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있던 자리는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그 누군가가 대중 앞에 섰던 인물이라면 그 자리가 더욱 비어보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지난 7월부터 극장이나 OTT를 둘러보며 '뭐 볼까' 고민했다면 이 난 자리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현재 박태주 역으로 <행복의 나라>에서 얼굴을 비추고 있는 배우 이선균을 말이다.
이선균은 2023년 1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상영 중인 <행복의 나라>, <잠>을 연이어 촬영한 그는 드라마 <법쩐>으로 오랜만에 지상파 드라마에 복귀했다. 그는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의 출연을 준비하고 있다가 2023년 10월 마약 투약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고, 작품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경찰 소환 조사에 응해 포토라인에 섰고, 결국 3차 소환 조사에 참석하고 4일 후, 숨진 채 발견됐다. 투약이 확실해보였던 의혹 초기와 달리 약물 검사 음성 등 투약 혐의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으나 사생활 관련한 정보들이 끊임없이 언론에 유출되는 등 투약 자체가 아닌 사생활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의 죽음에 가타부타 이야기를 덧대고 싶지 않다. 표적 수사나 수사 과정에서의 비정상적 자료 유출, 그의 사생활 관련한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가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인지를 논하는 건 기껏해야 '영화'라는 것으로 밥벌이하는 것만 공유하는 타인으로서 선 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의 사생활 또한 감히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선균이란 배우가 맞이한 마지막에 대해 뭐라도 쓰고 싶은 건,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는 그의 종착점을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벌써 20년을 우리 앞에 배우로 선 이선균. 그의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짜증' 혹은 '호통'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드라마 <파스타>, 영화 <화차>, <내 아내의 모든 것>, <끝까지 간다> 등 그의 대표작들 때문일 텐데. 그러나 그의 작품을 돌아보면 그렇게 폭넓은 연기를 보여줬던 그에게 새삼 놀란다. 누구보다 올곧게 환자만을 바라보던 최도영(<하얀 거탑>),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누군가의 쉼터가 돼준 최한성(<커피프린스 1호점>), 무너지기 직전인 한 청년에게 기점이 돼주는 아저씨 박동훈(<나의 아저씨>), 예의 바른 듯하지만 어딘가 고까운 박동익(<기생충>)까지. 그의 얼굴은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2023년은 그에게 새로운 전환기가 될 만한 찬스였다. 원래대로라면 그해 개봉했어야 할, 그러나 최근에야 도착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행복의 나라>를 제외하더라도 2023년 그의 출연작 <킬링 로맨스>와 <잠>은 단언컨대 배우 이선균이 보여줄 앞으로의 얼굴들이 얼마나 확장될 것인가 보여주는 전조와 다름없었다.

<킬링 로맨스>에서 그는 전직 여배우 황여래(이하늬)를 쥐락펴락하는 재벌 조나단 나를 연기했다. 전체적으로 과장된 스타일을 고수하는 <킬링 로맨스>에서 이선균 또한 한껏 목소리톤을 높여 "잇츠 귯~!"을 외치는 그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여래에게 모멸감을 주며 학대하는 모습에서는 자아도취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과시하며 관객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만화적 과정과 현실적 위압감, 그 상충하는 모습이 이선균 안에 녹아들어 조나단 나는 '존나' 뇌리에 남고 만다.

반면 <잠>에서의 그는 한층 안정적이다. 그가 연기한 오현수는 자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이상행동을 하는 수면장애에 시달리지만, 아내 정수진(정유미)가 겪을 고통을 부각시키고자 한걸음 물러나있는다. 그러다가 수진이 점점 그의 수면장애가 초자연적 이유라는 것에 매몰되기 시작할 때, 그는 관객을 이끌고 이 미스터리의 한가운데에서 발생하는 감각들을 받아낸다. 현수의 수면장애에서 수진의 광기로 공포의 중심이 전이될 때, 거기엔 유재선 감독의 영리한 연출뿐만 아니라 두 배우의 열연이 보탬이 된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주는 이선균의 마지막 표정은 '배우 이선균'과 '배우 오현수'와 맞닿으며 기묘한 상승효과를 내 작품의 진의를 되짚게 한다.
그리고 올해 개봉한 영화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이하 <탈출>), <행복의 나라>를 이 궤적에 놓는다면, 이선균이란 배우의 선택지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보나 마나 시나리오부터 범상치 않았을 <킬링 로맨스>, 재난영화와 SF적 상상력을 결합한 <탈출>, 한 사람의 재판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그림자를 직시하는 <행복의 나라>, 오컬트와 미스터리로 관계의 붕괴를 조망하는 <잠>까지. 장르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겹치는 기색 하나 없는 일련의 출연작에서 <기생충>의 성공에 멈추지 않고 배우로서의 2장을 열어젖히려는 이선균의 의지를 엿보는 건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촬영순으론 마지막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도착한 최후의 영화 <행복의 나라>는 그의 마지막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지점이 있어 더욱 안타깝다. 그가 맡은 박태주는 실존인물 박흥주 소령을 극화한 인물인데,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통령 암살의 공범으로 지목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무고함에도 명령에 따른 군인으로서 강직함을 고수하는 박태주를 그리면서 권력을 탐하는 이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던 것으로 묘사하는데, 관객 입장에선 사건 자체가 아닌 외적 요소로 극한에 내몰렸던 이선균의 상황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일 수밖에 없다.
교체 소식을 의식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선균의 하차 후 조진웅이 합류한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도 이선균의 기운을 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끝까지 간다>를 성공시킨 주역이자 동료 배우로 친분이 두터웠고, 조진웅은 드라마 출연을 결정하고 이선균에게 연락했을 정도로 그를 대신하는 것을 의식했다. 그렇게 조진웅이 의식하고 연기에 임해서인지 아니면 최초 캐스팅이 이선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소시민적 면모가 유독 돋보이는 1화의 백중식은 조진웅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이선균의 연기가 묻어있는 감각을 느꼈다. 한편으론 조진웅의 연기가 캐릭터에게 필요한 면을 보충할 정도로 더 무르익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이선균은 <탈출>과 <잠>으로 2023년 칸영화제 레드카펫 참석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영화가, 작품이 세계 영화인을 만나는 것이 꿈같은 일이다라는 표현이었을 텐데, 그 농담이 비극이 되고 말았다. 특히 <잠>이 다양한 감독들에게 '훌륭한 영화'로 지목받는 상황이기에 이선균의 연기는 지금보다 더 높게, 더 멀리 날아갔을 텐데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이선균의 영화 두 편이 개봉한 2024년 여름, 이 아쉬움이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