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재외동포 수는 약 708만 명이다(2022년 12월 기준)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재외동포의 수만큼 아프고 길다. 조선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이국 땅에서 초기 이주자들은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2024년 가을, 20대 중반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한 여성 감독의 3년 반에 걸친 추적으로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로 떠난 초기 이민자의 역사가 영화로 탄생했다. 10월 30일 국내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는 <하와이 연가>(감독 이진영) 이야기다.
‘고국에서의 삶이 힘들어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등 저마다의 사연으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102명. 일부는 척박한 하와이 본토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했고, 일부는 미국 본토로, 멕시코 등지로 떠났다. 미주 한인 최초 정착지인 하와이에 현재 이들의 후손을 포함해 7만 명이 넘는 한인 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음악영화 <하와이 연가>는 미국 디아스포라 1세대 선조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가다. 하와이에서 기자, 앵커로 일하며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해야 할 일을 고민하던 이진영 감독은, 고된 타향살이 중에도 사탕수수밭에서 번 돈의 대부분을 고국의 독립자금으로 보낸 선조들의 사랑에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화에는 나라가 사라진 이후에도 거대한 태극기를 들고 하와이 거리를 행진하는 한복 입은 여성들의 모습을 비롯해, 당시를 기록한 귀중한 기록들이 가득하다. 자칫 역사 다큐로 남을 뻔했던 영화는 음악을 만나며 날개를 달았다. 후손에게 선조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이 감독의 취지를 듣고, 세계적 성악가 조수미가 음원을 무료로 제공했고,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 하와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 이그나스 장, 슬랙 키 기타리스트 거장 케올라 비머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과 한국의 예수정 배우도 선뜻 출연에 응했다.
하와이국제영화제 초청받은 이후, 미국 본토에서 수차례 상영회를 열면서 영화는 드디어 한국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건 ‘열정’ 넘치고, 추진력 ‘갑’인 이진영 감독의 힘이다. 이민 노동자로, 두 아이의 엄마로 열심히 살던 그가 남은 생을 하와이의 멋진 해변을 걷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하와이 이주민 역사를 알리는 일을 소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와이 연가>는 최초 13분짜리 단편 <무지개 나라의 유산>(2021)에서 시작해, 2편, 3편을 따로 만들어 합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패싸움> 같은 단편 4편을 찍어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이진영 감독에게서 느껴진다면 과한 해석일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을 가능케해준 선조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 말하고 싶었다는,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걸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진영 감독을 만나 <하와이 연가>가 한국에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와이 연가>가 10월 30일 개봉했습니다.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진짜 믿어지지 않아요. 제 나름으로는 하와이에서 찾은 너무나도 소중한 이야기를 기록해보자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영화감독이 되어보자는 큰 결심이 있던 건 아니었고요. 기자로서, 앵커로서 또 하와이에 사는 이민자으로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몰랐을까 하는 생각에, 기록하자는 마음으로 첫 6부작 단편 <무지개 나라의 유산>(2021)을 찍었는데, 이 작품들이 확장해 <하와이 연가>로 이어진 겁니다.
독립영화이긴 해도 제작에 들어갈 때 꿈이 있었어요. 하와이 이민자들의 이야기니까 하와이에서 상영되면 좋겠다는 꿈요. 원대하게 꿈을 꾼다면, 한국 어딘가에서 이 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죠. 121년 전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고국의 후손들이 들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CGV 단독개봉까지 길이 열려 한국 관객들이 볼 수 있게 되니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시사회 때 한국 관객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보는데 뭉클하더라고요. 감개무량합니다.
제목이 <하와이 연가>, 영어로는 ‘SONGS OF LOVE FROM HAWAI‘I’입니다. 어떻게 지은 제목인지 설명해 주신다면요.
