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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지워버린 텅 빈 세계, 기만과 모순으로 쌓아 올린 〈브루탈리스트〉의 붕괴

추아영기자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브래디 코베 감독의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서사와 함께 전후 미국의 휘황찬란한 번영 뒤에 가려진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폭로한다. 작품이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새로운 고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상찬을 듣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허울뿐인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스타비전의 화면비율과 인터미션을 포함한 긴 시간의 러닝타임 등의 미적인 형식과 웅장한 음악이 충족시켜 주는 고양감 등이 고전의 필수 불가결 조건인가. 혁신적 영화 문법이 드러나지도 않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현재에 이러한 호칭을 먼저 부여하는 것이 맞을까. 고전이라는 호칭에 대한 의문과 함께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반감은 영화가 지워버린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브루탈리스트>는 필히 드러내야 했지만 지워버린 '빈자리'가 있다. <브루탈리스트>의 기만적인 유대인 이민자 서사와 함께 이 영화의 '빈자리', 영화 밖으로 추방당한 것에 대해 말하려 한다.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 -〈브루탈리스트〉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 -〈브루탈리스트〉


홀로코스트의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아 미국 땅을 밟은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언어도 종교도 다른 타국의 이민자로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던 라즐로는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을 만나게 되면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설계를 제안받는다. 라즐로는 85만 달러의 거금이 드는 이 프로젝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이 점점 거세지면서 그의 혁신적인 건축 설계는 자꾸만 반대에 부딪힌다. 설상가상으로 안전사고까지 일어나면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해리슨 - 〈브루탈리스트〉
해리슨 - 〈브루탈리스트〉


영화는 라즐로의 조카 조피아가 소련군에게 말없이 심문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어둠 속을 빽빽이 메우는 군중 속에서 라즐로가 어딘가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전후 난민이 되어 소속이 없는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들의 모습과 함께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의 내레이션도 흘러나온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오해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내레이션은 왜곡된 자유를 자유로 여기는 역설 속의 부자유를 이르는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영화의 서막에서 인용한 괴테의 말은 앞으로 펼쳐질 라즐로의 순탄하지 않은 여정을 예고함과 동시에 서막과 1부와 2부,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건축물과 같은 영화의 지반이 된다.

 

조피아(왼), 에르제벳 -〈브루탈리스트〉
조피아(왼), 에르제벳 -〈브루탈리스트〉


거칠게 요약하자면 영화의 1부는 나치즘의 폭력에서 벗어나 홀로 미국에 온 난민 라즐로가 겪는 수난과 해리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15분간의 인터미션이 끝난 후 펼쳐지는 2부는 라즐로 일가가 겪는 고난과 함께 그들이 미국의 표상으로 존재하는 해리슨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로 향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또 2부의 시작점에서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가 미국으로 오고, 정신적 방황 상태에 놓여 있던 라즐로가 그들을 만나면서 유대인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점을 고려해 나눈다면, 1부는 라즐로가 자신의 부자유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2부는 라즐로가 가족을 통해 점차 자신의 부자유 상태를 알아 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일련의 과정에서 예술가로서의 라즐로는 해리스의 자본으로부터 오는 힘에 점점 종속된다. 몇십 년의 생략을 거쳐 1980년의 시간대로 온 에필로그에서는 이스라엘로 간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의 최후가 그려져 있다.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스트〉


수미쌍관 구조, 서사의 대칭성으로 인해 <브루탈리스트>는 하나의 건축물과 같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지나치게 도식적인 영화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브루탈리스트>의 패착은 여기서 시작된다. 감독이 내세운 ‘폭력적인 역사의 반복’이라는 총체적 의미(=주제)에 각각의 에피소드를 묶어 두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관객이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여지없이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라즐로가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서사이지만, 그가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 어떻게 작업하는 예술가인지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영화는 주제 의식을 전하기 위한 에피소드들은 나열하면서 라즐로와 그의 가족들의 성격과 감정을 알 수 있는 일상은 가벼이 다룬다. 라즐로는 ‘유대인 건축가’라는 식별표만을 부착한 채 영화의 논리 안에서만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특히 라즐로가 미국에서의 속박과 폭력성, 자신의 부자유 상태를 깨닫는 방식이 마약과 섹스로만 그려진 점은 전형적인 남성 예술가상의 계보를 잇는다.  
 



