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카메론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정점에 선 흥행 감독임과 동시에 (이런 관점이 다소 생경할 수 있지만) 줄곧 ‘기술’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작가’이기도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기술문명이 불러올 가공할 역운(逆運)에 대한 근심과 우려가 통속적인 구도이지만 감성적인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타면서 강렬한 호소력을 갖게 되는 그의 작풍은 (영화평론가 레너드 말틴이 “만일 이 영화에서 카메론의 재능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영매(靈媒)다!”란 코멘트를 붙인 망작 <피라냐 2>(1981)를 제외하고 사실상 데뷔작인) ‘테크 누아르’(techno-noir) <터미네이터>(1984) 이래 근작 <아바타 : 물의 길>(2022)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철되어 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고색창연한 시대 배경의 <타이타닉>(1997) 역시 ‘테크놀러지의 몰락’이라는 그의 모티브에 정확히 들어맞는 작품이었죠.
기술에 대한 카메론의 관심은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 만들기의 방법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유년 시절 그를 영화의 길로 이끈 계기가 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때문에 카메론은 이 영화의 스페셜 에디션 DVD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의 출연과 내레이터를 자처했을 정도)에서 15세의 카메론이 주목했던 건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심오함이 아닌(...) 더글러스 트럼불이 빚어낸 시대를 초월한 특수효과의 놀라운 완성도였고, 8mm 카메라를 갖고 자신만의 특촬물을 만드는데 열중하는가 하면, 실질적인 영화인으로서의 경력 또한 (자서전 제목부터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수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도 한 푼도 잃지 않았나」(How I made a hundred movies in Hollywood and Never Lost a Dime)라 쓴 전설적인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의 영화사 뉴월드 픽처스에서 <배틀 비욘드 더 스타>(1980)의 특수효과 담당자로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갤럭시 오브 테러>(1981) 때도 코먼은 그답게 예산을 짜게 책정했고 제작 일정도 완성까지 고작 한 달이 주어졌는데, 카메론은 더미로 만든 팔에 붙은 벌레들이 움직이지 않자 전류를 통하게 해 꿈틀거리게 만드는 등, 즉석에서 갖가지 기발한 꼼수를 총동원하면서 가성비 좋은 특수효과를 척척 만들어내 코먼의 눈길을 끈 바 있었다고.)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전문가로 출발해 <어비스>(1989, 이전 원고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를 위해 개발된 그래픽 툴이 바로 포토샵의 바탕이 되었습니다)와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1991)로 본격적인 디지털 CGI의 시대를 열어젖히고(이걸 본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1993)을 위해 준비했던 본래의 애니매트로닉스 작업물을 폐기하고 CGI로 작업하기로 방향을 틀었을 정도) <아바타>(2009)로 다시금 디지털 시네마의 한계를 갱신하기까지 카메론의 경력은 기술에 관한 엔지니어에 가까운 열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테크니션’, 심지어 인공지능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만 세 편(<터미네이터>, <에이리언 2>(1986),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을 연출한 카메론의 시야에 최근의 트렌드인 AI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 만무합니다.
최근에 출시된 <에이리언 2>와 <어비스>, 그리고 <트루 라이즈>(1994)의 4K UHD 블루레이 신판은 AI라는 기술 트렌드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카메론의 호기심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꽤나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그중에서도 <어비스>와 <트루 라이즈>는 2003년 블루레이 포맷이 출범한 이래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물리매체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가 무척 큰 타이틀이었는데, 막상 공개된 결과물은 분명 고화질화는 맞지만 어딘가 미묘한 점이 있습니다.


과거 필름 영화를 디지털 4K로 초고해상도화할 때 좋은 화질의 기준은 단순히 선명하고 깔끔함이 아니라, 필름 그레인과 같은 필름 본유의 질감, 즉 ‘필름라이크’(film-like)함이 얼마나 영상에 잘 재현되는가에 있습니다. 반면 카메론이 과거 필름 시절의 자신의 연출작 4K 매체화를 감수하면서 추구하는 방향성은 사뭇 다른데 디지털 후보정 처리를 적극 도입한 ‘인공적’인 변형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AI를 DI에 도입하기 이전에 3D 재개봉을 위해 만들어진 4K 마스터를 적용한 <터미네이터 2> UHD의 화면을 살펴보면 카메론이 추구하는 리마스터링의 큰 방향성을 대강 가늠해볼 수 있는데 (1) 자글자글한 필름 그레인의 입자감을 DNR(디지털 노이즈 감소)을 적용해 억제하고, (2) 윤곽선 선예도를 강조하는 식의 필터 처리를 가미하면서 선명도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디지털 촬영의 깔끔함에 익숙해진 관객의 기호에 가깝게 필름 영화의 화면을 현대적으로 재조정한다는 것.
