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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한 영화세상! 벡델데이2024에서 만나는 임순례 28년, 여성감독 뉴웨이브

주성철편집장
벡델데이2024 포스터.

 

영화와 시리즈를 보는 균형 잡힌 눈! 해마다 양성평등주간에 맞춰 열리는(올해는 9월 1일부터 7일까지) 색다른 영상매체 관람의 기준을 제시하는 행사로, 한국영화감독조합(DGK)에서 주최·주관하는 ‘벡델데이’는 2020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올해는 ‘벡델 초이스’와 ‘벡델리안’에 대한 발표 및 시상과 더불어, 9월 7일(토)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의 인디스페이스에서 여러 감독과 작가, 그리고 평론가와 함께 하는 다양한 토크 프로그램이 관객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먼저 오후 3시 ‘토크 1. 벡델리안과의 만남’에서는 올해의 영화 부문 감독상 <비밀의 언덕>의 이지은 감독, 작가상 <교토에서 온 편지>의 김민주 감독, 시리즈 부문 감독상 전고운·임대형 감독, 작가상 <졸업>의 박경화 작가, 제작자상 <힘쎈여자 강남순>의 백미경 제작자와 함께 성평등 콘텐츠의 변화를 함께 논의한다. 진행은 봉태규 배우와 이화정 벡델데이 2024 프로그래머가 맡는다. 이후 오후 6시부터 이어지는 ‘토크 2. 임순례 28년, 여성감독 뉴웨이브’ 섹션에서는 꾸준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임순례 감독의 창작 세계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본다. 패널로는 임순례 감독과 <핸섬가이즈>의 남동협 감독이 참석하며, 진행은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과 이화정 벡델데이2024 프로그래머가 맡는다. 본 행사는 무료이며 각 회차별로 벡델데이2024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사전 신청 마감은 9월 6일(금) 오후 5시지만, 사전 신청 취소 및 잔여 좌석에 한하여 현장 신청도 가능하니, 이번 주 토요일 인디스페이스를 찾아주시길!

 

 

임순례 감독과의 만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의 꾸준한 활동과 작품세계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계의 여성감독’이라는 자리를 이야기할 때, 후배 여성감독들에게 어떤 선명한 좌표나 상징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세계 여성의 날’(매년 3월 8일)을 맞아 발표한 ‘2023년 한국 영화 성인지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제작비 30억 원 이상 상업영화 35편 중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임순례 감독의 <교섭> 단 1편뿐이다. 지난해 극장 개봉한 전체 한국영화 183편을 대상으로 하면 여성 감독의 숫자가 49명(22.8%)이지만,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 상업영화 35편에 한정하자면 오직 임순례 감독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는 것. 게다가 지난해 공개된 OTT 오리지널 영화 7편에도 여성감독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처럼 여성감독에게 있어 독립영화가 아닌 이른바 상업영화로의 진입장벽은 여전히 견고하고 변화의 길은 요원하다. 한편, <교섭>을 통해 임순례 감독은 국내 여성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제작비 100억대가 넘는 액션 블록버스터 작품을 연출한 기록을 남겼다. 한국영화의 성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 벡델데이 2024가 그에게 만남을 청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게 임순례 감독의 지난 길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리틀 포레스트〉 촬영현장의 임순례 감독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1919년 선보인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기록된 이는 바로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이다. 안석영 감독의 <심청>(1937)의 주인공인 김신재 배우와 녹음 조수로 참여한 최인규 감독을 만나 편집과 스크립터 일로 영화를 시작했다. 드디어 1955년, 언니와 함께 ‘자매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차린 그는 뭇 남성들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오직 어린 딸 하나만을 키우며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간다는 내용의 <미망인>을 연출하게 된다. 박남옥 감독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을 위해 직접 밥을 하고, 갓 태어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를 업은 채 전국을 다니며 촬영했다고 한다. 이후 <여판사>(1962)를 연출한 홍은원 감독, 신상옥 감독의 아내이자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은희 감독도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을 만들었다. 이후 오래도록 여성감독의 역사는 끊긴 것이나 다름없다가 이미례 감독이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 <물망초>(1987), <영심이>(1990) 등 6편의 장편을 만들며 황량한 한국영화의 1980년대를 새로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의 변영주 감독, <세 친구>(1996)의 임순례 감독이 거의 동시에 등장하며 ‘여성감독 뉴웨이브’라 불러도 될 정도로 현재와의 접점을 만들어냈다.

 

 

〈미망인〉과 박남옥 감독(오른쪽)
〈미망인〉과 박남옥 감독(오른쪽)

임순례 감독이 데뷔하던 1990년대 초는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이 감독을 꿈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였다. 임순례 감독 역시 처음엔 영화 연출의 꿈을 접고 영문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시절 프랑스문화원을 통해 색다른 영화들을 접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여균동 감독 <세상 밖으로>(1994)에 조감독으로 참여하고, 데뷔 단편 <우중산책>(1994)을 만들면서 충무로에 입성하게 된다. 동시상영을 하는 변두리의 작은 극장에 근무하는 매표직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우중산책>은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에 유입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라 이른바 충무로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빠르게 장편 연출의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완성된 장편 데뷔작 <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세 남자 무소속(현성), 삼겹(이장원), 섬세(정희석)라는 세 친구의 이야기로, 당시 붐을 일으켰던 청춘영화의 공식을 완전히 무너트리며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인 넷팩상을 수상했고, 임순례라는 이름을 한국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다.

