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고전이라 불러도 무방한 영화가 재개봉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디렉터스 컷>은 파격적인 소재로 국내 개봉 당시 원본 그대로 개봉하지 못한 <크래쉬>의 복원판이자 감독판이다. 이 제목을 들을 때면 자연스럽게 그 이후에 나온 동명의 아카데미 수상 영화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크래쉬>처럼 유독 사람들이 헛갈릴 법한 제목을 달고 나온 영화들을 모아봤다. 아래의 사례들 외에도 유독 헛갈리는 영화들이 있다면 댓글로 함께 나누길 부탁한다.
<크래쉬> - <크래쉬>


이 분야에서 빠질 수 없는 영화, <크래쉬>와 <크래쉬>. 보통은 제목을 옮기는 과정에서 결이 비슷해지곤 하는데, 이 영화는 원제부터 철자까지 똑같다. 둘 다 크래쉬, 즉 차량 간의 충돌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그리는 결이 완전히 달라 틈만 나면 농담의 소재가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는 차량 충돌에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제임스 발라드를 중심으로 각종 도착증에 빠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면 2004년 영화 <크래쉬>는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36시간 전 여러 인물의 관계를 그리며 인종 차별, 갈등을 논하는 묵직한 사회드라마다. 덕분에 <크래쉬>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후 이 영화를 빌리러 갔던 사람들이 착각하고 <크래쉬>를 빌렸다가 정신공격(!)을 당했다는 웃픈 일화가 전설처럼 떠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래쉬>가 이번 3월 26일 감독판으로 재개봉하면서 <크래쉬: 디렉터스 컷>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콘택트> - <컨택트>


원래는 전혀 헷갈릴 일 없는 두 영화가, 바다를 건너오며 마치 쌍둥이처럼 둔갑했다. 1997년 <콘택트>와 2016년 <컨택트>이다. 범인(?)은 후발주자 <컨택트>다. 이 영화의 원제는 도착, 도달을 뜻하는 ‘어라이벌’(Arrival)이다. 세계 각국 도시에 거대한 비행물체가 나타난 것을 이르는 제목인데, 아무래도 항공에서 자주 쓰는 용어라 그런지 컨택트로 제목을 바꿔 개봉했다. 인간과 외계인이 접촉하는 SF영화란 공통점을 공유하긴 하지만, 그 외엔 완전히 다른 톤의 영화였기에 관객들 모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1997년 영화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만큼 과학과 종교에 관한 시선이 도드라지고, 2016년 영화는 테드 창의 단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언어와 시간에 대한 시각이 주를 이룬다(물론 이쪽도 현대 물리학을 기반으로 구성했다). 오직 한국에서만 헷갈리는 영화라는 점이 각별하다.
<마더> - <마더!>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두 편은 느낌표 하나가 큰 차이를 만든다. 물론 엄마를 뜻하는 영단어 마더(Mother)가 제목인 영화는 셀 수도 없다. 그렇지만 2017년 영화 <마더!>가 느낌표 하나를 더하면서 만든 차별점이 구도로 말할 때는 오히려 더 헷갈리는 구석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2009년 영화 <마더>일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살인 누명을 쓰자 진범을 잡으려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담았다. 봉준호 감독 영화 중 가장 이질적인 영화이자 김혜자, 원빈 등 배우들의 열연 또한 인상적이다. 반면 2017년 <마더!>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로 숲속 외딴 집에 사는 부부에게 불청객이 찾아오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국적은 물론이고 줄거리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 두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엄마‘란 단어의 상징성마저도 완전히 다른데, 제목으로 워낙 많이 쓰는 단어여서 특정 작품을 가리킨다고 표기해야만 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이 두 편의 영화 외에도 일본드라마 <마더>(2010)와 이를 리메이크한 한국드라마 <마더>(2018), 일본영화 <마더> 등 마더만으로도 일가족이다.
<1번가의 기적> - <7번방의 선물>


참 이상하다. 헷갈릴 것이 아닌데, 헷갈린다. 여섯 글자라서? 숫자로 시작하는 제목이라서? 휴먼코미디여서? 왠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영화 <1번가의 기적>과 2013년 <7번방의 선물>은 베리에이션이 다양하다. 1번방의 선물, 1번가의 선물, 7번방의 기적…. 역시 두 영화가 코미디로 시작해 신파로 도달하는 전개의 유사함 때문인가 싶다. 글로만 쓰는데도 틀린 제목마저 입에 착착 붙는다. <1번가의 기적>은 1번가 재개발을 위해 힘쓴 용역깡패와 1번가를 지키려는 복서의 갈등을 중심으로 코미디와 감동드라마를 오가고, <7번방의 선물>은 살인 누명을 쓴 지적장애 아빠와 그런 아빠를 위해 몰래 교도소에 찾아오는 딸의 이야기로 웃음과 눈물을 잡았다. 두 영화 모두 비평적 성과와는 거리가 좀 있지만 흥행만큼은 톡톡히 챙긴 것도 공통점이다.

<기억의 밤> - <사라진 밤> - <7년의 밤>



스릴러 하면 밤이 빠질 수 없다. 하지만 2017년 말과 2018년 초는 그 밤이 너무도 길게 이어졌다. 제목에 ‘밤’이 들어간 세 편의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면서 관객들을 헷갈리게 한 시기다. 가장 먼저 출발선에 선 영화는 2017년 11월에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기억의 밤>. 납치됐던 형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쩐지 달라진 형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는 동생이 주인공이다. 2018년 3월 7일 개봉한 이창희 감독의 <사라진 밤>은 스페인 스릴러 <더 바디>의 리메이크로, 자신이 살해한 아내의 시신이 사라져 혼란에 빠진 남편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같은 달 28일 개봉한 추창민 감독의 <7년의 밤>은 정유정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토대로 뺑소니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두 남자의 기나긴 세월을 담았다. 세 영화 나름대로 차별화된 지점을 내세운 스릴러인데, 아무래도 ‘000 밤’이란 형식의 제목이 연이어 노출되다보니 헷갈려 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공작> - <공조> - <교섭> - <협상>

두 글자 제목은 참 많은데 그것도 미묘하게 뜻이 통하면 또 헷갈린다. 한국영화 중 유독 많이 헷갈린다는 영화는 바로 <공조>와 <공작>다. 김성훈 감독의 2017년 영화 <공조>는 남북한 형사가 공조수사로 범죄조직 보스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고, 윤종빈 감독의 2018년 영화 <공작>은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에 침투해 첩보 활동을 벌인 첩보원 흑금성의 행적을 그린다. 두 글자 제목에 둘 다 남북한 관계가 얽힌 내용이라 혼란을 빚기도. 여기에 한 번 더 혼란을 끼얹은 건 이종석 감독의 2018년 영화 <협상>과 임순례 감독의 2023년 영화 <교섭>이다. <협상>은 한국 최고의 협상가가 무기 밀매업자와의 협상에 나서는 내용을, <교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국민들을 구하고자 외교관과 국정원이 힘을 합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나마 다른 영화들과 시간을 두고 개봉한 <교섭>이 덜 헷갈릴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 하필 <교섭>의 주연배우가 현빈인데 그가 <공조>와 <협상>도 주연이었던 터라 이 제목이 저 영화 같고, 저 제목이 이 영화 같은 느낌을 쉬이 지우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