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으며 잘했다, 못했다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보기도 하고, 그 틈에 새해의 다짐을 고민하다 보면 한 해가 어느새 훌쩍 가버린 것만 같아 아쉬움이 배가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조금 더 ‘천천히’ 나를 들여다볼 시간 아닐까. 그래서 준비했다. 혼자서 보기에 더없이 좋은 영화 몇 편을 골라봤다. 연말 특유의 묘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을 다질 수 있게 해줄 작품들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

크리스토퍼 놀란, 데이비드 핀처와 같은 거장이 가장 존경하는 감동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테렌스 프레더릭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로 처음을 열어보고자 한다. 아시아권보다는 북미에서 유명한 감독으로, 탐미주의적인 연출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다. 오늘 소개할 <트리 오브 라이프>는 201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세계 속에서 인간 본질과 신앙을 탐구한다. 1950년대 미국 중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엄격한 아버지(브래드 피트)와 따뜻한 어머니(제시카 차스테인),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성장하며 갈등하고, 방황하는 아들 잭(숀 펜)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쓰면 마치 잭이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잭의 성장 과정 자체가 영화의 핵심이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을 대강 유추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성장 과정에서 갖게 된 생각과 신념, 그리고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욥기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던 욥은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고 나중엔 피부까지 모두 문드러지는 고통을 겪으며 믿음을 시험받았으나,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아 구원받는 인물이다. 영화는 잭의 유년 시절과 중년의 시간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어렸을 적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잭은 ‘강함’만을 가치로 삼는 아버지를 미워했음에도 그에게 영향을 받아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반면 어머니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베푸는 인물로 잭은 부모의 서로 다른 애정 표현 방식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다. 재밌는 점은 아버지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구약성서 속 인간을 벌하는 신을 닮아있고, 어머니는 신약성서 속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는 신의 모습을 반영한다. 영화는 거대한 우주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잭의 가정사와 우주적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어 엮어낸다. ‘왜 하느님이 있음에도 선한 인간이 고통받는가’라는 질문을 하며 끊임없이 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지만 욥기와 달리 영화는 하느님이 등장해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이 변하고, 아버지가 죽길 기도함과 동시에 그에게서 애틋함을 느끼는 존재로 인간을 그려낸다. 어렸을 적엔 부모를 미워했으나 나이가 들며 그를 이해하고, 그들도 변하며 결국엔 용서를 구하는 수많은 개인이 떠오른다. 지난 시간을 되짚고 새해를 준비하는 지금, <트리 오브 라이프>가 인생에 조금은 넓고 부드러운 시선을 더해줄지도 모른다.
<하나 그리고 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함께 에드워드 양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하나 그리고 둘>은 제53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 BBC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편에서 8위에 등극한 것은 물론 ‘뉴욕 타임스’나 ‘더 가디언’에서도 입을 모아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올린 작품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 가족을 중심으로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나 구성원 모두 저마다의 고민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아버지 NJ(오념진)의 처남 결혼식을 시작으로 가장 NJ, 아내 민민, 딸 팅팅, 막내아들 양양이 각자 부딪히는 삶의 문제를 따라간다. NJ는 30년 전 도망친 첫사랑 셰리를 재회하고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할머니는 팅팅이 남긴 쓰레기를 버리려다 사고를 당해 쓰러지고, 아내 민민은 집안일과 업무로 힘들어하다 할머니의 사고까지 겪어 결국 우울에 빠지고 만다. 팅팅은 할머니의 사고가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과 친구 리리의 전 남자친구를 좋아하게 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들 양양은 가족들의 뒷모습을 찍으며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치열한 뒷모습을 담는다. 여러 사건이 벌어지면서 흩어졌던 가족들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전과는 내면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럼에도 제자리에 돌아온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족영화라 하기엔 가족이 서로 부대끼며 문제를 겪지 않는다. 각기 다른 희로애락을 가진 가족을 관찰하면서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로 인생의 축소판을 보여주려고 한 것에 가깝다. 때로는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여겼던 내 삶이 사실은 곳곳에 조각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나치게 망설인 탓에 시작조차 못 한 이야기, 타이밍을 놓쳐 말해야 할 때 하지 못했던 한 마디들. 그제야 부랴부랴 삶의 놓쳤던 부분을 붙잡으려 하지만 비슷한 과오가 반복될 때면 어느새 삶 한구석에서 커다란 빈자리가 있었던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은 그런 틈새를 응시하게 해주는 영화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일상의 구석을 밝혀주면서 차마 외면했던 감정과 후회를 다시 한번 또렷이 마주하게 한다. 쏟아낼 말은 많아도 정작 돌아오는 답변은 없을 때, 그 무언의 시간이 때로는 더 깊은 위로를 건넨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닫게 된다. 한없이 적막하여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기 쉬운 친구처럼, 이 영화는 말 대신 잔잔한 울림으로 곁을 지킨다. 그 순간, 누구나 마음속에 남아있던 결핍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삶이 완전하진 않아도 조금 더 온전해지는 길을 찾아 나선다.
<아워 바디>

<아워 바디>는 어쩌면 ‘삶’을 달리기라는 행위에 투영해 풀어낸 한 편의 솔직한 자서전 같다. 영화는 주인공 자영(최희서)이 오랜 수험 생활에 실패하고 방황하다 밤길을 꾸준히 달리는 현주(안지혜)와 마주치면서 비로소 “몸을 움직인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공시생이라는 수식어에 오랜 시간 매여있던 자영이 달리기를 통해 땀과 숨으로 현실을 가늠해가는 모습을 영화는 꾸밈없이 밀착해서 보여준다. ‘달렸더니 인생이 달라졌다!’ 따위의 과대광고는 하지 않는다. 딱히 큰 사건이 있지도 않고, 보란 듯 성취가 뒤따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영이 스스로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간 놓쳤던 감각들이 깨어나며 내면 깊이 억눌려있던 불안과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 앞에 자영이 내딛는 걸음걸이는 엉성하고 때론 휘청이지만, 그 흔들림이 오히려 이 영화가 건네는 가장 진솔한 순간들이다.