부제가 ‘음악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사’에요. 한국인에게 하와이는 신혼여행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는 고국의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이민 선조들이 살았던 역사가 켜켜이 남아 있죠. 영화에도 잠깐 나오는데, 1915년에 커다란 태극기를 한복을 입은 여성 몇 명이서 들고 하와이 거리를 걷는 사진이 있어요. 처음 그 사진을 발견했을 때 너무 놀랐어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에, 이렇게나 많은 이민자들이 그 먼 땅에서 고국을 기억하고, 지켰던 거잖아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면서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단위라고 해요요. 그렇게 많은 선조들이 보내준 사랑이 뭉쳐서 우리가 오늘을 살고, 느낄 수 있는 건데, 그걸 몰랐던 거죠. 하와이에 서려 있는 선조들의 깊은 사랑을 어떻게 후손들에게 전할까를 고민하다가, 만국 공통어인 음악을 선택했어요. 늦었지만 그분들에 대한 답가이자, 그분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사라 생각해 지은 제목입니다.

그렇군요. <하와이 연가>는 단편 전작들로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출발한 영화인지 궁금해요.
제가 하와이에 온 후 기자로, 앵커로 쭉 일했어요. 촬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글은 좀 자신이 있었죠. 말씀드렸던 하와이 이민 선조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너무 감동받아서 글을 써둔 게 좀 있었습니다. 때마침 하와이 호놀룰루 총영사관에 외교부에서 주최하는 영상 공모글이 떴어요. 하와이와 한국을 이어주면서 알리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죠. 상금이 무려 4천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6편의 기획안을 만들어서 보냈는데, 덜컥 된 거예요!
그 6개 중 프롤로그 격인 편이 바로 <무지개 나라의 유산>이에요.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의 역사를 정말 공들여서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5편은 대담식으로 카메라 두 대 놓고 찍었어요. 구술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기도 했고요. 이 작품이 정말 잘 돼서, 하와이에서 상영도 하고 국가기록원에 등재도 됐어요. 이걸 경력으로 또 공모전에 계속 도전했죠. 영화진흥위원회까지 지원서만 거의 50개 정도 쓴 거 같네요. 그중에 7곳에서 지원을 받아서 딱 2억 원으로 찍은 작품입니다.

2억이라고요? 사실 인터뷰 전부터 계속 궁금했던 질문인데, 지금 드려야겠네요. 그래미 수상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 하와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그나스 장 악장, 슬랙 키 기타리스트 거장 케올라 비머가 직접 출연을 했고, 그야말로 세계적인, 아니 독보적인 성악가 조수미의 음원이 사용됐죠. 예수정 배우가 목소리 연기도 했고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이 예산으로 가능했던 일인가요?
리처드 용재 오닐, 김지연 같은 분들은 정말 최소한의 개런티만으로도 출연을 해주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렇게 소중한 이야기가 하와이에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같이 해보자고, 동참해 달라고 무작정 메일을 보냈어요. 다행히 이분들이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이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죠.
조수미 성악가는 도대체 어떻게 섭외하신 건가요?
‘The Water Is Wide’ 음원만이라도 꼭 영화에 넣고 싶었어요. ‘바다가 너무 넓어서 건널 수 없다’는 가사가 이민사와 너무 비슷해서 꼭 쓰고 싶었거든요. 메일도 보내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반응이 안 오는 거예요. 음반사랑 소속사를 찾아봤죠. 간신히 소속사 대표에게 연락이 닿았어요. 조수미 성악가의 동생이라더군요. 영화의 취지를 설명드리긴 했는데, 솔직히 그분도 이런 요청을 얼마나 많이 받겠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연주고, 조수미 성악가는 음원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조수미 선생님께서 <하와이 연가>의 취지를 확인하시고는 흔쾌히 음원을 쓰라고 하셨어요. 너무 감사한 마음에 소정의 사례비를 드렸더니, 제작진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안 받으시더라고요.(웃음) 120년 이민사가 연표처럼 영화에 나올 때 조수미 성악가의 곡을 함께 들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예수정 배우 섭외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아요.
원래 하와이에 있는 성우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 ‘어머니의 놋그릇’ 시나리오가 너무 아름답게 나온 거예요. <무지개 나라 유산> 찍을 때 하와이대 교수이자 작가인 게리 박이 자기 할머니인 ‘임옥순’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해줬는데요. 임옥순 할머니께서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오셨는데, 자신에게 준 그 사랑을 너무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고요. 언젠가는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도 종종 말했었죠. 제가 기자 생활을 해서 감이 있잖아요. 분명 글을 써뒀을 거 같은 거예요. 근데 물을 때마다 없다고, ‘한’에 대해서 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제작 지원이 결정되면서 연락해서 ‘진짜 없냐’고 했더니 써 두고 출간 안 한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게리 박에게 15분 분량으로 써달라고 했어요. 두어 달 만에 나온 시나리오가 정말 좋았어요. ‘한’ 부분은 영화에도 나옵니다. 임옥순이 “나에 대해서 쓰지 마”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는 대사 부분이죠. 임옥순은 어찌 보면 복잡한 캐릭터에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열일곱 소녀에게서 외유내강의 이미지가 있는 거죠. 어떤 배우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예수정 배우 목소리를 듣는 순간 ‘딱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락을 드렸더니, 길게 이야기도 안 하셨어요. “한번 해보죠. 잘 만들어보죠”라고요.
