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씨플 재개봉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하면 당장 보러 갈 영화, 실제로 재개봉하는 영화들을 소개해왔다. 이번에 만나볼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월 4일 재개봉)다.

원더풀 라이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데라지마 스스무, 나이토 다카시, 나이토 다케토시, 카가와 교코 개봉 2001년 12월 8일 재개봉 2018년 1월 4일 상영시간 118분 등급 전체 관람가

원더풀 라이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테라지마 스스무

개봉 199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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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한국의 영화팬들이 일본 감독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일 것이다.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가 재개봉한다. 그의 초기작으로 분류해도 좋을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더불어 당신의 인생을 돌아볼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과 상실,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죽음, 그 이후
<원더풀 라이프>는 지금 극장가를 장악한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처럼 사후세계를 다룬 영화다. <신과 함께>에서는 망자 김자홍(차태현)이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받는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재판이 없다. <신과 함께>의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도 없다. 망자들은 천국으로 가기 전 중간 지대인 ‘림보’에서 일주일을 보낸다. 이곳은 오래된 대학 캠퍼스 같기도 하고 병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일주일이다. 마침 계절은 첫눈을 기다리는 늦가을이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망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단 하나의 추억을 선택한다. 림보에서 일하는 면접관들은 그 추억을 영화로 만들어준다. 추억이 담긴 영화를 보며 망자들은 저 세상으로 간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 고레에다 히로카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자주 만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TV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이다. 에이즈 환자인 게이의 삶을 담은 <그가 없는 8월>(199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 주인공처럼 기억장애를 겪는 환자를 조명한 <기억을 잃어버린 때>(1996)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화법을 도입한 문제작으로 주목받은 다큐멘터리다.

고레에다 감독은 <원더풀 라이프>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추억을 들려준다. <원더풀 라이프>에는 죽은 이들의 인터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망자들은 화면의 정중앙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화면 구도는 아니다. 보통의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은 대화 상대의 어깨가 살짝 보이는 화면 구도다.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 컷들은 하나의 시퀀스로 모이면서 영화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고레에다 감독은 “처음엔 그들의 이야기를 훔치려는 생각이었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들의 표정, 그 진정성을 따를 수 없을 거라 판단해 직접 출연시키고 이야기를 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원더풀 라이프>에 출연한 배우들은 전문 배우가 아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들의 진짜 추억 이야기를 담아냈다.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답다.

내 인생, 단 하나의 추억
<원더풀 라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선택한 추억은 다채롭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어린 시절, 전차에서 느꼈던 바람의 감촉, 좋아하는 여학생의 가방에 달린 방울 소리 등 감각적인 기억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대나무숲으로 피난 가서 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선택했다. 오빠가 사준 빨간 원피스와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던 소녀 시절을 기억해낸 할머니도 있다.

일본의 특수성이 담긴 기억도 있다. 한 할아버지는 2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굶어죽을 지경이 됐을 때 그는 미군의 포로가 돼 담배를 얻어 피우고 밥을 얻어먹었다고 말한다. 듣고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나는 추억도 있다. 허세가 많은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났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린 여학생은 디즈니랜드에 놀러 간 기억을 선택했다가 엄마의 무릎을 베고 귀 청소를 받던 따스한 추억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 컷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만히 창밖만 응시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영화가 아닌 실제의 삶에서 가장 죽음에 가까워 보이는, 말하자면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이 할머니의 표정은 예사롭지 않다.

추억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정년 은퇴한 평범한 회사원 와타나베(나이토 다케토시)는 추억 선택의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의 인생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기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
다양한 인물들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 말고 <원더풀 라이프>가 담아낸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장면으로 이뤄진 전반부가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기를 발휘해낸 지점이라면, 엇갈리는 사랑의 감정을 담아낸 후반부는 극영화 감독으로 전향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와타나베의 담당 면접관인 모치즈키(이우라 아라타)는 상사를 찾아간다. 그는 담당을 바꿔주기를 요청한다. 와타나베의 인생이 담긴 영상 속 아내 교코를 보고 난 뒤의 일이다. 견습 면접관 시오리(오다 에리카)는 그의 태도에서 뭔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시오리는 모치즈키를 좋아하는 듯하다. 와타나베는 모치즈키에게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서 와타나베는 모치즈키의 기일을 아내 교코가 홀로 챙겼다고 썼다. 사실 와타나베의 아내 교코는 모치즈키와 약혼한 사이였다. 모치즈키가 전쟁에서 죽고 난 뒤 와타나베와 결혼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모치즈키, 약혼자를 가슴에 묻은 아내와 평생을 함께한 와타나베. 다소 아이러니한 두 남자의 만남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모두 진실된 것이고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사실 면접관들은 자신의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 이들이다. 와타나베의 편지를 읽은 모치즈키는 몇 해 전 림보를 다녀간 교코가 선택한 추억 영상을 시오리와 함께 찾아본다. 영상을 보고 난 모치즈키는 드디어 자신의 추억을 선택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후 자신의 영화에서 <원더풀 라이프>의 엇갈린 사랑과 유사한 정서를 자주 보여줬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물에 빠진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죽은 준페이의 기일을 맞는 가족을 보여준다. 요시오는 준페이의 기일에 매년 찾아오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병원에서 바뀐 친아들을 데려온 아버지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의 고민을 담았다. 그는 6년간 키웠던 아들을 쉽게 잊지 못한다. 세상에 쉬운 인생은 없다.

걸어도 걸어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아베 히로시, 나츠카와 유이, 키키 키린, 하라다 요시오

개봉 200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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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릴리 프랭키, 오노 마치코, 마키 요코, 니노미야 케이타

개봉 201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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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남기는 기억
와타나베는 결국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했다. 중년이 된 두 사람이 결혼한 이후 처음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날이다. 처음 두 사람이 맞선을 통해 만났을 때 ‘취미가 뭐냐’는 교코의 질문에 잔뜩 긴장한 와타나베는 ‘영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중년이 된 교코가 당시 상황을 말했지만 와타나베는 당시에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은 함께 영화를 보자고 말한다.

<원더풀 라이프>는 인생의 추억을 영화로 만들어준다는 점에 서 꽤나 의미심장하다. 와타나베가 돌려본 신혼 시절의 영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늘 언급되는 일본의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 감독 특유의 화면구도인 다다미 숏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일본의 좌식문화에 맞게 낮은 앵글로 촬영하는 방식의 다다미 숏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상징과도 같다. 이 장면은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고레에다 감독의 오마주라고 봐도 좋겠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재밌다. 금요일, 망자들의 추억이 촬영되는 날이다. 세트에서 진행되는 촬영은 모든 게 아날로그다. 비행기를 조종하던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서 솜으로 만든 구름이 동원된다. 망자는 실제와 비슷하다면서 만족감을 표한다. 면접관들도 현장에 일손을 보탠다. 배우로 참여하기도 한다. 가만히 보면 면접관들은 영화의 스태프와 다를 바 없다. 영화를 기획하는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소품 담당이기도 하고 로케이션 담당이기도 하다. <원더풀 라이프>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영화다.

누군가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어낸다는 착안은 어쩌면 고레에다 감독이 품고 있는 영화에 대한 경외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영화는 관객이 경험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한 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그렇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그렇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