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유독 사랑하는 장르, 뮤지컬이다. 흥 많은 DNA 덕분인지 <보헤미안 랩소디>와 같은 뮤지컬 영화가 흥행했을 땐, ‘싱어롱 상영관’이 유행하는 등 한국인의 뮤지컬 영화에 대한 사랑은 꽤나 깊다. 현실에서라면 지루하게 흘러갔을 감정도 갑작스레 터져 나와 음악과 춤이 된다. 가끔 대책 없이 밝고 희망찬 노래를 듣고 있자면, 권태로운 나의 일상은 잠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맘마미아!> 같진 않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익숙한 형식을 비틀어 장르의 틀을 확장한 뮤지컬 영화다. “새 시대의 뮤지컬”이란 이름으로 개봉한 <에밀리아 페레즈> 역시 그중 하나다. 오늘은 <에밀리아 페레즈> 개봉을 기념하여 완전히 새로운 뮤지컬 영화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에밀리아 페레즈>

찬사와 야유가 동시에 쏟아지는 문제의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트랜스젠더에 대한 피상적인 표현과 주연 에밀리아 페레즈/후안 마니타스 델 몬테 역을 맡은 가스콘 배우의 혐오 표현, 멕시코 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 서사의 당사자들에게서 비판을 받았으나, 현대무용을 차용해 쇼에 가까운 연출을 하며 독창적인 뮤지컬 장르를 개척하고, 진득한 블랙 유머를 곁들이며, 잔혹한 마약상이 여성으로 성전환하는 소재 자체가 갖고 있는 참신함 덕분에 작품으로서는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멕시코 마약 조직의 보스인 마니타스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꿈꾸며, 변호사인 리타(조 샐다나)의 도움으로 성전환 수술에 성공해 ‘시민운동가’ 에밀리아 페레즈로 다시 태어난다. 이 과정에서 성전환은 표면적인 의미를 벗어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메타포에 가깝다.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질러 온 사람이 과거를 청산하고 선행을 이어간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깔끔하게 과거의 자신과 분리되는 것은 가능할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진정으로 가능할까. 영화는 마니타스와 에밀리아 두 가지 정체성 모두 갖고 있는 인물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여우조연상(조 샐다나) 등 13개 후보에 올랐는데, 아카데미 역사상 비영어권 영화 중에선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이다. 특히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인 가스콘은 칸영화제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트랜스젠더로 기록되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세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독창성’이라는 무기 하나만으로 이 모든 논란에 맞선다. 엇박자로 등장하는 춤 노래, ‘여기서 이렇게 된다고?’ 싶은 과감한 전개는 “완전히 새로운 뮤지컬 영화”라는 헤드라인에 꼭 들어맞는다. 독창성, 이라는 키워드로 밀어붙이는 힘 있는 작품임은 확실해 보인다. 여담이지만,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주제가 과거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주연 역을 맡은 가스콘 배우에게 주어졌다는 점은 퍽 흥미로운 지점.
<아네트>

뮤지컬 영화는 보통 2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레미제라블>처럼 음악이 자연스럽게 영화 속 대사처럼 흘러가며 서사를 이어가는 방식, 다른 하나는 <라라랜드>처럼 현실과 구분된 ‘쇼’의 형식으로 연출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레오 카락스의 <아네트>는 이 두 가지 접근법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는다. <아네트>에서 음악은 감정 증폭 장치가 아닌, 인물들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 된다. 노래는 감정이 고조될 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인물들이 자신의 서사를 이해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극중 노래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안한 리듬으로 구성되고, 캐릭터들은 화음을 쌓기보다는 마치 서로를 향한 공격처럼 날선 가사를 주고받는다.

영화는 저돌적이고 냉소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애덤 드라이버)와 섬세하고 우아한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이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스타였던 두 사람의 일상은 가십으로 소비된다. 뜨겁게 사랑하며 딸 ‘아네트’를 출산한 기쁨도 잠시, 결혼 후 점차 입지가 좁아지는 헨리, 승승장구하는 앤, 그들의 싸움, 사랑, 여행 모두 가십으로 소비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대중의 시선과 화려한 무대 위의 관계는 질투와 집착으로 얼룩지며 빠르게 무너져 간다. 파괴적인 무대로 늘 ‘죽여주는’ 코미디를 했던 헨리는 진정한 감정을 노래하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안의 재능을 질투하고, 안의 순수함은 결국 헨리의 질투와 자기파괴적 본능에 의해 소모된다. 아네트는 그런 안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낼 수 있는 아이였는데, 헨리는 아네트의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벌기 시작한다. 이때 영화는 다시 한번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뒤튼다. 보통 뮤지컬에서 노래하는 장면은 감정 표현의 방식이지만, 아네트의 노래는 상품화된 퍼포먼스로 전락한다. 영화 제목이 ‘아네트’인 것처럼, 작품은 두 사람의 관계보다는 ‘아네트의 비극’에 더 집중한다. 아네트는 영화 속에서 ‘인형’으로 등장하는데, 욕망에 사로잡혀 자식을 무대 위(혹은 비극)로 내모는 현대인의 위선을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헨리는 아네트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아네트를 “예술적 성취”로 착각하며 파멸해간다.
<러브 송>

갑자기 조연들이 각을 잡고 플래시 몹을 하거나 ‘나 이제 노래할 거예요!’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는 여타 뮤지컬 영화와 달리, <러브 송>은 대사를 내뱉듯 특별한 준비 없이 노래한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를 위한 음악이 아닌, 주인공들이 자신의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악을 차용했다는 식이다. 감정을 차분하게 흡수하고, 음악 속에서 흘려보내는 연출은 사랑과 이별의 공백을 메우고, 상실을 견디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러브 송>의 주인공 이스마엘(루이스 가렐)과 줄리(루디빈 사니에)는 10년 가까이 교제해 온 연인으로, 너무 오랜 시간 사귄 탓에 친구 앨리스(클로틸드 헤스메)와 함께 ‘쓰리섬’을 하는 등 서로를 사랑하지만 권태로 인해 불안하기도 하다. 영화 초반, 이들이 함께 부르는 사랑 노래는 ‘사랑의 확신’보다는 ‘사랑의 불안’을 담고 있다. 사랑을 확인하는 노래가 아닌, 사랑을 계속해서 되뇌어야만 하는 관계의 불안함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이스마엘은 사랑하는 줄리를 잃고 상실감 속에 무너지고 만다.