정말 추진력이 대단하십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겨우 영화를 완성하고 미국에서는 그럭저럭 관객을 만났는데도요. 한국 개봉의 문턱이 정말 높더라고요. 거의 모든 배급사에 연락했는데, 다 거절당했어요. 저희는 마케팅 예산이 ‘0’였거든요. 영진위 개봉지원도 떨어지고…. 저를 믿고 출연해준 네 분의 연주자, 간곡한 섭외 메일을 보냈을 때 단번에 “그래요”라고 말씀해주셨던 예수정 배우, 고생한 스태프들, 자료 수집과 검증에 도움 준 분들, 조수미 선생님 얼굴이 떠오르더라고요.
이제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서초구청에 찾아가서 배급업 등록을 했습니다. 1인 제작사에서 1인 배급사 대표가 된 거죠. 제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겠다고, 겁도 없이 말이죠. 등록한 날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영화관 3사에 전부 연락했어요.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최종적으로 CGV에서 단독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영화인데, 관객들이 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정말 감사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죠. 극장에서 일반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합니다.

하와이 디아스포라사 121년입니다. 말이 121년이지, 자료도 많았을 테고요. 저는 영화를 보고 한국인이 선호하는 여행지 순위에 늘 꼽히는 하와이에, 한국의 소록도 같은 곳이 있다는 걸 영화 보고 처음 알았거든요. 자료 수집부터 검증까지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121년이다 보니 자료가 어마어마했죠. 일단 하와이대 한국학센터가 잘 돼 있고요. 또 하와이 주립 기록원에도 디지털이 아닌 진짜 사진 자료들이 정말 많았어요. 100년 전 이민선에 탄 조선인 명단도 그대로 보존돼 있더라고요! 이름을 추적하면 어떤 사람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갔고, 또 칼리우파파로 갔다는 기록까지 취재할 수 있었죠. 미국 대학 중에 UCLA에도 한국학 관련 연구 자료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지개 나라 유산>에서 이민자 후손들을 인터뷰하면서 귀한 가족사진들을 많이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와이 연가>는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만들어준 영화와 다름없어요.
그럼 제작 기간은 총 얼마나 걸린 건가요?
3년 반쯤 걸린 거 같아요. 제작비 모으느라요.(웃음) 단편 하나 만들고, 또 공모전 지원하고 돈 모아서 두 번째, 그다음에 세 번째 이렇게요. 세 편 스태프가 다 다르고요, 색보정 같은 포스트 프로덕션도 또 다른 팀입니다.(웃음)

다행히 서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하와이 연가>는 1902년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향한 이민자들에 대한 옴니버스 음악영화죠. 첫 번째 이야기 ‘그들의 발자취’에서는 121년 한민족 이민사를 이루는 주요 사건을, 두 번째 이야기 ‘할머니의 놋그릇’에서는 열일곱 나이에 ‘사진 신부’(사진만 보고 남편을 골라 하와이로 온 여인을 일컫는 용어) 임옥순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하와이의 소록도라 불리는 ‘칼리우파파’에 격리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김춘석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수없이 접한 하와이 디아스포라 자료 중에서 영화의 소재로 압축하기까지 기준이 궁금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아이들이 이 영화를 학교에서 봤을 때 ‘한국인 이민 역사가 이렇구나’하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음악에 담아서요. 음악은 ‘유니버셜 랭귀지’(universial language)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이민 간 7,400명 중 평범한 남자 한 명, 평범한 여자 한 명의 삶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역사 속 윤봉길, 이봉창 같은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댔던 평범한 사람들로요. 백범 김구 선생님도 일기에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하와이 바다, 산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 소망이다”고 쓰셨지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분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제 소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겠습니다. 한참 이야기한 거 같은데, 아직 영화 속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네요.(웃음) 영화가 시작하면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CG로 구현한 흰나비가 나풀거리며 날아다닙니다. 흰나비는 영화의 끝까지 계속 나오죠. 특히 영화 후반부 공동묘지를 부감으로 잡아서 날아가는 흰나비를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흰나비는 마치 영화를 잘 따라오라는 가이드 같기도 하고요, 최초로 하와이에 도착한 선조 이민자들의 영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와, 정말…. 정확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출적인 부분으로 보면, 방금 3편을 따로 찍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무지개 나라의 유산>부터요. 이걸 장편으로 엮을 때 유기적으로 연결할 도구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떠올린 아이디어가 흰나비였습니다. 그리고 초기 이민자가 7,400명이었대요. 그분들이 처음 제물포항을 떠날 때는 ‘돈 많이 벌어서 고국에 돌아와야지’라는 마음을 먹었겠죠. 그런데 실제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나라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분들의 영혼이 흰나비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 영화에서라도 자유롭게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음악을 통해서요. 제게는 영화제작이기 이전에 그분들에 대한 헌사였던 거죠.

