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는 시즌 2에 접어들며 인물들의 행동과 판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재미를 확보해 나가는데, 선자(김민하)와 한수(이민호)의 관계에 더해 자꾸 눈길이 가는 관계가 바로 경희(정은채)와 창호(김성규)의 애정 전선이다. 선자의 형님이자 신분이 높았던 경희의 경제적 추락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한국 역사의 큰 변곡점에서 가장 크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물일지 모른다. 고결한 혈통과 품새를 유지해 온 경희는 마치 ‘온실 속의 화초’같아 보이지만, 무너져내리는 역사 안에서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가진 여성 선자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자생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남편을, 가부장적인 위계질서 안에서 존중하는 한편, 삶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 현장에 기꺼이 뛰어들어 생계의 일원으로 몫을 다한다.
그런 경희 앞에 나타난 창호의 존재 역시 변화하는 시대의 맥락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한수의 하수인으로, 선자네 가족을 지키라는 명령에 따라 선자네 식구와 함께 살게 된 그는 뼈대 있는 가문의 딸인 경희와 달리, ‘근본 없이’ 자라 여기까지 흘러온 인물이다. 정상적인 가치관으로 작동했던 시대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대상이지만, 세상은 뒤집어졌고 그렇게 달라지고 있다. 창호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계급의 경희를 흠모하고, 경희는 그런 창호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선자와 한수가 만드는 통속극의 한가운데, 경희와 한수의 절절한 멜로. 결은 다르지만 거대한 변화, 격랑의 세월 앞에서 개인인 자신보다 가족의 가치가 앞서는 상황 안에서 이들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안타까움은 멜로를 뛰어넘는 <파친코>의 시대상이기도 하다. 앞선 시즌에 이어 경희의 변화를 표현한 정은채 배우와, 창호 역으로 시즌 2에 새롭게 합류해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 김성규 배우를 만났다.

시즌 1에 이어서 새 시즌이 공개됐는데요. 정은채 배우는 시즌 모두를 통과한 만큼 기대와 더불어 부담도 컸을 것 같아요.
정은채 지난 시즌 1이 정말 많은 사랑과 응원과 지지와 전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기대에 부응도 해야 하는 숙제가 모두에게 주어졌어요. 욕심이나 과한 설정보다는 시즌 1에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코드를 이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출 방향도 담백하게, 섬세하게 유지했던 것 같아요.
새롭게 시즌에 합류했는데요. 김성규 배우는 <파친코> 시리즈에 어떤 기대가 있었나요.
김성규 먼저 시즌 1을 보면서 저 역시 시청자로서 먼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작은 배역들 모두가 어쩜 저렇게 그 속에 살아 있는 인물들로 보일까 부럽기도 하고. 나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보일까 싶었어요. 준비하면서 원작도 열심히 보고, 은채 씨한테 관련 다큐멘터리도 추천받아서 봤어요. 그 상황에 있는 나였다면 어땠을까, 저라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했을지 상상을 많이 했어요. 어렵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많은 분께 도움을 많이 받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디션 경험도 궁금한데요.
김성규 사실 오디션을 통과할지 기대가 전혀 없었어요. ‘아무래도 나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은채 씨를 실제로 보기 전에 너무 멋진 분이라 제 머릿속에서 저와 매치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실제로 만났을 때는 더 먼 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웃음)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내가 안될 거 같다 겁이 나는 상황이기도 했어요.
정은채 나랑 반대네. (웃음) 창호 캐릭터가 누가 될지 배우들 모두 기대하고 궁금했는데, 전 그때 성규 씨가 오디션 하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이 되겠구나.’ 바로 감이 왔어요. 굉장히 희한한 경험이라, 놀랍고 좀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죠. 주요 캐릭터의 경우, ‘케미스트리 오디션’을 보는데, 제 캐릭터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캐릭터라 제가 그 오디션 현장에서 호흡을 맞춰 보는 형식의 오디션이에요. 연기력을 판단하는 오디션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어울리는지, 좋은 느낌이 오고 가는지, 기대하지 않았던 호흡을 발견하고 판단하는 자리죠.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지켜본 김성규 배우는 어땠나요.