폭력적인 역사의 반복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스트〉


홀로코스트의 어둠에서 생존한 라즐로의 가족은 각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라즐로는 정신적 방황 상태에 빠져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부러진 코로 인해 시작한 아편에 중독된다.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은 수용소에서 얻은 골다공증에 의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신체적 부자유 상태에 놓여 있다. 조피아는 부모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뿌리(=유대인 정체성)를 잃어버리며 말을 함께 잃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내내 말하지 않았던 조피아가 처음 말한 순간은 의미심장하다. 영어를 하지 못 해서 침묵하는 것처럼 그려졌던 조피아는 2부의 중후반부에서 가족이 이미 이스라엘에 뿌리내린 남편과 함께 시온(=예루살렘의 역사적 지명)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처음 말한다. 남편에 의해 유대인 정체성을 되찾은 조피아는 다시 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정체성을 되찾은 것에서 더 나아가 시오니스트(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인 시오니즘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인다. 조피아는 라즐로 부부에게 이스라엘로 가는 자신의 행위를 말하며 “귀향”이라는 철저히 시오니즘의 관점에 부합하는 언어를 쓴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피아는 영화 속에서 시오니스트의 표상으로 존재한다.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스트〉


영화 속에서 조피아의 말을 잃은 상태와 에필로그에서 말을 잃은 라즐로의 상태는 대칭을 이룬다. 영화는 2부와 에필로그 사이에 몇십 년의 시간을 생략한다. 2부의 후반부에서 라즐로는 에르제벳의 이스라엘로 가자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영화 속에서 해리슨과 함께 사라진 라즐로는 에필로그에서 휠체어에 탄 채로 등장한다. 또 그는 과거의 조피아처럼 말을 잃는다. 라즐로는 에르제벳의 신체적 부자유와 조피아의 정신적 부자유를 모두 가진 채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다. 그는 건축 비엔날레의 단상에서 라즐로를 대신해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조피아를 그저 바라만 본다. 에필로그에서 감독은 조피아를 통해 시오니스트를 풍자한다. 조피아는 라즐로의 미완성된 건축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설명한다. 그녀는 건축물의 폐쇄적인 공간은 라즐로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기억과 에르제벳의 부재로 인해 수용소에서 마주했던 고독감을 뜻하며, 폐쇄된 공간과 대조되어 전율을 주는 예외적 공간은 에르제벳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그의 마음, 영원성을 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피아의 말과 다르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예술에 대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또 그는 사창가에 가고, 이따금 아내 외의 다른 여자로부터 성적인 자극을 얻었다. 사실과 다른 조피아의 말은 그의 예술을 시오니즘에 관한 예술로만 봉합한다. 조피아는 유대인 예술가의 창작품을 시오니즘의 예술로 한계 지으며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 라즐로는 꿈에 그리던 이스라엘로 가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았지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은 잃었기에 말을 잃게 된다. 다만 에필로그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시오니즘에 대한 풍자는 자신의 예술에 폭력을 가하는 조피아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라즐로의 모호한 얼굴로 인해 미약해져 버린다. 
 

의도와 방식의 불일치가 낳은 모순
 

해리슨(왼)과 그의 아들 -〈브루탈리스트〉
해리슨(왼)과 그의 아들 -〈브루탈리스트〉


라즐로의 부자유 상태, 그와 조피아의 뒤바뀐 관계를 드러내는 에필로그로 추정해 보건대, 브래디 코베는 몇십 년에 걸친 폭력적인 역사의 반복을 통해 미국의 아메리칸드림과 시오니즘을 동시에 비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영화의 첫 장면(말하지 않는 조피아의 모습이 담겨 있는)을 다시 불러온 이유도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락해 버린 그녀의 모습으로 폭력의 순환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그의 방식은 모순을 품고 있다. 영화의 서막에는 라즐로가 나치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1부와 2부에는 라즐로 일가가 미국의 착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택을 내리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1부와 2부는 라즐로 일가의 모습을 통해 왜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타당해 보이는 이유를 심어주기도 한다. 이는 유대인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고 ‘약속의 땅’(유대인의 표현을 빌려)에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시오니즘의 관점에 철저히 부합한다. 그들은 여전히 이 이유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스트〉


그리고 영화는 서사적 완결성을 위해 영화가 구축한 가상의 역사 속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영화 속에서 이스라엘 건국 당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갈등은 그려져 있지 않다. 또한 2부와 에필로그 사이의 생략을 통해 시오니즘이 자행한 폭력의 역사와 그로 인해 되풀이되는 팔레스타인인의 테러 등은 생략되어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이면을 드러내고, 불필요하게 노골적인 해리스의 강간 장면 등으로 미국 사회에 숨은 폭력을 낱낱이 보인 것에 반해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인에게 가한 폭력은 영화의 세계 바깥에만 존재한다. 이러한 생략은 감독이 시오니즘의 합리화와 시오니즘의 비판을 연결하려 한 논리를 비약으로 보이게 한다. 이는 브래디 코베의 거창한 세계가 정작 있어야 할 것은 결여한 ‘텅 빈’ 세계라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그가 건축물처럼 쌓아 올린 영화는 스스로 만든 틈과 그 틈에서 생겨난 기만과 모순으로 인해 붕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