<하와이 연가>에는 ‘희망가’, ‘봄이 오면’, ‘오빠생각’, ‘어메이징 아리랑’ 같은 곡들이 나옵니다. 노래마다 얽힌 사연이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궁금해요.
어렸을 때 제 꿈이 첼리스트였어요. 비록 그 길을 가진 않았지만, 대학에서도 언론정보학과를 다니면서도 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매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열 때면 학교 앞에 술집, 병원 등등에 가서 후원해달라고 했거든요. 돌아보니, 그때 경험이 이번 영화제작에 도움이 되긴 했네요.(웃음)
제가 첼리스트가 되진 못했지만, 저는 음악의 힘을 믿어요. 음악이 주는 감동의 깊이는 언어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하니까요.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했는데, 인터뷰도 많고, 사진 자료들도 많다 보니 이 아름다운 스토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음악을 넣기로 한 거죠.
먼저 스토리를 썼어요. 그리고 감동을 증폭할 수 있는 음악을 넣었죠. 다른 영화들을 레퍼런스로 삼은 건 아니고요, 오히려 오페라를 참고했습니다. 오페라에는 드라마적, 청각적, 시각적 요소가 모두 있으니까요. <하와이 연가>를 Act 1, 2, 3으로 구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영화를 보시면 각 장마다 ‘스토리 3분, 음악 3분, 스토리 3~4분, 마지막 음악’ 포맷으로 구성했습니다.
스토리와의 연관성, 대중성과의 친숙성도 많이 고려했어요. <하와이 연가>는 독립영화지만 엄연히 대중영화이니까요. 거기에 역사성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2장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대니보이’는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스토리를 담은 아일랜드의 민요죠. 3장에서는 칼리우파파에 격리됐다가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분들을 음악으로나마 돌아가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고향의 봄’은 너무 알려졌다는 이유로 뺐고요. 3장까지 찍다 보니 욕심도 좀 생겨서 한국 노래를 벗어나 클래식 중에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중 ‘Going home’(꿈 속의 고향)이나, ‘알로하 오에’(Aloha Oe) 같은 노래도 넣었습니다.

다 좋았지만, 저는 1장부터 고(故) 김민기의 ‘상록수’가 나와서 좀 놀랐습니다. 고 김민기 씨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요.
‘상록수’ 가사 아시죠?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같은 부분들이요. 우리 영화와도 너무 잘 어울리는 거예요. 가진 건 없는데 정말 쓰고 싶었죠. 무작정 메일을 썼어요. 리처드 용재 오닐, 조수미 같은 분들께 처음으로 연락했던 것처럼요. ‘저는 이런 사람이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있다, 꼭 하와이에서 상영하고 싶은데, 제작비를 후원한 두 곳에서만 ‘상록수’를 쓰게 해달라, 만약 이걸로 방송을 타면 저작권료를 제대로 드리겠다’라고요. 그런데 김민기 선생님이 그런데 김민기 선생님이 답장을 주셨어요. 허락하신거죠. 너무 감사했습니다. 존경하는 작곡가가 결과물도 안 본 상황에서 이 영화를 인정해주신 거니, 큰 힘이 됐죠.
