플릭스에서 4월 11일 공개된 <베이비 레인디어>가 여전히 화제다. 그런데 최근, 이 무시무시한 실화 속 실제 인물이 직접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 큰 화제를 낳고 있다. 마치 영화 <미저리>(1991)의 애니(캐시 베이츠)를 연상시키며 큰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 마사, 그 마사를 연기한 제시카 거닝과도 사뭇 닮아 보이는 실화 속 인물이 카메라 앞에 선 것. 리처드 개드도 실제 인물을 궁금해하는 네티즌들을 향해 누군지 절대 얘기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유력하게 실제 마사로 지목되던 한 스코틀랜드 여성이자 실제 변호사이기도 한 피오나 하비가 여러 인터뷰에 응하며 상황은 새 국면을 맞았다. “여러 번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형을 살았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처럼 “드라마 속 사건들은 모두 거짓”이고 “오히려 내가 피해자였다”고 말하며, 실존 인물인 자신이 언젠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데도 이를 ‘실화’라고 홍보한 넷플릭스를 상대로 현재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를 두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잡지 않았고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리처드 개드가 이를 실화라며 선정적으로 이용한 것은 잘못이다’라는 시선과, ‘연극으로 만들어진 건 한참 전인데 굳이 이제야 문제 삼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피오나 하비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홍보하고 있다’는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 현 상황에서 오히려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베이비 레인디어> 각본가이자 주연배우인 리처드 개드가 넷플릭스 공개 직전 기대와 우려를 모두 안은 채 직접 쓴 글을 옮겨본다.(자료 제공=넷플릭스 코리아)

“복잡한 내 이야기를 세상과 공유하다” - 리처드 개드
때로는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영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나를 괴롭히는 능력보다 유일하게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는 법의 눈을 피하는 것밖에 없는 한 여성에게 스토킹을 당한 지 4년째 되는 해였을 때다. 내가 업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겪었던 성적 학대를 다룬 연극인 <Monkey See Monkey Do>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내 커리어의 정점의 시기에, 그녀는 어쩌다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수년간 혼자서 조용히 고통스러워하던 일들을 깨끗이 털어놓는다는 것.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얻었던 어떠한 좋은 감정도 매일, 매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모욕부터 사랑과 그리움까지, 깊은 감정을 모두 표현하는 마사의 감정들을 마주해야 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라도 가혹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가 남긴 모든 음성 메시지를 듣고, 기록하고, 노트해 두었다. 제발 고소할 만한 말을 해서 이 모든 상황을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하며.

한창 이런 일이 정점에 있을 때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면서 잠에 들곤 했다. 그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잠을 청할 때에도 그녀가 한 말들이 내 눈꺼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그녀가 내 방에 같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침대 속 내 바로 옆에. 그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특별히 길게 느껴졌던 아주 힘든 밤이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모든 일을 무대에서 공개하여 정면돌파한다는 것이었다. 빛을 무대 곳곳에 쏘면서 음성 메시지들을 서로 겹쳐서 재생하면 얼마나 인상 깊은 오프닝이 될까?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음이 꺾이고 단어들이 변형되며 생기는 소리의 부조화, 즉 바로 그녀의 광기, 또한 나의 광기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관객들을 처음부터 바로 공포 속으로 빠뜨리는 것은 최고의 오프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베이비 레인디어>를 선보이기로 결정했을 때, 내 인생은 마사로부터 해방된 지 2년이 되었고, 나는 또 다른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여론의 판단이었다. 내가 마사와의 관계에서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는 등 가감 없이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것은 당연히 위험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처구니없는 썸을 타기도 했었고, 우리가 사귈 수 없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그 관계의 가운데에 있는 편견과 성적 수치심은 말할 것도 없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당했던 마약 복용, 그루밍, 성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디테일까지.
공연장 밖에 피켓시위가 벌어지며 공연이 중단될 줄 알았다.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그녀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며, 사실 내가 가해자고 마사가 피해자라며 비난받을 줄 알았다. 내면화된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와서 거론해 봤자 도움도 안 되고, 성폭력에 대한 묘사가 너무 극단적이라 왠지 나도 가담한 게 아닌지 의심받을 줄 알았다. 결코 근거 없는 걱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한 일에 대해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반드시 말하고 싶었다.

그 달 연극은 매진되었고, 그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하루에 두 타임씩 공연해야 했다. 마지막엔 관객들이 나에게 다가와 “당신을 때려야 할지, 꼭 안아줘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불쌍했고, 그녀가 싫어졌다. 그러다가 당신이 싫어졌고, 그녀가 불쌍해졌다”라며 품평을 남겼는데, 내 연극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 생각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하고, 그 누구도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으며, 우리 각자만의 기묘한 방법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2021년 4월 넷플릭스는 이 연극의 영상화를 의뢰했고, 거의 정확하게 3년 후 동일한 메시지와 주제들을 세계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도덕적 질문들을 다루는데, 이번에는 더 큰 규모로, 더 자세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더 다양한 범위의 사람들, 그리고 2억 배나 되는 시청자들에게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때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한다.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엉망진창이 된 주제를 다루는 <베이비 레인디어>를 시청자들에게 선보이며, 시청자들이 그 속 뛰고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