정은채 억지로 더 빨리 친해지려고 과한 노력하지 않고 항상 자연스러운 텐션을 보여주는 배우였어요. 현실에서도 현장에서도. 적당한 거리감과 친근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부터 이 사람은 이 배역과 너무나 어울리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항상 든든하고 믿음직한 모습이었고요.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자신을 맞춰 나간다는 점에서, 경희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변화가 큰 인물이기도 한데요. 정은채 배우는 어떤 캐릭터로 해석하셨나요.
정은채 경희는 응축된 아픔이나 서글픔이 많은 캐릭터라 시즌 1에서도 담담하려고 하지만 불안감 같은 것이 비집고 나오는 인물이었어요. 선자를 통해서. 시즌 2에서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그런 환경에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고요. 뭣보다 시즌 1에서는 경희가 척박한 상황에서도 꼿꼿하고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해서 아프지만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집안에서도 정갈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유지했다면, 이번 시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해서 의상도, 얼굴도 생활감이 많이 드러나는 걸 표현하려고 했어요.

시즌 1과 시즌 2 사이 7년의 격차가 있는데요. 세월의 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것도 과제였어요.
정은채 모두의 가장 큰 숙제가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생긴 표면적인 변화였어요. 외모의 변화 같은 것이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촬영은 시즌1 이후 2년 후라, 저희 역시 변화하긴 했죠. (웃음) 하지만 더 극적으로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프리 프로덕션 하기 전부터 많은 테스트를 해봤어요. 자연스러운 개성들이 여전히 드러나면서도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은 듯한 느낌을 가져가야 한다는 숙제가 주어졌는데, 이 부분은 많은 전문가가 애를 쓰면서 노력을 해주셨고 그래서 잘 나온 것 같아요.
김성규 배우는 창호를 어떤 인물로 파악하셨나요.
김성규 창호는 고한수(이민호) 밑에서 뒤치다꺼리하는 인물이죠. 시키면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시행하는 캐릭터이고 그 일 중의 하나가 선자네 가족을 돌보는 일이라 거기 충실한 인물이에요. 이런 관계성이 제가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와 제일 달랐던 점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대로 장르물 안에서 강한 에너지를 보여주었던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 안에서 세심한 연기를 보여주는데요. 김성규 배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해주는 도전이기도 한데요.
김성규 기존에 연기했던 작품들이 조금은 관계성을 맺을 필요가 없는, 조금 날카로운 역할들이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파친코>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힘이 굉장히 신기한 것 같았어요. 관계에서 주는 메시지, 보편적인 사랑의 힘 같은 것들이 촬영하면서 저한테 도움을 많이 줬어요. 작품이 끝나고 나서 돌아보니, 좋은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어요. 이렇게 관계성이 짙고 그걸 연기하는 배우들이 일상에서 서로 교감하는 것이 작품에 많은 기여를 하는구나, 그런 부분이 연기에 많이 묻어나는구나. 이 경험들이 앞으로의 제 태도에도 변화를 불러올 것 같아요.
경희와의 관계에서 안타까운 멜로 연기를 선보이는데요. 사랑하는 이를 향한 절절한 아픔이 느껴지는 촉촉한 눈빛 연기도 인상적이었는데요.
김성규 저는 못 보겠어요. (웃음) 창호가 어떻게 보면 저랑 많이 닮아 있는 지점이 있는데 저도 참 느려요. 조심스럽고. 그러면서 쌓이는 감정들이 창호와 경희의 관계에 묻어나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서로를 원하면서도 시대와 환경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창호와 경희의 사랑은 오늘날의 가치관이나 관계와는 사뭇 다른데요. 둘의 감정의 교류를 어떻게 정의했나요.
정은채 그런 지점이 현시대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의 사랑과 욕망을 통해서 판단해서 나간다기보다, 내 가족 안에서, 나라 안에서 갖는 책임감이 크다고 생각해요. 둘 다 사랑을 선택할 때도 단순한 이성적인 관계보다는 자신들을 집어삼키는 커다란 것이 있죠. 이런 것들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쳤던 시대였고, 그 무거움이 인물들에게도 많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해요.
김성규 창호라는 사람이 특별해서, 남들과 다르므로 경희라는 사람을 흠모하거나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시대는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선택하는 게 더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대였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면 본인의 사랑까지도 표현하는 데 고민을 하게 되는 그런 시대였죠.

