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정권이 바뀌었다. 새 정부가 출범해 각 부처가 개편됐고,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관련자들은 구속됐다. 세월호는 침몰 3년 만에 인양됐으며, 북한은 대륙간탄도탄을 완성시켰다. 포항에서 5.4의 강진이 발생해 수능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어금니 아빠와 인천여아살해 등 잇단 잔혹사건이 화두에 오르내렸다. 이런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듯 올 한해 가장 성공한 영화는 휴머니즘이 짙게 묻어나는 <택시운전사>였고, 남북한 협력을 다룬 <공조>와 강력범죄를 응징하는 <범죄도시>와 <청년경찰>이 그 뒤를 따랐다. 가장 성공할 것으로 예측되던 대작 <군함도>와 <남한산성>은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택시운전사>

작년과 마찬가지로 흥행의 양극화가 이어졌고, 여전히 중간급 영화들의 침체가 아쉬웠다. 400편 조금 넘는 영화들이 공개됐지만 그 중 2/3는 IPTV용이었고, 관객 수 천명 이상을 넘긴 실질적 개봉작은 110편 정도에, 손익을 넘긴 작품은 스무 편 남짓에 불과했다. 아직 하반기 대미를 장식할 빅3(<강철비> <신과 함께-죄와 벌> <1987>)가 남아있지만, 이쯤에서 2017년 한해 국내 영화음악들을 정리해본다.

간은 작년처럼 2016년 12월 1일부터 2017년 11월 30일까지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음원이나 CD로 공개된 국내 영화 사운드트랙에 한정했다. 그렇게 해서 작년과 얼추 비슷한 45편 정도의 한국 영화음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일단 이들을 대상으로 5편을 추려 ‘2017년 한국 사운드트랙 베스트5’를 뽑아보았다. 사운드트랙이 나오지 않은 영화들은 과감히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편이 이 리스트에 대한 형평성과 객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음악 베스트가 아닌, 사운드트랙 베스트다. 따라 시상식 후보에 올랐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정재일의 <옥자>나 모그의 <더 킹>과 <대립군>, 사운드 효과를 잘 활용했던 김홍집&이진희의 <장산범>, 조영욱의 <싱글라이더>, 이지수의 <7호실> 등은 사운드트랙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 포스트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개인적으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리스트는 무순이다.


1. <남한산성>
by 류이치 사카모토

병자년 겨울, 고립무원의 성 안팎에서 벌어졌던 치욕스러운 역사의 그늘을 스산하고 건조하게 담아낸 김훈의 동명 베스트셀러 <남한산성>을 <도가니>, <수상한 그녀>의 황동혁 감독이 영화화했다. 이병헌과 김윤석, 박해일과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쟁쟁한 배우들의 포진에, 연타석 흥행 홈런을 때려낸 황동혁 감독의 네 번째 작품이자 추석 시즌 텐트폴 영화였으나, 초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범죄도시>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김훈의 날선 문체와 차갑고도 시린 정서까지 효과적으로 꼼꼼하게 옮겨낸 연출력과 작품성은 인정받으며 웰메이드 사극으로서 가치를 빛냈다. 여기에 주요한 역할을 보태는 건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맡은 음악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후두암 발병 이후 한동안 안식년을 가졌던 그가 복귀하며 들려준 일련의 작업물들은(<어머니와 살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분노>) 모두 삶과 죽음, 믿음과 배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들려줬다. <남한산성>에서도 그 기조는 유지된다. 관조적이고 절제된 특유의 정갈하고 담백한 사운드는 더욱 더 미니멀하게 변모했고, 피아노와 스트링 위에 대금, 피리, 아쟁, 사물놀이 등 한국적 소리들을 슬쩍 얹은 혼용의 조화는 절묘한 정서와 분위기를 낳았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과잉으로 넘쳐나던 음악을 덜어낸 배치와 실험적인 접근은 과감한 용단이자 탁월한 선택이었다. 같은 청나라를 다뤘지만 초기와 말기를 30년이란 간극을 통해 다르게 묘사한 <마지막 황제>와 <남한산성>을 비교해보면 류이치 사카모토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새삼스레 들여다 볼 수도 있어 흥미롭다.