 

〈우중산책〉과 〈세 친구〉(오른쪽)
〈우중산책〉과 〈세 친구〉(오른쪽)

 

〈와이키키 브라더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1990년대가 되고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어 한국의 상업영화와 활성화되면서도 정작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가 없었던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2001년을 기점으로 다른 여성감독들도 여럿 등장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을 비롯해 첫 장편 극영화 <밀애>(2002)를 연출한 변영주 감독과 <집으로...>(2002)의 이정향 감독, 그리고 <질투는 나의 힘>(2003)의 박찬옥 감독까지 여성감독들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남성 4인조 밴드인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팀의 리더인 성우(이얼)의 고향인 충주 수안보로 가게 되면서 겪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청년 시절의 꿈이 이제는 고단한 현실이 되어버린 서글픔과 쓸쓸함을 담담하게 그린다. 전작 <세 친구>에 이어 ‘여성 감독의 여성 주인공 영화’가 아니라 여러 명의 남성 주인공을 연달아 등장시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황정민, 류승범 배우(왼쪽 사진의 오른쪽), 촬영현장의 임순례 감독(오른쪽)
〈와이키키 브라더스〉 황정민, 류승범 배우(왼쪽 사진의 오른쪽), 촬영현장의 임순례 감독(오른쪽)

“넌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 행복하니?”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던 주인공 성우가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성우에게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성우는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긍정하건 부정하건 간에 현재의 고단한 삶에서 그 어떤 작은 행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따뜻한 시선으로 관객 모두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얼굴을 알린 많은 배우들이 20년도 더 지나 현재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도, 뒤늦게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게 되는 이들의 큰 감동이기도 하다. 먼저 자신이 몸담았던 극단 학전의 지방 공연 중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들은 황정민 배우는, 앞서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지만 이른바 ‘주요 역할’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실질적인 데뷔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듬해인 2002년,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에 출연하면서 그는 청룡영화상 신인남자배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한국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박해일도 빼놓을 수 없다. 수안보로 간 성우가 고향 친구들을 만나고 과거 회상 장면이 등장할 때, 고등학교 밴드부인 성우의 어린 시절 역할로 박해일 배우가 등장한다. 바로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데, 고등학교 시절 실제로 아마추어 밴드 경험을 한 적 있는 그는 연주 장면들을 실제로 직접 해냈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무려 <질투는 나의 힘>과 <국화꽃 향기> <살인의 추억> 모두 개봉하며 박해일은 당시 가장 ‘핫한’ 배우가 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지만 성우 역의 이얼 배우가 지난 2022년 환갑도 되기 전에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즈음 그는 꽤 긴 공백기를 보내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막 출연 편수를 늘려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정작 극장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에 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관객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영화를 지켜내기 위해 이른바 ‘와라나고 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 개봉해 호평받았지만 극장에서 외면받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이렇게 네 편의 앞 글자만 딴 운동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우생순’이라는 친근한 약칭으로 한국 스포츠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대한민국 올림픽 2연패의 주역인 최고의 핸드볼 선수 미숙(문소리)은 소속팀이 해체되자, 인생의 전부였던 핸드볼을 접고 생계를 위해 대형 마트에서 일하게 된다. 이때 일본 프로팀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던 혜경(김정은)이 한국 국가대표팀의 감독대행으로 귀국한다. 팀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혜경은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라이벌인 미숙을 비롯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노장 선수들을 하나씩 불러 모은다. 이후 노장 선수들과 신진 선수들 간의 감정싸움이 생기고 연습 경기에서 졸전을 펼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으로 향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데 있어, 임순례 감독을 따라갈 연출자가 없는 것 같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초반부에서 쇠락한 온천 호텔을 보여줄 때 감정이입과 더불어 ‘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문득 깨닫게 된다. <우생순>에서도 2004 핸드볼 큰잔치가 열리고 있는 실내체육관 장면이 오프닝 신인데, 우승팀이 결정된 뒤에도 관중석은 썰렁하고 어울리지 않는 축포가 터진다. 승리한 선수들이 감독을 헹가래치려고 하는데, 심지어 감독이 선수들을 밀쳐내기까지 한다. 이어진 회식 자리에서 감독은 팀 해체 소식을 전한다.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미숙은 “직원이면 정직원이죠? 계약직 아니고?”라며 해맑게 묻는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거둬줄 팀도 없이 실업자로 내몰리는 비인기종목의 설움, 더 나아가 기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우리네 암담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포츠 영화에서 인물들의 정체성은 오직 ‘선수’여야 한다. 하지만 <우생순>은 선수와 더불어 ‘아줌마’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이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가 사회적으로 왜곡되어 불리는 ‘아가씨’라는 단어의 의미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제목에 그대로 쓴 것처럼, <우생순>은 스포츠 이전에 ‘삶’을 견뎌내야 하는 그 아줌마들의 존재를 오롯이 담아낸다. 사회적으로 다소 무례하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쓰기도 하고, 종종 비아냥대는 의도로도 쓰이는 그 아줌마라는 단어의 생활력을 강조하고 스포츠 영화의 강인한 체력을 덧대 ‘아줌마도 할 수 있다’가 ‘아줌마여서 할 수 있다’로 나아간다. 영화에서 그 아줌마들이 성별 갈등도 이겨내고 세대 갈등도 이겨낸다. 그러면서 아줌마를 아저씨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만든다. 영화에서 결승전을 앞두고 미숙의 남편이 약을 먹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미숙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경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미안한데, 난 포기 안 할 거거든. 당신도 포기하지 마.”

