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오후 네시>는 가장 평화로워야 할 시기에 가장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한 부부의 이야기다. 정인(오달수)과 현숙(장영남)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며 새 집으로 이사한다.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끝내고 차를 즐기며 명상에 빠져들려고 하던 오후 네 시, 이웃집에 살고 있는 이웃이자 의사인 육남(김홍파)이 찾아온다. 정인과 현숙은 만나고 싶었던 이웃의 방문을 반기지만, 이상하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질문을 던져도 “그렇소”라는 짧은 대답뿐이다. 그렇게 그는 침묵의 2시간을 보내고 오후 여섯 시에 집을 나간다. 정인과 현숙은 그저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며 허허 웃지만, 한동안 볼일 없을 것 같았던 육남이 그 다음날부터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집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정인과 현숙은 서서히 공포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아끼는 제자 소정(민도희)이 집을 찾기로 한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아내의 정체를 숨기고 있던 육남이 저녁 식사 자리에 아내 새라(공재경)를 데려오기로 한다. 도대체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여의도>(2010), <코인룸>(2014), <악몽>(2020) 등을 쓰고 연출한 송정우 감독은 아멜리 노통브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 주로 직접 시나리오를 써오던 송 감독은 원작의 ‘집’이 전해주는 공간의 밀도에 호기심을 느끼게 됐다. 오달수, 김홍파, 장영남이라는 베테랑 배우들이라면 그가 구상한 이야기를 절묘하고 몰입감 넘치게 구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되뇌게 하는 상황 속에서, 철학과 교수 정인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아멜리 노통의 원작에도, 말 없는 이웃의 정기적인 방문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고뇌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즉각적인 고민으로부터 그 상황이 던져주는 함의와 화두는 결코 가볍지 않다. 타인의 존재와 시선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는 상황, 그리고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마음처럼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 관객에게도 여러 질문거리들을 던져준다. <오후 네시>는 지난 9월 개봉한 <베테랑2>와 더불어 배우 오달수의 3년 만의 출연작이다.

최근 출연작 <베테랑2>가 7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제 곧 마지막 무대인사를 갖고 쫑파티를 한다. 그동안 따로 무대인사는 함께하지 못했는데 전편을 함께 한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동료 배우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쁜 일이다. 류승완 감독이 정말 복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후 네시>는 <대배우>(2016) 이후 두 번째 단독 주인공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두 달 정도 촬영했다. 송정우 감독이 맨 처음 제안했을 때, 오후 네 시에 늘 방문하는 이웃집 남자 ‘육남’ 역할을 부탁할 거라 생각했다. 독특하고 미스터리한 캐릭터인데다가 무엇보다 대사량이 적어서 할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 ‘정인’ 캐릭터라고 해서 좀 놀라긴 했다. 그걸 신선하게 바라봐주는 관객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쭉 읽어나가면서는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 원작을 김해곤 작가이자 배우이자 감독이 잘 각색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해곤 작가와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2005)에서 같은 소굴에 있는 역할로 함께 출연한 인연이 있다.

초반부의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다들 육남과 같은 정기적인 불청객을 마주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게 된다.
사실 나는 주인공 정인보다 더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훨씬 더 난감할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고민만 할 것 같다. 원작에서는 정인이 라틴어 교수인데 영화에서는 철학과 교수다. 그러다 보니 단순명료하게 끝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받아들인다. 그게 원작과 다른 영화의 재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 제목처럼 특별한 일이 없는 날 오후 네 시에는 보통 무얼 하나.
그동안 주로 고향 집에서 지냈는데, 아마도 거의 술을 마시고 있는 시간이다.


<오후 네시>는 오달수와 장영남, 그리고 김홍파 배우까지 3명의 베테랑 배우가 팽팽하게 끌고 가는 드라마다. 두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평소 장영남 배우를 현장에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진짜 현재의 작품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늘 성실하고 작품에 딱 붙어있는 배우라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게다가 이번 작품에서는 부부 역할이었기에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또 이게 번역극이고 블랙코미디다 보니까, 입에 잘 붙지 않는 대사들을 감독과 상의해서 입에 맞추는 작업을 길게 했다. 김홍파 선배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두 배우 모두 극단 목화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목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기도 했는데, 김홍파 선배는 당시 연극 「자전거」에서 굉장히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다. 현장의 맏형이면서도 늘 오픈마인드인 선배여서 역시 큰 힘이 됐다. 다른 두 배우 얘기도 하고 싶은데, 육남의 아내 ‘새라’로 출연한 공재경 배우는 캐릭터와 달리 워낙 털털하고 붙임성이 좋다. 역할 때문에 개봉 때까지 꽁꽁 숨겨 둘 수밖에 없는 배우였는데, 막판의 반전 혹은 복수의 중심에 있는 배우라 눈여겨 봐줬으면 좋겠다.


철학과 교수 캐릭터를 위해 송정우 감독과는 어떻게 소통했나.
송정우 감독은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자유롭게 해보라고 자리를 펼쳐주는 스타일이다. 이 영화는 배우가 자칫하면 감정적으로 오버할 수 있는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그런 장면들에 대해서는 컨트롤을 잘 해주셨다. 나 같은 경우는, 장소가 고정되어 있고 학자로서 관객이 난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들이 꽤 있다. 가령 육남이 재차 방문했을 때, 정인이 중국의 분류학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괴롭히기 위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이 있다. 일단 분량 자체가 어마어마할뿐더러 내가 대사를 외는 데도 사실 한계가 있어서, 그 상황의 의도만 보여주는 걸로 하고 속도감 있게 가자고 했다. 원작의 라틴어 교수 설정을 철학과 교수로 바꾼 데도 어느 정도 그런 이유가 있다. 후자가 좀 더 현재적이고 상황의 대처에 대한 사변적인 고민이 더 크게 와닿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로 집의 거실이라는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단조로울 수 있는데, 감독님이나 촬영감독님이 아이디어를 많이 내셨다. 가령 나와 육남이 가운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부감으로 촬영해서 일직선으로 만들어 시곗바늘처럼 돌리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오후 네시>는 정인이 집착에 가깝게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을 배경으로 굉장히 연극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과거 작업했던 연극 생각이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어떤 작품이 떠오르나.
영화건 연극이건 나는 주로 주변부 인물을 연기해왔기 때문에, 이처럼 ‘가방끈이 긴 캐릭터’라는 점에서 딱 한 편 떠오르는 연극이 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을 쓴 부조리극의 대가 에드워드 올비의 마지막 희곡이기도 한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라는 작품이다. 2002년에 토니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50살의 건축가가 염소와 사랑에 빠지며 부인, 아들, 친구와의 관계가 변하는 이야기다. 염소와의 사랑을 마주하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는 내용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도덕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 등 여러 사안들에 대해 질문하는 굉장히 문제적인 연극이었다. 그때 캐릭터에 적용했던 버릇이 <오후 네시>로 이어진 것도 있다. 보통 학자나 교수들이 만년필 등 필기구를 오랜 시간 쥐고 있으니, 일상적으로 손에 땀이 많이 나서 후후 불어 말리는 습관이 있다. 사실 그건 예전에 김응수 배우를 보면서 배운 버릇이기도 하다. 나중에 이런 역할을 맡게 되면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그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볼 수 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먼저 올해 연말 12월 26일에 공개되는 시리즈 <오징어게임> 시즌 2가 있고, 내년에는 상반기에 개봉하는 라희찬 감독의 <보스>가 있다. 그 외 또 새로 들어가는 작품들도 있어서 곧 다시 인사드리게 될 것 같다.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