남한산성

감독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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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택시운전사>
by 조영욱

<고지전>의 실패 이후 6년 만에 차기작을 내놓은 장훈 감독의 선택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처음 보도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에 데려다 준 택시운전사 김사복씨의 사연이었다. 방관자였지만 시대의 비극과 마주치며 그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외지인의 시선과 변화를 통해 상처를 보듬어내는 이 영화는 2017년의 유일한 천만 영화가 되었다. 대중의 지지와 비평적 상찬을 얻은 영화답게 기술적인 완성도도 좋은 편인데, 언제나 한국영화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사운드를 선사했던 조영욱 음악감독과 그의 작곡팀 The Soundtrack Kings가 매만진 웃고 울리는 음악은 단연 돋보인다.

조영욱 (사진 출처= 매경 프리미엄)

포크와 맘보, 러시아민요 등 다양한 스타일을 버무려 유쾌하고 낭만적으로 시작했던 음악이 점차 광주에 다가가게 되며 의뭉스럽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제시하다 비극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진중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변하는 과정은 영화의 흐름과 기가 막히게 맞닿아 효과적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특히나 국내 영화음악에선 드물다 싶을 정도로 10분에 이르는 장대한 큐 ‘악몽의 순간’에선 강렬한 공포와 긴장을 실감나게 선사하며, 이후 광주의 참상에 직접 뛰어들어 체험하는 과정들 속에서 흐르는 묵직한 스트링의 다양한 질감은 공포와 번뇌, 분노와 애수 등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드라마틱하게 휘몰아치고 있다. 아쉽게도 오프닝을 연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광주청년 류준열이 대학가요제를 언급하며 부르는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핸들을 다시 광주로 돌리며 부르던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사운드트랙에서 빠졌다.

택시운전사

감독 장훈

출연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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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 날>
by 김정범(푸디토리움)

천우희와 김남길이 주연한 <어느 날>은 꾸준히 한국에서 멜로적 감수성을 지닌 채 남녀 간의 이야기를 만들어온 이윤기 감독의 색다른 감성 판타지로, 비록 흥행과 비평에선 많은 공감을 얻진 못했지만 극장에서 멜로가 사라진 요즘, 의미 있는 시도이자 도전이었다. 잔잔한 흐름 뒤에 진정한 상실감과 사랑에 대해 묻는 화두와 여운은 영화가 끝나고도 꽤 오랫동안 남는데, 이를 증폭시키는 건 바로 김정범이 맡은 음악 덕분이다. <러브 토크>를 시작으로 <아주 특별한 손님>과 <멋진 하루>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그들의 네 번째 협업작으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따스하고 감미로운 선율로 관객들을 무장해제시킨다.

푸디토리움 (사진 출처=올리브 매거진 코리아)

재즈밴드 ‘푸딩’의 리더이자 솔로 프로젝트 ‘푸디토리움’을 이끌고 있는 그는 재즈와 뉴에이지, 클래시컬한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색다른 시도들을 펼쳐 보여 왔는데, 이번 <어느 날>에선 몇몇 곡들을 제외하곤 거의 피아노로만 작업을 완성해냈다. 단출하거나 루즈할 거란 우려를 날려버리듯 그 와중에 두 대의 피아노를 동시에 쓰거나 프리페어드 피아노로 연주하는 등 여러 방식들을 활용해 만들어낸 이지리스닝 계열의 단아한 선율은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남녀가 만나 교감을 이루게 되는 상황들을 화사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윤기 감독이 그간 즐겨 다뤘던 도시남녀의 일상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만한 음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영상에 녹아든 사운드가 일품이다. 미니멀한 색채로 여운을 강하게 자아내는 ‘달빛 바다’는 필청 트랙이다.

