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침략자>가 여러 장르를 경유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내게 이 작품은 로맨스를 가미한 멜로드라마다. 그것도 일반적인 장르영화라기보다는 후반부에 접어들면 점차 더글러스 서크풍으로 발전해가는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무표정의 신지(마쓰다 류헤이)와 달리, 나오미(나가사와 마사미)는 지속적으로 감정을 변화시키면서 영화 마디마디에서 그 표정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활기를 잃은 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엔딩의 모습이다. 그 표정은 개념을 빼앗긴 다른 인간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소유의 ‘의’를 빼앗긴 청년, ‘자신’이라는 개념을 빼앗기며 남과 더이상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경찰, ‘일’의 개념을 빼앗기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장 등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의 족쇄에서 해방된 인간은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거나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나오미만이 활기를 잃는다. 하지만 영화 엔딩의 신지를 보자면 사랑은 개념이 아닌 ‘실천’이다. 그러니까 신지는 사랑을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그것이 실재함을 증명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엔딩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는 이 장면에서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의 엔딩을 떠올렸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언해피한 해피엔딩’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반복적으로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현실의 비현실성’을 드러내려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는 일본 특유의 촬영 제약 때문에 사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에서 촬영한 <은판 위의 여인>(2016)에서도 이 기법을 사용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단지 현실적 제약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오미와 신지가 집을 떠난 후 일련의 장면에서 그들이 탄 차 바깥의 풍경, 호텔 창문 너머의 흐릿한 광경, 그리고 절벽 앞에서 마주한 묵시론의 풍경 등에서 두 사람과 외부 공간을 이상하리만치 분리시키려 한다. 이 장면들은 지구가 종말에 이르는 과정이자 최상의 가치로서의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