<러브 송>의 음악은 감정을 대신 말해준다. 특히 줄리의 죽음 이후, 음악이 가지는 의미가 변하게 되는데, 줄리를 잃은 후 이스마엘은 목소리를 잃은 듯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침묵 속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조용한 멜로디가 슬픔을 대신 떠안으며,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완충재 역할을 한다. 이스마엘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고, 그 감정을 이해받을 수도 없다고 느끼지만, 영화는 노래로 그 감정을 흘려보내며 슬픔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다. 상실 이후, 이스마엘은 또 다른 사랑을 맞이한다. 하지만 단순한 재출발이 아닌, 의혹과 의문, 슬픔이 잔뜩 묻어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영화는 ‘잊지 않더라도,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이스마엘의 내면을 음악으로 전달하고, 이별과 새로운 사랑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존의 상태를 보여준다. 슬픔과 사랑은 반대가 아닌, 때로는 같은 흐름 속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음악이 곧 이스마엘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서사와 밀착해있다. 힘껏 폭발하는 넘버 없이 차분하게 녹아드는 뮤지컬 영화를 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작품.
<어둠 속의 댄서>

뮤지컬 영화는 흔히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 때문에 유독 밝고 화사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뮤지컬 영화를 만든다면? 불행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성 주인공을 극한까지 괴롭히는 가학적인 트리에 감독이 만든 뮤지컬 영화는 장르의 특성을 이용해 본질을 완전히 전복한다. 그의 뮤지컬 영화 <어둠 속의 댄서>에서 노래하는 순간은 기쁨이나 해방의 순간이 아닌,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한 여성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뮤지컬이 가진 환상성은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장치로 변한다.

주인공 셀마(비요크)는 시각을 점점 잃어가는 여공으로, 아들에게 같은 운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좌절할 법한 상황이지만, 공장 직원들과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는, 기본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셀마는 뮤지컬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불행을 직접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음악을 도피처로 사용한다. 그리고 감독은 뮤지컬로 현실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마치 테스트라도 하는 듯 뮤지컬 신과 현실 장면을 반복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패턴이 바로 ‘음악이 멈추는 순간’인데, 일반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 클라이맥스인 것과 달리, <어둠 속의 댄서>의 클라이맥스는 음악이 끝난 후 찾아온다. 아들의 수술비를 강탈 당할 위기에 처한 셀마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로 인해 경찰에 구속된다. 셀마가 체포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정당방위를 적극 주장하며 현실에 맞서기보다 내면의 환상으로 들어가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뮤지컬 장면을 펼친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셀마는 고통을 잊지만, 노래가 끝나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더 깊은 절망뿐이다. 환상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 이 패턴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뮤지컬을 이용해 감정을 착취하는 행태다.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임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는 셀마는 환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는다’라며 노래 부른다. 하지만 관객은 알고 있다. 이건 뮤지컬 영화가 아니며, 셀마는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뮤지컬 장르가 가진 ‘낙관적 신화’를 완전히 해체하는 결말에선 트리에 감독의 이죽이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견왕: 이누오>

<견왕: 이누오>(이하 <견왕>)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등 역동적이고 독특한 화법으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쌓아가던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작품으로, 후루카와 히데오의 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 견왕의 권』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은 일본의 고전 모노가타리 중 『헤이케모노가타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당대 문화에 끼친 영향에 비해 기록이 기이할 정도로 적은 실존 인물 ‘이누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견왕>은 14세기 일본의 고전 연극 ‘노가쿠’를 소재로 하고 있으나 O.S.T는 록 음악에 가깝다.

주인공 이누오(아부쨩)는 기형적인 몸으로 태어나 집안에서 버려진 존재이나, 그 신체를 이용해 자신만의 몸짓과 목소리로 새로운 음악을 선사한다. 또 다른 주인공 토모나(모리야마 미라이)는 저주로 장님이 된 비파법사 소년으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노래와 춤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춘다. 앞이 보이지 않는 토모나에게 이누오의 외모는 중요치 않았고, 이누오 역시 외모가 아닌 자신의 노래와 몸짓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토모나가 유일했다. ‘정통’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역동적인 새로운 음악을 대중에게 선사한다. 작품에서 시대를 앞서나간 음악으로 ‘록 장르’를 선택한 점이 흥미롭다. 두 사람의 공연은 현대의 록 페스티벌처럼 과감하고 자유로운데, 기존 노가쿠 장르가 지닌 제한적인 형식을 깨고 이야기와 신체가 하나가 되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록의 정신과 닮아있다. 점차 새로운 음악에 열광하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음악은 으레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에 의해 탄압받는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처럼, 그들의 음악 역시 체제에 묻히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무대가 억압 당하고 역사 속에서 지워질 때 ‘그가 남긴 노래’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술의 영속성을 드러낸다. 소재의 특수성 때문에 일본 고전을 잘 모른다면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으나, 마사아키 감독 특유의 역동하는 장면은 정말 타협 없이 완성되었다. 덧붙여 고전보다는 록 음악 베이스이므로 흥겹게 볼 수 있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