그런데 이번에 개봉하면서 다른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때는 단편이었고, 행사에 두 번 쓰는 거였는데, 지금은 관객을 극장에서 만나게 됐으니까요. 학전 관계자와 연락해 협의에 따른 금액을 잘 지불했습니다.(웃음) 김민기 선생님 안 계신 게 너무 아쉬워요. 정말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음악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 비록 김민기 선생님이 안 계시지만, 그분이 만든 음악이 하와이 이민사를 다룬 영화에 들어가 작품을 빛내주니까요. 흰나비가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처럼, 아마 하늘에서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엔딩 장면에서 이그나스 장이 ‘상록수’를 연주합니다. 한국 해군 마라도함 위에서요. 군부대도 아니고, 훈련 중인 군함 섭외까지 하시다니, 감독님의 섭외력의 한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가 궁금해질 지경인데요. ‘상록수’를 연주하는 아그네스 장 뒤로 거대한 무지개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담겼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장면이었죠. 당시 세계 최대 다국적 해상 훈련 ‘림팩’이 하와이 진주만에서 열렸어요. 마라도함이 입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 <하와이 연가>의 엔딩 장면은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20년 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에 전부를 버리고 하와이로 온 102명의 선조들이 건넜던 그 바다를, 우리 해군이 건너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송국도 아니고 일개 독립영화감독인데,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겠어요. 막막하던 그때에도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셨어요.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하와이 연가>는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기적적으로 촬영 마지막 날 새벽 여섯 시에 촬영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국이라 촬영 필수 인력 다섯 명만 함정에 올라갈 수 있었죠. 하늘이 잔뜩 흐렸어요. 그래도 다른 날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찍어보자는 마음으로 함정에 올랐죠. 장비를 풀고 이그나스 장이 ‘상록수’ 연주를 시작하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하늘을 가득 채웠어요. 하와이에서 나고 자란 스태프들조차 이렇게 크고 선명한 무지개는 처음 봤다고 입을 모았죠. 뭔가 하늘에서 이민 선조들이 보내준 선물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인터뷰 초반에 제목에 대해 질문드리긴 했습니다만, 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사진신부 임옥순을 비롯해 칼리우파파에서 한센병으로 죽어간 선조들의 힘들었던 삶을 보면서, 이 영화는 연가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바치는 뒤늦은 장송곡 혹은 진혼곡(레퀴엠)이 아닌가 하는 생각요.
정확히 맞아요. 레퀴엠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이 영화를 받아들일지 궁금했어요. 그냥 해외 동포 이야기로 볼지, 다른 의미를 찾을지…. 그래서 한국에 오기 전에 무작정 차인표 배우에게 연락했어요. 우연히 읽은 차인표 배우의 글들에서, 역사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쓴다고 느꼈거든요. 저랑 비슷한 지점이 있다는 생각에, 또 무작정 영화를 본 감상을 듣고 싶다고 메일을 썼죠. 리처드 용재 오닐에게 했던 것처럼요.(웃음) 그때 이런 글을 보내주셨어요. “한 편의 시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음악회에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동화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영화를 관계자가 아니면서 처음 보신 분이 차인표 배우인데요. 방금 기자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영화에서 연주자들과 제작진이 이 장소에서 굿을 하고 있구나, 음악을 통해 과거의 선조를 위로하고,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다고, 그런 느낌을 설명해 주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는 이점에서 조금 신경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너무 슬프게 조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영화를 보시고 힘들었던 선조들의 삶만 보시지 않으면 좋겠어요. 물론 영화를 보시면 느껴지겠지만, 임옥순도, 다른 모든 분들도 많이 힘들었음에도 그 삶 안에서 굉장히 아름다운 부분들이 있다는걸,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예고편 카피 ‘고난과 절망 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다’거든요.
감사한 관객 평들 중 하나가요.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편해졌다는 거예요. 해외 동포의 힘들었던 시기를 다룬 이야기들이 많죠.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의 삶이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봐요. 얼마나 우리가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인지, 행복하고 편한 마음으로 보시면 좋겠어요. 선조들이 겪은 고난에 집중하기보다는 선조들이 고된 삶 안에서 일궈냈던,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냈던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면서요.