어느날

감독 이윤기

출연 김남길, 천우희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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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
by 연리목

<은교> 이후 오랜만에 상업영화로 돌아온 정지우 감독의 <침묵>은 중국 영화 <침묵의 목격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뒤통수를 때릴 법한 독특한 반전에 스릴러 요소가 짙었던 원작과 달리 한 중년 가장의 멜로드라마와 가족 신파를 뒤섞어낸 이 영화에선 최민식의 압도적인 무게감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18년 전 <해피엔드>에 이어 오랜만에 결합한 그들의 해후는 인상적이었지만 흥행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몇몇 대목들은 그냥 넘어가기에 너무 아쉽다. 연리목이 맡은 음악도 그중 하나다. 첫 상업 장편이었음에도 <은교>에서 놀라운 결과물을 선사했던 그녀는 이번에도 탁월한 감각과 균형감으로 영화에 인상적인 사운드를 제공하고 있다.

연리목 (사진 출처=민중의 소리)

서울대 작곡과 출신에, 밴드 ‘눈뜨고코베인’의 키보디스트이자 국악 그룹 ‘타니모션’의 리더이고, 무용단과 극단 등의 다양한 무대 음악을 맡았던 경험에, 단편과 장편, 독립과 상업영화를 오가며 영화음악을 해온 경험들이 축척돼 전방위적인 능력을 갖춘 게 이번 <침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엔딩곡이자 영화의 초반 가수로 등장하는 이하늬가 직접 부르던 ‘흔들리는 밤’은 연리목이 직접 작사·작곡한 재즈 보컬 곡이고, ‘Caro Mio Ben’은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다니의 가곡을 클래시컬하게 편곡해 행복했던 과거를 반추할 때 이별을 암시하며 의미심장하게 흐르던 곡이었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법칙을 가져가면서도 멜로드라마로서 정서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스트링과 피아노로 짚어주는 그녀의 스코어는 기능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영화음악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영화에 종속적이지만 따로 들어도 좋은 음악에 대한 욕심이 드러난다.

침묵

감독 정지우

출연 최민식, 박신혜, 류준열, 이하늬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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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열>
by 방준석

2013년 <소원>을 시작으로 매년 영화를 찍고 있는 이준익 감독은 작년 <동주>에 이어 다시 한 번 일제강점기 치하의 실존 인물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얘기가 바로 그것으로, 단순한 민족주의적 분개에 빠지지 않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온전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물에 대해 그려내고자 했다. 이런 접근법은 신선하고 색다른 시선과 해석을 낳게 해주는데, 230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준익 감독과는 벌써 6번째 작업을 하고 있는 방준석이 음악을 담당하며 <라디오스타>와 <사도>에 이어 인상적인 결과물이 되었다.

방준석 (사진 출처=특별한 하루)

2017년 방준석의 한 해는 놀라웠다. <여교사>로 시작해 <프리즌>과 <박열>, <군함도>와 <꾼>까지 쉬지 않고 라인업이 이어졌다. 여기에 다큐 <자백>의 엔딩곡과 창감독이 연출한 한중합작영화 <치명도수 Reset>까지 담당하며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박열>은 그 중 단연 빛나는 결과물로 두 매력적인 아나키스트 커플을 위해 짧지만 활력 넘치고 낭만적인 사운드 선사했다. 스트링과 관악 편성이 어우러진 ‘밟자’나 ‘거봐’, ‘후미코정신감정’ 등이 그러한 큐들로 유머러스하며 강렬하게 영화에 방점을 찍어준다. 경쾌하지만 경박하지 않다. 여기에 적절히 흐름을 잡아주는 피아노와 기타의 반복적인 테마도 현실적인 투쟁의 고통과 항쟁의 시련을 묘사한다. 하지만 처지거나 우울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의 앞뒤를 장식하는 것도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최승희가 부르는 ‘이태리의 정원’이고, 노동자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담고 있는 ‘인터내셔널가’도 활기차게 편곡돼 흐른다. 고착화된 패턴과 인식을 시원하게 깨부수는 사운드였다

박열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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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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