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로 예술영화를 선보여 온 A24가 역대 최고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이하 <시빌 워>)가 12월 31일에 개봉한다. <시빌 워>는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최대 규모의 내전이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는 극단적 분열로 나눠진 세상, 역사상 최악의 미국 내전 한복판에서 숨 막히는 전쟁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올해 초 북미 극장가에 혜성처럼 등장한 <시빌 워>는 트럼프가 다시 돌아온 미국의 현 시국과 맞물려 개봉하면서 북미 박스오피스의 정상을 차지했다. 북미에서 흥행한 영화는 유럽과 중동, 아시아 주요 국가들에도 잇따라 개봉하면서 전 세계 30개국 박스오피스의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시빌 워>는 국내에서도 12월 3일 비상계엄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국과 맞닿아 개봉했다. 이번 영화 속 국민에게 공습을 가한 파시스트 독재자에 의해 야기된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서 한국의 현 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시빌 워>를 먼저 보고 난 후의 인상을 공유한다.

극단에 치달은 분열로 최악의 내전이 벌어진 미국. 파시스트 대통령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려는 연방 정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연합군인 서부군, 플로리다 연맹과 신시민군 4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다. 서로를 향한 공격은 쉴 틈 없이 벌어지고, 연방 정부군은 시민에게도 총부리를 겨누며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혼란스럽고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4명의 종군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제시(케일리 스패니)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한다.

미국 내전의 현장을 누비며 처참한 광경을 기록하는 베테랑 사진 기자 리 스미스. 그녀는 철저히 포토저널리즘에 입각한 프로 정신으로 현장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몰두한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그녀의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역을 다니며 취재한 종군기자 리 밀러의 행적을 참고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리는 생전의 리 밀러처럼 수년간 목격해 온 전쟁의 기억을 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전쟁의 참상을 알리겠다는 의지에 가득 찬 제시는 전쟁 현장을 처음 마주한 신참 기자다. 리를 존경해 왔던 제시는 리와 함께 워싱턴으로 향하기로 한다. 제시는 때때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에 충격을 받고 종군 사진 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고된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냉정했던 리의 마음을 열게 된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전작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서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문의 구역 ‘쉬머’로 들어가는 5인 여성 탐사대의 여정을 그려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이들의 여정을 담아낸다. <시빌 워>는 전쟁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전쟁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제시라는 인물의 정신적 성장을 그려내는 로드무비에 더 가깝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며 초심자의 모습을 보였던 제시는 여정을 통해 총알이 빗발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현장을 찍는 프로로 거듭난다.

알렉스 가랜드는 화려한 전투 장면이 주는 스펙터클을 비판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전쟁의 그러한 위험이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위험은 충분히 사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쉴 틈 없이 전장을 기록하는 제시를 페르소나로 삼아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다. 제시가 찍는 흑백 사진은 극영화에 기록 영화의 느낌을 주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영화 바깥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또 영화에 반복해서 틈입해 서사의 진행을 중단시킨다. 제시의 흑백 사진으로 말미암은 영화의 중단은 전쟁영화의 액션이 만들어낼 수 있는 스펙터클을 제거하면서 소격효과를 일으킨다. 감독은 영화의 중단을 가져오는 제시의 흑백 사진으로 영화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빌 워>는 정치적 양극화의 극단을 상상한 근미래 미국의 모습으로 정치적으로 갈라지고,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지금의 미국을 그려낸다. 리 일행은 대통령이 있는 워싱턴으로 향하면서 미국의 여러 지역을 횡단한다. 그들은 삶보다 죽음과 더 가까운 길목에서 혐오와 차별의 얼굴을 마주한다. 네 명의 기자는 워싱턴에 당도하기 전에 그들을 뒤따른 또 다른 기자 일행을 만난다. 반가운 만남도 잠시 그들은 무명의 군인으로부터 생사를 결정짓는 질문을 받는다. 군인은 기자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어느 쪽 미국인?”이냐고 그들의 출신을 묻는다. 그들 중에서 홍콩 출신이라고 답한 기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된다. 이 장면은 여전히 출신을 따지는 혐오 세력이 남아 있는 미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시빌 워>는 초점이 나간 채로 파시스트 대통령의 상을 흐릿하게 그려내며 시작한다. 초점이 맞지 않은 이미지와 함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인 독백이 흘러나온다. 헌법을 바꾸어 3선에 성공한 그는 자신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는 FBI를 해체하고, 국민을 공습하기도 했다. 감독은 국민의 권리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던 파시스트들을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비판한다. 극 중에서 인물 새미는 마이크만 들이대면 거짓된 말들을 늘어놓았던 독재자 카다피와 무솔리니, 차우셰스쿠의 공통된 모습에 대해 일갈한다. 영화의 처음에서 흐릿한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등장한 대통령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목숨을 구걸하는 비루한 개인으로 우리의 눈앞에 또렷이 드러난다. <시빌 워>는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국가 원수의 최후를 그리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아 최악의 내전이 벌어진 미국의 미래를 가정한 영화는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시빌 워>가 전 세계에 흥행 열풍을 일으킨 것은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나날이 격해지는 혐오와 차별, 정치적 갈등이 서로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전 세계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과 우리가 12월 3일에 경험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