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속에서 성 노동자와 이민자의 삶을 꾸준히 그려왔던 션 베이커 감독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갖고 돌아왔다. 오는 11월 6일 개봉하는 영화 <아노라>는 신분 상승을 꿈꾸며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한 애니가 남편 이반의 가족으로 인해 결혼이 무효가 될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뉴욕의 스트리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번 영화는 성 노동자와 이민자를 향한 션 베이커의 한층 더 깊고 따뜻해진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 먼저 살펴본 <아노라>의 인상을 공유한다.

뉴욕의 스트리퍼 애니(미키 매디슨)는 자신이 일하는 클럽에서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을 만난다. 철저히 쾌락적인 삶을 사는 이반은 애니에게 매료되어 일주일 동안의 데이트 상대로 그녀를 사들인다. 애니는 매일 이반과 충동적인 사랑에 젖으며 신분 상승이라는 헛된 꿈을 품는다. 러시아에 있는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반은 미국의 영주권을 얻을 목적으로 애니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애니는 “너랑은 돈 한 푼 없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이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와 결혼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의 부모가 그들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행복했던 시간은 막을 내린다. 미국에 있는 이반 부모의 하수인 3인방이 그들의 집에 들이닥치고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하려 한다. 이반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운 존재인 자신의 부모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애니를 두고 혼자 도망쳐버린다. 그렇게 이반을 설득해서 결혼 무효화를 막으려는 애니와 반드시 둘을 갈라놓으려는 하수인 3인방의 ‘이반 찾기’ 대소동이 시작된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를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아노라>의 오프닝 시퀀스는 스트리퍼로 살아가는 애니의 삶을 낱낱이 보여준다. 붉은색 조명으로 휘감은 클럽 안에는 쾌락과 돈을 주고받는 남녀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애니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자들의 곁에서 춤을 추며, 그들의 터치를 아무렇지 않게 허용한다. 필연적으로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그곳에서 애니는 남자 이반을 만나 거짓된 사랑에 빠진다.
애니는 이반의 초대를 받고 그의 대저택에 들어선다. 이반의 호화로운 저택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탐욕이 묻어 있다. 카메라는 빠르게 양방향으로 패닝하며 저택을 훑는 애니의 시점을 보여준다. 또 빠른 카메라의 움직임은 애니가 자신이 살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오면서 느끼는 혼란을 표현한다. 이때 션 베이커 감독은 광각 렌즈를 사용해 애니의 왜곡된 시선을 드러낸다. 일그러진 이미지로 그려진 이반의 집은 화려하지만 동시에 기이하게 보인다. 그곳에서 애니는 이반과 함께 섹스와 마약, 게임, 파티 등으로 얼룩진 삶을 살게 된다.

애니와 이반의 행복한 시간은 이반의 부모가 고용한 하수인 3인방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가닉(바체 토브마시얀),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에 의해 끝난다. 그들이 이반의 집에 들이닥치면서 벌어지는 대혼란 시퀀스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부분이다. 무려 25분이나 쉴 틈 없이 사건이 휘몰아치는 시퀀스는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에서 볼법한 B급 감성 버무린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번 영화의 스타일을 언급하며 “주로 1970년대 영화들에서 영향을 받았다. 뉴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해 이탈리아, 스페인, 이마무라 쇼헤이와 스즈키 세이준의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과 감수성의 측면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서 “아나모픽 와이드 스크린으로 포착된 카메라의 움직임, 의도적인 색채 구성, 눈에 띄진 않지만 스타일리시한 조명 등 1970년대 이후 미국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를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더 깊은 곳을 내다보는 션 베이커 세계관의 변화

션 베이커는 영화의 초반에 담긴 애니의 삶을 불연속 편집을 통해 드러낸다. 그녀가 클럽에서 여러 남자를 만나는 모습은 이야기의 최소 단위인 비트(행동/반응이라는 행위의 교환)조차 이어지지 않는 파편화된 장면으로 그려진다. 또 애니가 이반과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점프컷이 빈번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션 베이커는 집요하게도 애니가 동료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조차 끊어내 버린다. 이러한 편집 스타일은 전작 <레드 로켓>에서부터 두드러졌다. <레드 로켓>에서 상식과 윤리를 상실한 포르노 배우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삶은 토막난 장면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단절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편집 방식은 성을 매개로 한 그들의 피상적인 관계와 진정한 소통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션 베이커는 <스타렛>과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이어지기까지 주로 성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포르노 산업의 부조리와 같은 성 노동자를 둘러싼 외부의 문제에 더 집중해 왔다. 동일한 주제를 파고든 그의 사유는 <아노라>에 이르러 한층 더 깊어진다. <아노라>에서 성 노동자를 둘러싼 주변의 문제는 인물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애니는 션 베이커의 영화 속 다른 인물들처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지는 않지만,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남성의 폭력적인 시선 안에 스스로 자신을 가둬왔던 그녀는 남자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상실한다. 션 베이커는 그녀가 두려움과 불신에서 기인한 편견에서 빠져나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아노라>는 성 노동자의 이야기와 함께 이민자의 이야기도 아우른다. 하수인 3인방 토로스, 가닉, 이고르는 아르메니아어를 쓰는 이민자로 설정된다. 3명의 이민자는 출신은 같지만 각기 다른 태도로 살아간다. 이반의 부모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토로스는 성당에서 사제로서 엄숙한 행사를 치르던 와중에도 이반의 엄마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뛰쳐나간다. 그는 진심을 다해 그들에게 충성하며 자신의 삶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다. 토로스의 동생 가닉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허당끼 있는 인물로 그저 형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모든 상황을 조용하게 지켜보며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나서는 이고르는 거듭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부조리를 직시한다. 또 그는 유일하게 애니를 진심으로 대한다.

애니의 삶 또한 하수인 3인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애초에 애니가 클럽에서 이반을 맡게 된 이유는 그녀가 러시아어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니는 할머니 세대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3세였고,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 살았던 그녀가 디즈니 월드에 가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아마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여전히 디즈니 월드를 꿈꾸는 그녀의 모습은 션 베이커 감독의 이전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허황된 아메리칸드림을 품은 채 마이애미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원래 이름 ‘아노라’를 숨기고 미국식 영어 이름 ‘애니’로 살아간다. 이고르는 그런 그녀에게 “애니보다 아노라가 좋다”고 말해주며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이민자 혐오 발언을 일삼던 애니는 자기와 같은 이민자 3세이지만 다른 태도로 살아가는 이고르를 보며 조금씩 변화한다. 영화는 해 질 녘 보랏빛 하늘 아래 바닷가를 걷는 두 인물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을 배경으로 잔잔히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빛나지 않는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