이것이 창작자로서 카메론 본인의 의도임은 이전에 그가 <에이리언 2> 블루레이의 디지털 복원에 관련해 “정말 환상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프레임에서 노이즈와 그레인을 줄이고, 해상력을 끌어올리고, 매 프레임마다 색상을 보정했습니다. 원래 극장에서 본 것보다 더 좋아 보일 겁니다”(It's spectacular. We went in and completely de-noised it, de-grained it, up-rezzed, color-corrected every frame, and it looks amazing. It looks better that it looked in the theaters originally)라 한 발언에서 충분히 드러나는 바이고요. 이러한 리마스터링 기조는 한결 말끔해진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얼핏 개선처럼 보이지만, 보정 처리를 통해 필름 영화 본유의 특질을 죽인다는 점에서 원본성을 중시하는 관객에겐 비판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필름영화에서 그레인이 갈리고 뭉개진다는 건 그만큼 필름에 새겨진 디테일과 유기적 특질 또한 일정 부분 훼손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


<에이리언 2>와 <어비스>, <트루 라이즈>와 <타이타닉>의 4K 리마스터링 작업은 제임스 카메론 본인이 설립해 줄곧 그의 작품의 특수효과 상당 부분을 도맡아온 회사 라이트스톰(Lightstorm)과 피터 잭슨이 이끄는 파크 로드 포스트(Park Road Post)의 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아바타>(2009)의 새로운 4K 리마스터링도 두 회사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이 경우는 소니 PDW-950의 2K 디지털 촬영 후 2K DI작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합니다.) 이 중 <에이리언 2>와 <타이타닉>은 예전에 블루레이를 위해 각각 2011년, 2012년에 만들었던 오리지널 카메라 네거티브 필름으로부터의 4K 스캐닝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전용했고 <어비스>와 <트루 라이즈>는 처음부터 새로 필름을 4K 스캐닝한 후 파크 로드 포스트에서 자체 개발한 AI 딥러닝 알고리즘을 적용해 재조정했습니다. 파크 로드의 실무진은 이 작업을 두고 ‘최적화’(optimized)라는 다소 의미심장한(?) 표현을 쓰기도 했죠.
AI 딥러닝을 통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의 결과는 영화마다 차이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순위를 매기자면 <타이타닉>이 가장 우수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그다음으로는 <어비스>와 <에이리언 2> 그리고 <트루 라이즈> 순으로 둘 수 있겠습니다. <타이타닉>의 경우는 고전적 로맨스의 서사와 시대 배경을 감안한 덕인지 필름 그레인의 고유한 유기적 구조를 가능한 보존하면서 윤곽선 선예도도 이중윤곽선이나 떨림 현상을 유발하지 않는 선에서 향상시키는, 나름 절제된 리마스터링 조정이 이루어져, 디지털스러운 선명함을 원하는 관객이든, 필름 고유의 감성을 선호하는 관객이든 양자 모두를 아우르며 만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절충선을 찾았다는 점에서 향후 더욱 가속화될 AI 딥러닝을 이용한 리마스터링의 모범적인 선례를 만들었다는 감상입니다. (비록 한글자막은 없지만 화질이 매우 우수한 타이틀이다보니 <타이타닉> UHD 만큼은 이후 별개의 글로 다뤄볼 의향이 있기도 합니다.)