일본어 연기부터 모내기 장면의 연기 등 수행해야 할 과제들이 많은 현장이었는데요. 배우들에게는 어떤 현장으로 기억되나요.
정은채 모두가 많은 과제를 안고 해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특히 경북 의성에서 촬영한 농장 씬이 생각나는데요. 모내기 장면 같은 경우, 화면에서는 고요하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씬인데 실제 현장에서는 정말 더워서 찍다가 졸도할 거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촬영했어요. 논밭 안으로 들어가면 다리가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 안에서 반나절 동안 화장실도 못 가고 뙤약볕 아래서 촬영을 하는 거죠. 어려웠지만 함께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는 게 <파친코> 현장의 묘한 매력이었던 것 같아요.
김성규 현장에 모내기 장인도 오시고 그랬어요. 아 철두철미하구나. 예전 방식의 모내기와 지금은 또 다르니 고증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매번 오셔서 가르쳐 주시고. 그런 것들이 있어서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재밌었던 것 같아요.
Apple TV+, 즉 해외 프로덕션 작품인데요. 현장에서 느끼는 큰 차이가 있었다면요.
김성규 현장에서 세부적인 파트가 나뉘어 있어서 배우들의 매니저 없이 진행했어요. 배우들 모두 같은 차를 타고 출퇴근하게 되면서 더 가까워졌던 것도 있었던 거 같아요. 말 그대로 진짜 정확한 시간 안에서 주말 토요일이 되기 전에 촬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아요.
정은채 말씀대로 많은 파트들이 세분화되어 있는 게 다른 것 같아요. 시즌2는 세트가 캐나다 토론토에 있어서 그곳에서 먼저 촬영 시작했어요. 그때는 배우들이 홀로 배낭 하나 메고 가서, 학교 가듯이 또 출퇴근하듯이 현장에 갔어요. 각자의 쉬는 공간, 트레일러가 있고, 스태프가 한 명씩 다 배정되어 있어서 순차적으로 일을 하는데 한국 프로덕션과는 그런 부분들이 좀 다른 점이에요. 전문가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요. 오사카 방언을 하는 분이 항상 현장에 있어서 최대한 현실감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파친코> 현장은 정말 다국적 스태프들이 모인 곳인데, 누구 하나 백 퍼센트 확신해서 가는 게 없었죠. 배우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많고요. 밥 먹는 장면이 특히 대표적인데, 자료조사도 다들 많이 해오시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세팅인지 그때그때 의견을 반영해서 변경도 많이 했어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항상 실시간으로 열린 현장이었는데, 그런 촬영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아픈 역사를 통과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라, 연기하면서도 더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 같은데요.
김성규 아무래도 이번 기회로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더 찾아보게 된 것 같아요. 제 가족과 관련해서 그런 피해를 본 일도 있고요. 인간으로서 그런 역경을 이겨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막연하더라고요. 전쟁을 겪고,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변화하고 이런 인물들의 상황을 더 상상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정은채 시즌 1이나, 시즌 2에서 사건을 직접적 폭력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데요. 오히려 인물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상상하게 해서 우리가 인물로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치열하고 척박한 상황이 모든 캐릭터 한 명 한 명을 통해서 드러나길 바랐고 그렇게 다들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이 작품 안에 성공과 실패, 여러 흥망성쇠, 사랑과 미움 이런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데요.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현재, 우리가 어떤지를 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파친코>가 아닐까 싶어요.
시즌 1에서도 무거운 시리즈와 상반되는 흥겨운 댄스로 여는 타이틀 시퀀스 장면이 화제가 됐는데요. 시즌 2 촬영 현장은 어땠나요.
정은채 시즌 1에서 오프닝 시퀀스로 상도 받고 사랑도 많이 받아서 이번에도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며칠 동안 촬영을 했어요. 오프닝을 이렇게나 오래 촬영하나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웃음) 시즌 1에 질세라, 정말 많은 장르의 배경을 두고 종일 춤을 추고 회포를 풀 듯 그간의 아픔과 스트레스를 춤을 추면서 풀었던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정말 많이 웃었어요. 본 촬영 때는 대부분 아픈 씬이 많았는데 그날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