미국에서 상영했을 때 반응들은 어땠나요?
작년에 제42회 하와이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이후 본토에서 초청상영회 요청이 많이 올 만큼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았어요. 워싱턴 미주 한인위원회 시사회가 끝나고 한 남성분이 거액을 후원하고 싶다고 하셔서 어떤 조건인지 물었는데, 조건이 없대요. 다음날 정말 거액의 후원금이 들어와서 놀랐죠. 엔딩크레딧에 후원자 이름을 넣어야 해서 몇 달 후에 연락을 드렸는데 ‘어머니 송옥순을 위해’라고만 써달라고 하셨어요. 또 LA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영화가 끝난 후 머뭇거리다 저를 쫓아오셔서 100달러와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이라고 쓴 메모 한 장을 주셨어요. “나의 이야기를 해주어 고맙다”고 나지막이 말씀하시면서요.
그렇군요. 개인적으로도 <하와이 연가>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하와이에 이민 가서 처음에는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이 아름다운 해변을 거니는 걸로 충분한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하와이 연가> PD이자 제 대학 절친인 이예지 씨가 10년 전쯤인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좋아서 떠났는데, 고민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고요. 사람들이, 관광청이 원하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던 때였는데, 이 삶이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인가 하는 고민을 할 때였어요. 그게 예지 눈에도 보였던 거죠.
하와이에서 평생 살 텐데,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고민을 하던 차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어요. 왜 부모님은 전화 통화 자주 안 해도 늘 뒤에 있는 든든한 존재잖아요. 저 역시 이민자로서 방황 아닌 방황을 꽤 길게 한 암울했던 터널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거죠. 그때 한인 이민 역사를 만나면서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아이들과 남편은 잘 사는데,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떨까 고민하던 차에 121년 전 선조들의 사진을 본 거죠.(잠시 눈물)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구나, 우리는 정말 사랑받는 존재구나 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역시나 ‘사랑’의 감독님다운 말씀이네요. 모든 영화가 그런 건 아니지만, <하와이 연가>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영화라고 느껴집니다.
<하와이 연가> 예고편을 넷플릭스 한국 영화 예고편을 거의 다 만드시는 감독님이 해주셨는데요. 원래 받는 제작비의 1/10에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메시지, 음악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사라는 그게 너무 딱 잘 나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우리 감독님 사랑 좋아하시잖아요”라며 웃으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저는 영화 보는 분들, 혹시 저와 비슷한 시간을 겪은 분들이 온다면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너무 힘들잖아요. 영화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게 되면 좋겠어요. <하와이 연가>든 ‘121년 이민사’든 키워드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게 전해진다면 감독으로서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차기작으로는 뭘 준비하고 있으세요?
‘전 세계 연가’ 시리즈를 하고 싶어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에 간 이민자 102명이 지금 해외동포 750만 명이 된 거예요. 미국 본토로, 또 멕시코로요. 너무 놀랍지 않나요? 저는 그 안에 훌륭하고 유명한 분들의 삶이 아니라, 개인 개인의 삶이 궁금해요. 시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 중 하나가 “하와이 이야기인데, 왜 이승만 대통령은 없냐”는 거예요. 물론 교육적으로 훌륭한 일들을 하셨지만, 저는 쉽지 않았던 삶 중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이룬 기적들을 음악에 담고 싶어요. 대륙별로 너무 많으니까요. <하와이 연가>의 흥행 성적에 달렸습니다. 차기작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요.(웃음) 그래도 저는 이런 주제를 찾은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제가 영화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건데요. 개봉하고 첫 4~5일 안에 상영관 수를 유지할지 늘일지 결판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독립영화기도 하니까, 개봉주차에 봐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하와이 연가>는 학생들의 교육에도 도움이 돼요. 서울의 한 대학 학생들이 ‘10명 정도 단체 관람을 하려는데,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를 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도 올 정도로요. 이 영화의 교육적 측면을 알아보신 ‘큰별’ 최태성 선생님이 극장표를 후원해주시기도 했습니다.(웃음) 정말 감사한 일이죠. 대학생은 물론이고 초중고생들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느낄 수 있도록 단체관람을 많이 오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