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부류의 영화가 있었다. 국내에 개봉하는 영화, 그렇지 않은 영화. 요즘엔 한 부류가 늘었다. 극장에 걸리지 않고 곧장 IPTV로 직행한 영화. 손꼽아 기다리던 영화가 '디지털 개봉'으로 풀리는 바람에 실망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올해의 디지털 개봉작 중에 힘주어 권하고픈 영화 6편을 골라봤다.


블랙 할로우 케이지
Black Hollow Cage

감독 사드락 곤살레스-페레욘
출연 로웨나 맥도넬, 줄리앙 니콜슨

<블랙 할로우 케이지>는 '서정적인 SF'를 표방한다. 다만 그 수식은 이 영화를 둘러싼 매력들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개와 인간이 통역기를 통해 대화하고, 인간이 로봇 팔을 인식해서 쓸 수 있는 근미래. 교통사고로 엄마와 한쪽 팔도 잃은 소녀 앨리스는 사고 후유증으로 아빠를 싫어하고, 반려견을 엄마로 착각하고 있다. 아빠에게 로봇 팔을 선물 받은 날 집 근처 숲에서 큐브형의 검은 물체를 발견한 후 주변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블랙 할로우 케이지>는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존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서사를 밀고 나간다. 낯설되 또렷한 이미지들을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펜스
Fences

감독 덴젤 워싱턴
출연 덴젤 워싱턴, 비올라 데이비스

1950년대 피츠버그, 잘나가는 야구선수였던 트로이는 쓰레기 수거로 생계를 이어간다.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체화한 그는, 흑인은 뭘 해도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운동선수, 음악가가 되려는 아들들의 사기를 번번이 꺾는다. 제목 '펜스'는 가족의 안전한 환경을 나타냄과 동시에 차별이 횡행하는 세상으로부터 쳐놓은 마음의 장벽을 의미한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연극을 영화로 옮긴 <펜스>는 평범한 가정이 인종차별에 의한 상처로 인해 갈등을 겪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감독' 덴젤 워싱턴은 <앤트원 피셔>(2002), <그레이트 디베이터스>(2007)에 이어 인종 문제에 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 아내, 어머니,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삶을 선명히 보여준 비올라 데이비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프렌치 시네마 스토리
Voyage a travers le cinema francais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단도직입적인 제목이다. <프렌치 시네마 스토리>는 거장 베르트랑 타비르니에 감독이 자신이 사랑했던 프랑스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목조목 들려주는 다큐멘터리다. 장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을 시작으로, 1930~70년대의 걸작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단순히 영화를 나열하며 개인적인 감상이나 추억을 늘어놓는 걸 넘어, 극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으로서 해당 작품들에 담긴 연출과 연기의 묘미를 짚어주기 때문에 학습적인 가치가 상당히 뛰어나다. 눈 앞에 펼쳐지는 명작들의 이미지와 이를 설명하는 타베르니에의 신중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200분의 러닝타임이 물처럼 지나간다.


탈명금: 사라진 천만 달러의 행방
奪命金

감독 두기봉
출연 유청운, 임현제, 하운시

<탈명금>은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감무소식이었다가 이제서야 느닷없이 한국에 서비스가 시작됐다. 두기봉의 이름에서 응당 범죄영화를 떠올리겠지만, 기존의 작품들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범죄집단과 경찰 사이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두기봉의 대표작들과 달리, 금융위기가 불어닥친 1997년 홍콩을 배경으로 각자 다른 사연으로 코너에 몰린 세 명의 소시민을 따라간다. 천만 달러가 걸린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들의 운명은 잡히고 잡아야 하는 경찰/갱의 대결구도 못지 않은 긴장을 발산한다. 추격전의 쾌감보다는 홍콩의 현실을 그리는 다소 우울한 정서가 짙되, 사방이 가로막힌 상황을 보란 듯이 처리해내는 두기봉의 장기는 여전하다.  


은판 위의 여인
Le Secret de la chambre noire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출연 타하르 라힘, 콘스탄스 루소, 올리비에 구르메

구로사와 기요시가 프랑스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장(타하르 라힘)은 유명 사진작가 스테판(올리비에 구르메)의 조수로 고용된다. 실물  크기의 은판을 활용한 촬영 방식을 고수하는 스테판은 모델인 딸 마리(콘스탄스 루소)의 자유를 통제하고, 장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공간과 배우, 그리고 언어까지 프랑스로 바뀌었지만 기요시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영혼'에 대한 관심은 <은판 위의  여인>에서도 유효하다. 장과 마리의 로맨스는 스테판의 기묘한 대저택에 서려 있는 불안한 공기와 함께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한순간도 속시원히 공포를 내세우진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근사한 호러를 본 듯한 감흥을 심어준다.
 


빌리 린의 롱 하프타임 워크
Billy Lynn's Long Halftime Walk

감독 이안
출연 조 알윈, 크리스틴 스튜어트, 크리스 터커

눈이 시릴 만큼 풍부한 이미지로 세상을 놀래켰던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안 감독의 최신작. 내놓는 작품마다 새로운 주제와 장르에 도전했던 그는 미국의 이라크 참전용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텍사스 출신의 19살 빌리 린과 그의 분대원들은 이라크전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미국에 돌아와 홍보투어에 참여한다. 빌리는 당당하기는커녕 불안해 보인다. 틈만 나면 전쟁터의 기억이 엄습해 현실을 흩뜨려놓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의 축제라 불리는 하프타임쇼에도 동원되면서 혼란은 극에 달한다. 야심차게 감행한 '초당 120프레임(보통 경우의 5배) 촬영'은 전쟁신의 사실성을 극도로 밀어붙여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빌리가 느끼는 혼돈이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닿는다. 흥행에 실패했고 개봉 당시 평도 좋지 않았지만,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작품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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