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영화가 탄생한 이래로 영화는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수차례 발전을 거듭했다. 무성 영화의 시기에 수많은 영상 문법을 구축해 기반을 다지고, 1927년 최초의 토키(유성) 영화 <재즈 싱어>가 만들어지면서 이윽고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1950년대에는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하고, 193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의 컬러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보급화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80년대에 선을 보인 디지털 영화는 100년 가까이 영화산업을 지배해 온 셀룰로이드 기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처럼 2000년대의 영화는 과거의 영화가 이제껏 다져온 토양 위에서 여러 기술을 활용하고, 영상문법을 참고하며 만들어졌다. 그중에는 과거의 유산을 오마주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주하며 또 다른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해 낸 영화도 있다. 미국의 주력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는 잘 다져진 토양 위에서 시도된 2000년대 영화의 과감한 미학적 도전을 되새기기 위해 21세기의 첫 10년을 정의하는 최고의 영화 100선을 뽑았다. 선정 범위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개봉한 영화에 한정한다. 그중 몇 편의 영화를 골라 소개한다. 100선 목록은 해당 매체 사이트 페이지(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 그리고 둘>(2000)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는 양가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그의 타이페이 3부작 <타이페이 스토리>(1985), <공포분자>(1986),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은 당대 대만의 풍경을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인물들은 거짓과 모순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면면을 세심하게 비추어 비애와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중에서도 <하나 그리고 둘>은 삶에 대한 희망적인 시선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영화는 한 가정의 일상을 관찰해 대만의 현대사를 맥락화한다. 각 가족 구성원의 일상은 얽혀 있는 각각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8살 소년 양양(조나단 창)은 아빠 NJ(오념진)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양양의 사진 속에는 30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 아빠, 삶에 대한 회의감과 슬픔에 빠져 집을 떠나게 된 엄마(금연령), 외할머니의 사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누나(켈리 리)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뒷모습을 찍는 양양의 사진은 삶의 진실을 좇는 에드워드 양의 영화적 메타포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14살 소년 샤오쓰가 집착과 오인에 사로잡혀 놓아버린 손전등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양양의 카메라로 바뀌어 진실을 비추어 준다.
<에이 아이>(2001)

영화 <에이 아이>는 스탠리 큐브릭과 스티븐 스필버그 두 거장 감독의 마력이 스며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1983년에 브라이언 올디스 작가의 단편 소설 「슈퍼토이의 길고 길었던 마지막 여름」을 접한 후 10년이 넘도록 이 단편을 영화화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원안과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90년대 중반, 이 영화의 동화적인 톤에 본인보다는 평소 절친으로 지냈던 스필버그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 이 영화의 연출을 제안했으나, 스필버그는 당시 큐브릭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큐브릭 사후 스필버그에게 90쪽 분량의 스크립트와 크리스 베이커, 600장 분량의 드로잉이 넘어간 후 스필버그는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서 영화를 완성하기로 한다. 그는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쓰고 다시 자신의 색을 입혀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에이 아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휴먼 드라마와 모험 영화 플롯의 골격에 암울한 시각디자인,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탐구하는 큐브릭의 인장이 묻어 있다.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인공지능 로봇 소년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 데이빗은 아픈 아들을 둔 헨리(샘 로바즈)와 모니카(프란시스 오코너) 부부의 집에 입양된다. 어렵게 모니카의 마음을 연 데이빗은 친아들이 회복되어 돌아오면서 이내 버려진다. 그는 슈퍼 장난감 테디와 함께 엄마 모니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모험에 뛰어든다. <에이 아이>는 피노키오 동화를 모티브 삼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관해 묻는 메타 영화다. <에이 아이>에서 데이빗은 피노키오처럼 진짜 인간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되찾으려 한다. 데이빗이 인간이 되려고 하는 마음은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려는 노력과 닮아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두 개 이상의 플롯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이다. 그의 영화 <광란의 사랑>(1990), <트윈 픽스>(1992), <로스트 하이웨이>(1996)에 나오는 붉은 커튼으로 휩싸인 방, 그가 꿈의 세계로 표현한 공간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꿈을 환상적으로 다룬 린치의 영화는 평범한 얼굴을 한 일상의 폭력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그 욕망이 꿈의 세계에서 전치되어 드러나는 다분히 프로이트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21세기 포스트모던 문학의 거장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린치 영화는 “굉장한 무시무시함과 굉장한 평범함이, 후자가 전자를 늘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로 뒤섞이는 특정한 아이러니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늦은 밤 LA 인근에 있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도로에서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다.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리타(로라 해링)는 간신히 살게 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사고 현장 근처의 한 빌라에 숨어들고, 그곳에서 할리우드 스타의 꿈을 안고 LA에 도착한 베티(나오미 왓츠)와 만나게 된다. 베티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리타를 도와주고 둘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환상성은 관련이 없는 두 요소의 초현실주의적인 연결로 새로운 의미와 영화적 느낌을 도출해 내는 린치의 필치에 편집자 메리 스위니의 느릿한 디졸브, 피터 데밍의 부드러운 촬영, 배우들의 기이한 연기의 위대한 합작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자본이 지배하는 할리우드의 위선을 밝힘과 동시에 가장 적확한 형식으로 그의 의도를 표현한 걸작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씨네필의 애호를 받고 있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매그놀리아>(1999)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펀치 드렁크 러브>(2002)로 칸영화제 감독상, <마스터>(2012)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으며 세계 3대 영화제의 상을 모두 거머쥔 시네아스트다. 동시에 영화광이기도 한 그의 영화는 197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들인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알트먼, 시드니 루멧의 영향을 받았다. <매그놀리아>에서처럼 족히 두세 편의 영화에 나올 만한 수의 등장인물을 거느리며 다양한 에피소드를 펼쳐 보이는 재주는 로버트 알트먼의 극작술과 닮아 있고, 화려한 영상 테크닉은 마틴 스코세이지와 브라이언 드 팔마를 떠올리게 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연출 기법은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화려하며 가장 P.T.A.스럽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배리 이건(아담 샌들러)은 항공 마일리지를 경품으로 내건 푸딩을 잔뜩 사 모으며 일상을 보낸다. 어느 날 그는 사무실 근처에서 우연히 레나(에밀리 왓슨)를 만나고, 둘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두 남녀의 사랑은 배리가 그녀에게 빠져들기 전에 걸었던 폰 섹스로 인해 순탄하지 않게 흘러간다. 폰 섹스 한 번에 ‘매트리스 맨’(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일당에 잘못 걸려든 배리는 그녀와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담판을 지으러 간다. 화려한 카메라 무빙과 빠른 속도감의 편집은 영화의 긴장도를 높이고, 구획된 공간의 이미지는 억압당하는 인물의 불안감을 표현한다. 동시에 <펀치 드렁크 러브>는 화려한 원색으로 사랑스러운 톤앤매너를 자아내고, 이에 현악기를 이용한 존 브라이언의 음악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배가시키면서 이 영화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