 


〈교섭〉
〈교섭〉

<교섭>(2023)

 

분쟁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는 최악의 피랍사건이 발생한다. 교섭 전문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처음인 외교관 재호(황정민)가 현지로 향하고,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을 만난다. 원칙이 뚜렷한 외교관과 현지 사정에 능통한 국정원 요원은 사건을 해결을 위한 입장과 방법이 다르지만, 탈레반이 정한 살해 시한이 다가오고 협상 상대와 조건 등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서 인질을 살려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교섭>은 지난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분당샘물교회 교인들이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복음을 전파하러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했다가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건인데,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명시하지 않았고 당시 제작진은 ‘등장인물들은 창조했고, 이야기에도 허구를 더했다’고 밝혔다.

 

〈교섭〉
〈교섭〉

임순례 감독의 흥미로운 점은, 실제 사건을 다룬 2편의 영화를 연출한 바 있는데 하나같이 200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감독 본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쾌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가령 <제보자>(2014)는 2005년 줄기세포 연구로 각광받던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논문을 조작한 것이 밝혀진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는데, 지금도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세력이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영화화 자체가 꽤 용기 있는 일이었다. 영화에서 제보하려는 이장환 박사(이경영) 연구팀의 심민호(유연석)는 윤민철 PD(박해일)에게 “피디님은 진실이 먼저입니까, 공익이 먼저입니까”라고 묻는데, 윤민철 PD는 “진실이 먼저”라고 얘기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공익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공익 혹은 국익을 다소 해치는 제보일지라도 언론은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제보자〉
〈제보자〉

<교섭>은 이미 비판받을 만큼 비판받은 집단을 다루면서도 그들을 딱히 드러내지 않는다. 일단 이런 장르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상황의 장면들을 굳이 넣지 않았다. ‘에구, 왜 저리를 갔어?’, ‘우리 혈세를 저런 사람들을 구한다고 낭비하면 안돼’라는 식으로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뉴스를 쳐다보는, 다소 작위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클리셰처럼 반드시 들어가는 장면 자체가 아예 없다. <제보자>에서 “진실이 먼저”라는 윤민철 PD의 얘기처럼, “어떤 경우라도 희생자를 안 만드는 게 이 협상의 기조 아닙니까?”라는 재호의 원칙만 서사의 중심에 둔다. 가령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한 테러리스트로 인해 인파로 가득한 거리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장면에서, 흙먼지 파편을 뒤집어쓴 재호는 전화를 걸어 “철군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시고 OIC(이슬람협력기구) 측에도 빨리 접촉하십시오”라고 얘기한다. 지금 우리가 협상 기조를 바꾸면 실수를 인정하는 거라는 상관의 얘기에도 그는 “지금 여기 상황을 보시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며,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인질들을 모두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사후 평가가 어떻든 간에 난 지금 내가 맡은 일을 해야 하는 공무원이다, 라는 그 우직한 모습이 울컥하게 만든다. 어떤 사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했느냐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당연한 공무원의 윤리가 먼저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기인,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통상부가 추구한 ‘국격’이었던 것이다.

 

〈날아라 펭귄〉
〈날아라 펭귄〉

 

돌이켜 보면, 임순례 감독은 어느덧 20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옴니버스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2003)에 정재은, 여균동, 박진표, 박광수, 박찬욱 감독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여러 명의 감독이 참여하는 옴니버스 형식은 변하지 않았는데, 임순례 감독은 그 관행을 깨고 최초로 한 편의 장편영화로 만들어진 <날아라 펭귄>(2009)의 연출자였다. 남들처럼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자식의 사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 채식만 하고 술도 못 마셔서 회사 생활이 고달픈 남자 신입사원, 흡연이 들킨 뒤 회사 생활이 불편해진 여성 사원, 늦은 나이에 운전면허를 땄음에도 차를 팔아버린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한 여사님 등 우리 주변의 공감 가득한 인물들을 다채롭게 그려내며, 기존의 무겁고 주제가 도드라지는 형식에서 벗어난 경쾌한 인권영화를 만들어 크게 호평받은 바 있다. 그처럼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와 원칙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임순례 감독이 영화로 걸어온 길이며 우리 사회의 모든 차별을 금지하고 성평등한 영화계를 꿈꾸는 벡델데이2024에 초대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