<어비스>는 필름 영화에 대한 디지털 조정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이 경우만큼은 SF 장르의 환상성에 맞는 적절한 ‘최적화’로 보입니다. 특히 이 영화의 경우는 스모그를 뿌려 물속에 있는 걸 가장하는 드라이 포 웻(Dry for Wet)이 아닌, 실제로 물을 채운 수조 세트(카메론은 물속에 있다는 리얼리티를 영상에 담기 위해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개프니에 건설을 중단한 원전 폐건물을 인수해 대규모 수중 촬영 전용 세트로 개조하는 공사를 감행했고, 배우들에게 각각 전담 다이버를 배치했다고)에서 촬영하는 웻 포 웻(Wet for Wet) 방식을 취했고, 공기보다 빛의 굴절률이 높은 수중의 특성상 지상 환경보다 빛을 더욱 잘 흡수하기 위해 자이스(Zeiss) 사의 슈퍼 스피드 렌즈(조도가 낮은 어두운 환경에서도 이미지를 잘 포착하고 독특한 플레어 효과를 얻지만 대신 선예도가 부드럽게 풀리는 특징이 있음)를 사용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중 공간에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의도한 촬영의 특성이 있다 보니, 인공적인 그레인 감소와 윤곽선 강조로 요약되는 AI 리마스터링의 부작용은 완화되면서 화면 디테일의 시인성이 올라가는 순기능이 우선하는 우수한 4K 영상입니다. 보다 <아바타>의 질감과 컬러에 가깝게 재해석된 버전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에이리언 2>와 <트루 라이즈>. 원본이 필름이다 보니 필름 특유의 질감을 어느 정도 남겨두긴 하지만 ‘과거의 필름 영화를 다시 디지털로 촬영한 것에 가까운 근사치’를 얻는 것이 제임스 카메론이 리마스터링 작업의 감수에 임하면서 추구한 지향점으로 보이는데, 유독 <에이리언 2>와 <트루 라이즈>만큼은 유독 디지털 쪽으로 저울의 균형이 기울어진 모양새입니다. 이 중 <에이리언 2>의 경우는 액션영화의 특성상 조명 환경이 일정치 않은 여러 종류의 세트 공간 안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 통상적인 수준보다 감도가 높은 필름(이스트먼 400T 5294)을 사용해 촬영한 작품이다 보니 고감도 필름의 특성상 거친 그레인이 노이즈 수준으로 들끓는 게 정상인데, 눈에 거슬리는 그레인을 줄이려는 DNR 조정의 정도가 높은 편이라 때때로 인물 얼굴을 비롯해 전함 술라코의 외부 장갑과 같은 사물의 표면이 필름 촬영작치고는 매끄러워 보이고, 여기에 윤곽선 강조 처리가 더해지다 보니 전반적인 디테일 캐치력이 올라간 점은 좋지만 피사체 주변부에 잔상이 더께 끼는 헤일로(halo) 현상도 종종 노출됩니다. 20세기 폭스가 남아있던 시절 발매된 <에이리언 2> 블루레이 구판(앞서 밝혔듯 이 역시 당시 기준으로 후보정 처리를 가미한 판본이었습니다만)과 비교해, 13년 후 더욱더 디지털 룩에 심취해버린 카메론의 취향에 ‘최적화’된 신판 UHD보다 선명감은 덜해도 원본에 가까운 균일하고 유기적인 그레인 표현을 보여준다는 점이 실로 아이러니하달까요.


분명 파크 로드의 AI 딥러닝을 적용한 리마스터링은 (일각에선 재앙으로까지 여겼던) 밀랍 인형이나 고무 재질의 사물 표면을 보는 것처럼 피부나 의상의 질감을 평면적으로 밀어버린 면면을 자주 노출했던 <터미네이터 2>의 4K 리마스터링 때보다는 크든 작든 필름의 입자감을 어느 정도 살리면서 분명히 진보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디지털 후보정의 부작용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트루 라이즈>의 경우는 이번에 복원된 카메론 작품의 UHD 중 AI 리마스터링의 부작용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어떤 장면은 <타이타닉>처럼 제법 알싸한 필름의 감성을 보여주다가도 다음 장면에서는 인물의 피부 질감과 잔주름이 밀려나가고 머릿결이 뭉쳐 보이는 식으로 화면의 질감이 일관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구간이 여럿 관찰됩니다. 화면의 명암 대비와 윤곽선 선예도를 끌어올리고 그레인을 억제하는 기조는 동일하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조정값을 다른 영화보다 높게 잡은 것인지 종종 AI 이미지를 자주 보다 보면 느껴지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눈에 띄게 자아내는 편. <어비스>와 마찬가지로 기존에는 DVD 밖에 없던 작품이다 보니 UHD(또는 동일 마스터를 적용한 디즈니 플러스의 스트리밍 서비스)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합니다만.
AI를 이용한 업스케일링이나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DNR이나 선예도 증가를 포함한 영상의 조정값을 전문적인 스튜디오 기술진이 적용 강도를 조정하든, 아니면 AI의 자체적 판단에 맞기든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AI 알고리즘의 이미지 판단·해독 능력의 유연성이 부족한 아직까지는 매 프레임을 일일이 만지는 기존의 스튜디오 기술진의 작업 결과물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중소규모 영상제작사의 AI 작업물보다 확연히 수준이 높고 여러모로 신경을 쓴 편인 제임스 카메론 작품의 4K 역시 피해 가지 못한 함정입니다. 다만 이번의 UHD가 AI 리마스터링 공정이 어떠한 기술적 한계를 안고 있으며 추후에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가야 하는가를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합니다. 현재로서는 AI 딥러닝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어렵고 전문 인력의 적절한 감수와 조정이 필요하며, 당분간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이타닉>의 경우처럼) 원본 필름의 본질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터치로 ‘화장감’을 더해주는 식의 AI 리마스터링은 참고할 만한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