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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꿈꾸는 일 자체가 저항이 되는 이곳에서…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씨네플레이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열어젖히는 뭄바이의 새벽은 믿을 수 없이 혼잡하고 매캐하다. 보는 것만으로 목이 따끔거리더니 고단한 이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태피스트리처럼 얽히며 북적대는 대도시 위로 흐르자 어느새 심장까지 욱신거린다. 뭄바이 곳곳을 비추는 푸티지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보이스오버로 깔리며 영화가 시작되는 와중에, 그 사연들이 실은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취재한 후 배우를 고용해 재구성한 대사라는 사실에 이르면, 현실과 픽션, 허구와 실재의 경계마저 흐려져 혼란은 가중된다. 경계가 무너진 곳에 뭄바이의 덧없는 화려함, 몽환적 판타지성이 스미고 공허하고 모호한 도시의 정체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인도 사회의 축소판. 인도인들의 욕망이 움트는 ‘꿈의 도시’. 꿈이 고이는 속도만큼 삶도 고갈되는 곳.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 같다”면서도, “고향에 돌아갈 일은 없다”며 말을 바꾸고, 종국엔 “덧없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라 술회하는 목소리들은 이 도시의 삶을 압축한다. 영화는 뭄바이라는 대도시의 복잡하고 모순된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그 문을 열어 보여준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All We Imagine as Light)은 바로 그런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다. ‘꿈의 도시’라 불리지만, 그 꿈은 결코 쉽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가혹할 따름이다. 영화는 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세 여성 프라바(카니 쿠스루티), 아누(디브야 프라바), 파르바티(차야 카담)의 삶을 따라간다. 이들은 모두 뭄바이 출신이 아니며, 고향을 떠나 이 도시에 터를 잡았다. 살아남기 위해 노동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도시가 이들에게 허락하는 것은 결핍과 덧없음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독신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가족과 사회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쉽게 떠날 수도 없다. 결국, 버티며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각기 다른 세대와 개성만큼이나 대도시에서의 세 여성의 낮과 밤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엄격하고 유능한 간호사 프라바는 혼인 직후 독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의 연락이 끊긴 채 기다리던 도중, 동료 의사에게 진심 어린 애정 고백을 받지만, 혼인 상태인 그는 그 감정을 애써 흘려보낸다. 프라바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 세를 얻어 사는 동료 간호사 아누는 퍽 다른 삶을 산다. 월급으로 월세를 내지 못하는 일도 잦지만, 연애만큼은 성실하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비밀이다. 상대 남성이 무슬림인 탓이다. 힌두와 이슬람의 서늘한 반목이 폭동과 테러로 구현되는 곳이 뭄바이다. 잠재된 갈등은 젊은 연인들을 도시의 어두운 구석으로, 부르카의 장막 뒤켠으로 끝없이 몰아세운다. 프라바와 아누가 간호사로 일하는 병원의 조리사 파르바티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편이 죽은 뒤,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강제 퇴거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공식 문서에 여성의 이름은 적히지 않는다. 거주 이력을 증명할 길이 없어진 파르바티에게 프라바는 함께 살자 손을 내밀지만, 이 고집스러운 여성은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이 없다.

남편을 잃은 여성은 주거권조차 지켜낼 수 없는 도시, 종교가 사랑할 자유를 제약하는 곳, 여성의 기다림이 정상으로 강요되는 사회. 가부장적 젠더 억압과 계층화된 신분 체계가 인도 여성들에게 이중의 구속을 강요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속물성이라는 무거운 추까지 더해지자, 세 여성의 삶은 끝없이 가라앉는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들의 삶을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 인물은 자신들의 작은 연대를 통해 균열을 만들어낸다. 아누는 자신의 사랑을 놓지 않고 그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아누의 사랑을 지지해 주는 건 프라바와 프라바티다. 자신을 감추기 바빴던 프라바는 속내를 드러내며 동료들에게 한발 다가선다. 파르바티가 끝내 뭄바이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날, 아누와 프라바 또한 외로울 동료의 귀향길에 동행할 결심을 한다. 모두 미세한 저항의 순간들이다. 영화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비장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깊은 애정으로 포착한다.

파르바티의 이사를 돕기 위해, 세 여성은 마침내 뭄바이 남쪽 라트나기리 해안가로 향한다. 그곳은 자연광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평화로운 장소로, 뭄바이의 긴 밤, 인공빛과 대조되는 여유롭고 빛나는 하루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프라바는 직업 정신을 발휘해 바다에 빠진 남성을 구조하고, 그를 통해 삶에 다시금 손을 내민다. 아누는 몰래 동행한 연인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며, 파르바티는 새 집과 새 직장을 얻는다. 꿈을 좇아 당도한 대도시에서는 정작 꿈조차 꿀 틈 없이 고단했던 세 여성의 삶이 낯선 라트나기리에서 작은 꿈을 만나,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뤄내며 평화로운 한순간을 맞이한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빛과 어둠, 상상과 현실이라는 두 축을 섬세하게 교차시킨다. 뭄바이의 현실은 어둡고 무겁지만, 그 안에서도 인물들은 빛을 상상하고, 서로를 통해 빛을 확인한다. 굵직한 서사보다는 인물들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이는 카메라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적 순간들, 미세한 감정의 떨림과 이해의 순간들을 포착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세계에 천천히 스며들게 만든다. 꿈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도시에서, 꿈을 꾸는 일 자체가 저항이 된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국적을 넘어 보편적인 울림을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파르바티는 이제 더 이상 쫓겨나지 않을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프라바와 아누는 그 옆에 있다. 세 여성은 그렇게,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된다. 도시가 빛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통해 빛을 상상하는 것. 그 작고 끈질긴 상상이야말로, 이 영화가 세상을 향해 조용히 건네는 희망의 조각이다.

인도 영화로는 30년 만에 제77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뉴욕타임스, 인디와이어, 필름 코멘트 등 주요 매체에서 ‘올해 최고의 영화’로도 꼽혔다. 국내에서는 4월 23일 개봉해 현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