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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와 양조위, 재개봉 〈색, 계〉의 모든 것 (1)

주성철편집장
〈색, 계〉
〈색, 계〉

2차 세계대전의 항일운동 시기, 홍콩과 상하이를 잇는 이야기를 통해 <와호장룡>(2000) 이후 다시 중국어 영화로 돌아온 리안 감독이 157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대의 서사에 눌리지 않고 그 자신의 주제에 파고드는 솜씨가 놀랍다. 그건 성애 묘사가 전혀 없는 장아이링 작가의 짧은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색, 계>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원작을 찾은 많은 이들은 무조건 ‘원작 소설이 이렇게 짧아?’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홍콩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장아이링은 1940년대 상하이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베스트셀러 작가로, 루쉰과 함께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원래 장아이링의 오랜 팬이었던 리안은 장아이링이 던져놓은 수많은 단서들 사이로 들어가 빈 공백을 채우는 것이 목표였다.

 

<색, 계>의 친일파 장군 이(양조위)는 매번 왕치아즈(탕웨이)와의 만남이 마치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격정적인 기분으로 색에 취한다. 리안은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넘어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지켜본다. 11일 동안 촬영된 정사 장면은 리안 감독과 배우들, 촬영, 조명, 음향감독 등 소수의 인원들만 참여하여 진행됐으며 감독과 두 배우는 동작들 하나하나에 담긴 동기와 의미, 감정 등을 새겨갔다. 영화 속 정사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정사신은 굉장히 가학적으로 펼쳐진다. 이가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또한 경계심을 유지하기 위해 왕치아즈가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중에 우연히 눈이 마주치게 됐을 때 굉장히 당황한다. 왕치아즈의 반응도 중요하다. 관계가 끝난 다음 살짝 웃는데, 그건 쾌락과 무관하게 이를 속이려는 자신, 즉 왕치아즈가 아닌 막부인으로서의 연기가 먹혀들어서 임무를 잘 수행했다는 만족의 웃음일 거다. 그러다 두 번째 정사부터는 서로의 감정 교류가 이뤄지면서, 진짜 연인의 관계처럼 펼쳐진다. <색, 계>가 결국 ‘색’이 ‘계’를 넘어서는 영화라고 한다면, 마침내 색과 계가 동일 선상에 놓이는 정사신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세 번째 정사신이 중요하다. 이때부터는 진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중요한 장면은 왕치아즈가 옆에 걸린 권총을 흘깃 쳐다보는 장면이다. 이를 쏴 죽여서 임무수행을 끝낼 수 있는 순간임에도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관계가 끝난 다음 울게 된다. 자신이 왕치아즈가 아닌 막부인으로서 정말 완벽한 연기를 펼치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치아즈가 이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색, 계〉
〈색, 계〉

원작과 비교해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역시 빌런 이에 대한 묘사다. 원작 속 이는 볼품없고 초라한 외모의 남자로 묘사되고 있다. 대체 그런 자와 사랑에 빠져 임무를 망각하는 스파이라는 설정도 꽤 의미 있지만, 원작에 전혀 없는 성애 묘사를 전면에 배치하여 색에 빠져드는 스파이라는 설정을 진행시킬 수 있는 데는, 전적으로 양조위라는 배우가 있기에 가능하다. 쉽게 말해, 현실의 양조위처럼 비주얼만으로도 첫눈에 반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 영화 <색, 계>의 핵심이다. 아무리 단편이라도 소설과 달리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는 왕치아즈의 마음을 단숨에 흔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색, 계>에서 양조위의 첫 등장은 그의 압도적인 눈빛을 가리면서 시작된다.

 

〈색, 계〉
〈색, 계〉

막부인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이의 아내에게 접근하는 왕치아즈가 이의 집의 드나들 때, 이는 자동차 차창 밖으로 얼굴의 하관으로만 등장한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양조위라는 것을 관객 그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 리안은 이의 목소리만 듣게 되는 왕치아즈의 자리에 관객을 둔다. 그리고 그것이 <색, 계>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공교롭게도 이 또한 왕가위의 다른 영화 <중경삼림>(1994)에서 양조위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과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건너편 건물 벽 앞에서 경찰 업무를 보다가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양조위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빅 클로즈업으로 모자까지 벗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이것도 양조위의 시선을 도저히 피할 길 없는 페이(왕페이)의 자리에 관객을 두는 방식이다. <색, 계>도 <중경삼림>도 양조위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관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험에 들게 하는 순간이다. 어쨌거나 거기서 벌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색, 계〉
〈색, 계〉

<색, 계>의 등장인물들은 누가 봐도 지나치게 전형적인 인물들 투성이다. 그런데 이 구조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인물이 바로 이를 연기하는 양조위다. 리안이 장아이링의 원작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지점은 바로 애국주의와 섹슈얼리티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양조위를 캐스팅하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를 자연스레 해결했다. 양조위는 누가 봐도 악인의 이미지가 아닐뿐더러 악인이더라도 남모를 사연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인물이다. <색, 계> 개봉 당시 리안 감독과 탕웨이 배우가 방한해 인터뷰한 적 있는데, 이에 대해 리안은 “모두가 증오하는 공공의 적이지만,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 있어 양조위 말고 다른 선택이 있을까”라고 얘기하며 “악역이지만 항상 두려움을 지니고 있고 양심의 가책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사실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섬세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양조위밖에 없다.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그가 악역을 연기하더라도 언젠가 마음이 바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색, 계〉
〈색, 계〉

양조위가 <비정성시>(1989) 출연 당시 북경어 연기가 힘들어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했던 것과 달리, <색, 계>의 양조위는 드디어 광동어가 아닌 북경어로 연기했다. 배우로서 언어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새로운 발성과 톤으로 기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효과가 더 컸다. 거기에 더해 분장은 종종 무섭게 보이거나 심지어 더욱 나이 들어 보이는 주름까지 만들었다. 앞서 리안과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로드리고 프리에토 촬영감독은 그의 냉혈한 같은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담을 때면 둥근 반사판에 전구를 여러 개 달아 차갑고 섬뜩한 표정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리안과 로드리고의 목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양조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딱 한 번 이런 조명 방식을 버린 장면이 있다. 바로 후반부에 이가 왕치아즈에게 반지를 주면서 쳐다볼 때의 눈빛이다. “이 남자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진심으로 선한 눈빛을 보여달라”는 것이 리안의 요구였다. 그러니까 그가 누군가를 고문하고 나와서 손에 묻은 피를 닦는 그 순간에도, 양조위의 변함없는 눈빛은 언제나 우리를 안심시키는 그 어떤 것이다. 그렇게 양조위는 영화가 기어이 ‘계’를 깨트리고 ‘색’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된다. 한 배우를 규정하는 그 어떤 기준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가 된 것이다.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