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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 일구어낸 평범한 인생의 아름다움

성찬얼기자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넷플릭스가 신작 다큐멘터리 한 편을 공개했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국내에선 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이 다큐멘터리, 무슨 내용일까. 넷플릭스라는 브랜드와 '비범한'이란 제목에서 오는 분위기를 고려하면 범죄나 기상천외한 인생사를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평범하지 않은 질환을 갖고 태어난 평범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이다. 그의 인생이 왜 평범하지 않고 비범한 걸까. 그에겐 가장 가까운 가족도 몰랐던 또 다른 인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의 플레이어 마츠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의 플레이어 마츠

영화는 먼저 한 청년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마츠. 영화 제목이 호명한 '이벨린'이 바로 그이다. 마츠가 이 다큐의 주인공인데 왜 이벨린이 제목에 들어갔는지는 영화가 차근차근 설명한다. 마츠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병을 가졌다. 뒤셴(국내에선 보통 듀켄씨라고 표기한다)이란 근육 질환은 그의 몸을 차근차근 갉아먹는다. 뒤셴은 근육의 성장을 억제할 뿐더러 근력을 저하시키는 병이다. 성장하면 할수록 마츠는 점점 더 왜소해지고 나중에는 휠체어와 호흡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즐긴 건 컴퓨터 게임이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 마츠를 가족들도 말리지 못한다. 걸을 수도, 뛸 수도, 무엇 하나 남들처럼 할 수 없는 그에게 유일한 즐길 거리임을 알고 있으니까. 열 몇시간이나 컴퓨터 앞에 있는 그를 부모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마츠가 25살이 되던 해, 그는 세상을 떠난다. 가족들은 그가 생전 운영하던 블로그에 마츠가 사전에 남긴 비밀번호로 접속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마츠가 떠났음을 알린다. 부고 소식 말미에 아빠 로버트의 메일 주소를 남겼다. 이 블로그를 누가 보는지 전혀 몰랐던 마츠의 가족들은 아빠의 메일함에 수많은 메일이 쏟아져 들어올 때야 비로소 마츠의 또 다른 삶, '이벨린'을 알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과 스타라이트 길드원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과 스타라이트 길드원들​

 

이벨린은 마츠가 하던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통칭 WOW, 와우)의 캐릭터 이름이다. 온라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플레이하는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온라인 게임) 와우에서 마츠는 이벨린이란 아바타를 만들고 '탐정'이란 설정으로 활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길드 '스타라이트'의 구성원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겪는다. 놀랍게도 스타라이트는 그동안 그들의 활동을 전부 기록하고 있었고(정확히는 게임이 기록하는 로그를 보관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이를 통해 와우의 그래픽을 적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이벨린의 삶을 재구성한다. 동시에 마츠가 남긴 블로그로 마츠의 삶 또한 함께 들여다본다.


만일 '비범한'(원제는 remarkable)이란 제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실망스러울지 모른다. 마츠, 그러니까 와우에서의 이벨린이 겪는 일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우정을 쌓고, 한때 큰 실패를 겪었다가 다시 재기하는 일련의 과정은 딱히 비범해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당사자 마츠의 현실과 두고 본다면 왜 이 다큐멘터리가 '비범한 인생'이란 표현을 사용했는지 그 의도가 보인다. 현실의 마츠는 냉정히 말해 그 평범한 삶조차도 영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병이 악화돼 호흡기를 착용하고 게임을 플레이 중인 마츠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병이 악화돼 호흡기를 착용하고 게임을 플레이 중인 마츠

 

그러나 그렇다고 마츠의 삶이, 이벨린의 삶이 정말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온몸의 근육이 점점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마츠는 특별 제작한 장비로 와우의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비록 세계를 뒤흔든 영웅의 행적은 아니지만 그는 이벨린으로서 와우 유저들의 게임 내 문제뿐만 아니라 현실 문제까지 해결해준다. 루머(본명 리제트)의 부모와의 갈등도, 레이키(본명 지니아)의 자녀와의 문제도 이벨린이 아녔다면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마츠는 비록 이들과 먼 곳에 사는 생전 남이지만, 아바타(화신) 이벨린으로 그들의 삶에 변화를 안겨준다. 평범하지 않았던 마츠는 비로소 누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평범함을 게임에서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일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30분 동안 같은 길을 달렸"다는 레이키의 말처럼 '비범한 이벨린'은 평범함을 갈망하는 마츠의 진심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렇게 이벨린이 와우에서 남들과 같은, 또는 좀 더 우수한 생활을 보낼 때 그의 본체 마츠는 조금씩 엇나간다. 다가오는 죽음에 아예 희망을 갖지 못하고 모든 걸 감내했던 그였기에 또 다른 세상의 자신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꼈던 것이다. 나도 이 병만 없었다면. 그 생각은 다정하고 배려심 많았던 이벨린조차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게 그의 삶에 침투한다. 그렇게 그가, 이벨린이자 마츠가 무너져내릴 때 그는 자신이 그랬듯 주위의 도움으로 다시금 스스로를 직시하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이렇게 마츠/이벨린과 그의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로 완성된 작품이다. 투병 중에도 남들에게 도움을 줬다는 한 청년의 인생이 어쩌면 '인간승리'처럼 읽힐 가능성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마츠의 위대한 면모를 말하는 동시에 그 또한 취약한 면이 있었던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까지 담아내야만이 마츠/이벨린이 보여준 평범한 삶의 비범함과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한 개인의 인간승리라기보다(물론 그렇게 읽는 것도 틀리지 않지만) 더불어 만들어가는 행복한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와우 개발사 블리자드는 게임 내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와우 개발사 블리자드는 게임 내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한편으로 한국 게이머의 입장에서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경쟁 아닌 게임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 게이머는 타국 게이머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정도로 경쟁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실력파인 동시에 반대로 경쟁 구도가 아닌 게임조차 경쟁처럼 여기는 특징이 있다(대부분 사회 분위기를 이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와우 또한 국내에선 '레이드'(특정 던전이나 보스 돌파를 위해 파티를 맺고 공략하는 것)가 중심 콘텐츠로 소환되는데,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서 보여지듯 MMORPG 또한 RPG, 즉 역할놀이의 일종이다. 그들은 공략이 아니라 그 세계를 즐기고 스스로의 세계 속 일원으로 위치시키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서구권에서도 '너드 문화'로 묘사하곤 하지만, TRPG(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 마니아들이 있는 것 또한 RPG라는 역할놀이를 즐기는 풍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국 게이머들은 게임 공략이 특화된 만큼 MMORPG로 맺어진 관계도 대부분 더 쉬운 공략이나 적 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나쁜 건 결코 아니지만 한 번쯤 우리가 즐기는 게임의 방식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 한다. (게이머 입장에서 하나 덧붙인다면, 최근 불어진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록 논란' 관련해서도 이 작품이 게임의 이점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게임을 즐기는 모두가 비정상인일 거란 무의식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영화 속 마츠처럼 장애를 가지고도 게임을 즐기고, 더 나아가 그 세계에 기여하는 게이머는 분명히 존재한다. 근 몇년간 색약이나 기타 접근성 옵션에 관심을 기울이는 개발사들와 장애인용 컨트롤러를 발매하는 기업이 늘어난 반면, 사실 게이머 입장에선 게임 속 모두가 (이벨린도 그랬듯) 평범한 모습으로 마주하기에 그런 상황을 의식하기 어려운 편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모니터 너머의 상대를 좀 더 숙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