한가람 감독은 <아워바디>를 연출하게 된 계기에 대해 “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었을 때, 어둡고 우울한 시기를 보냈을 때의 경험에서 시작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몸을 조금 움직여보는 일이었고, 그래서 운동을 할 때에만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라고 답했다. 자신의 몸에 주도권을 갖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살아오던 자영은 현주를 만나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달리기를 하며 나를 마주한다. 이후 다시 인생이 혼란스러워졌을 때 자영은 나이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이 성적 판타지라 말했던 현주의 말을 떠올리며 자영의 직장 상사와 관계를 갖는데, 이전 남자친구와의 관계와 달리 자영이 ‘주도권’을 갖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대신 채우다 마지막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다만, 영화는 청춘예찬, 바디 포지티브와 같은 쉬운 결말을 택하지 않는다. 방향을 잃은 채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영화는 속 시원히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몸을 통해 세상과 부딪히면서 비로소 삶을 실감한다는 사실 단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무 대답 없이 내달리는 달리기처럼, 결국 답을 찾는 건 온전히 각자의 몫이라는 걸 일깨우면서.
<블루 재스민>

연말에는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이때 사람을 가장 공허하게 만드는 게 바로 ‘과거의 영광’이 아닐까. 한땐 내가 잘 나갔는데, 내가 이 정도 급의 사람은 아니었는데. 과거의 말을 되뇌고 있다면 2025년은 아마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 내일은 결코 달갑지 않은 존재일 테니까.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은 남편 할(알렉 볼드윈)이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간 뒤 뉴욕 사교계의 여왕으로서의 호화로운 생활이 일순간에 무너진 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이 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집에서 머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원색적으로 드러나는 돈과 허영보다는 그 허영을 지탱하는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재스민이 어떤 정서적, 심리적 구멍을 드러내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친구와의 관계가 깨지고, 이 ‘거지 같은 하류층 인생’을 구원할 유일한 빛이라 믿었던 로맨스 역시 실체 없는 망상으로 끝날 때 그의 허울뿐이던 세계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실감하게 된다.

재스민은 서민층인 진저의 세계에 편입하지만, 결코 그 삶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아름답고 부유했던 언니를 부러워하는 진저는 이제 자신과 동급이 된 그를 ‘연민’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젠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서 우월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어쩌면 연민을 느끼는 것 자체가 우월감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반면 재스민은 한때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애타게 붙잡으며 진저의 세계와 자신을 구분 지으려 한다. 하지만 과거는 그를 현실과 더욱 떨어뜨려 놓을 장치일 뿐, 이미 그를 둘러싼 세계는 진저와 동일하다. 결국 재스민이 견디지 못했던 건 자신이 무시했던 상대와 동일해지는 것이다. “내가 쟤보단 잘 살아야지”라는 생각은 사람을 좀먹는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재스민은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다. 재벌급 남자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자 마치 새 인생을 선물받은 듯 감격에 몸을 떠는 모습은 과할 정도다. 재스민은 남자에 인생을 걸었고 나를 채우는 게 내가 아닌 타인이라면 그 타인이 사라지거나 무너졌을 때 나는 폐허가 된다. 올 한 해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천천히 되짚어보자. 오롯이 내 것으로 채워진 인생이었는지, 아니면 타자에게 내 인생을 위탁한 건 아닌지. 은근한 우월감에 취해 인생이 점차 과대포장으로 채워지고 있진 않은지.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는 ‘노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노쇠해가는 몸과 감정의 균열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네케 감독 특유의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연출은 사랑의 아름다움만 강조하기보다 노화와 죽음이 선사하는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는 평생 음악을 가르치며 은퇴한 뒤, 조용하고 단란한 나날을 이어가는 노부부 조르주(장-루이 트랭티냥)와 안느(엠마누엘 리바)의 일상에서 시작한다. 어느 날, 안느가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며 몸 한쪽이 마비되고, 부부의 일상은 송두리째 뒤흔들린다. 함께 보던 음악회 티켓, 같이 식사하던 식탁, 스며들듯 보살피던 작은 습관들은 이제 ‘간병’과 ‘무기력’이라는 이름에 잠식되어 간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름다운 점은 이를 결코 공포나 동정의 시선만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때 ‘우리’였던 두 사람이 노화와 병 앞에서 점차 다른 속도를 갖게 될 때, 그 지독한 간극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가감 없이 보여줄 뿐이다.

아무르(Amour, 사랑을 뜻하는 불어)라는 제목답게 영화는 로맨스보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의미가 등장한다. 우리의 기억이 흐릿해지고 몸이 망가져가는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감정만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영원할 것 같던 애정도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혹은 그럼에도 ‘함께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미카엘 하네케는 불편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과 슬프도록 따뜻한 순간을 교차하며 함부로 비난도, 동정도, 공감도 하지 못한 채 관객을 흔든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이때 <아무르>는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마주하는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젊음의 화려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주름진 얼굴과 한숨으로 가득한 오늘만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떠오르는 영화, <아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