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 감독님 기억해요? 사실 제가 <신과함께> 출연을 고민했었어요. 김용화라는 연출자에, ‘신과함께’라는 엄청난 웹툰에, 게다가 해원맥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준다고 하니, 너무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때 미리 약속한 작품 스케줄 픽스가 안 된 상황이었죠.
정시우: 출연을 확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군요.
주지훈: 네. 그런 상황에서 술자리에서 갑작스럽게 감독님을 만나게 된 거예요. 만났는데 감독님이 보자마자 “(90도 폴더) 아우~ 지훈 씨, 안녕하세요. 김용화입니다.” 하는데, 와~ 말투나 행동 자체가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하는 투가 아닌 거예요. 한참 후배인 저에게 깍듯하게 대해주시는 감독님 반응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엉뚱한 반응이 튀어나왔어요.
정시우: 사람이 놀라면 그렇게 되죠. (웃음)
주지훈: 그날 제가 또 너무 솔직했지 뭐예요. “감독님, 저는 솔직히 이 대사는 별로인 것 같아요. 저는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였을 수 있어요. 실수였던 거죠.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 사람이 움찔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아, 네네, 지훈 씨, 그건 저희가 차차 이야기하면서 풀어가요.” 토닥이시는데 말도 계속 안 놓으세요. 그때 제 마음이 확 열린 거예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한 거죠. 이후부터는 감독님 만나면 저절로 “(기합 바짝) 아우~ 감독님 안녕하세요!”가 됐어요.
김용화: 처음 만났을 때 ‘노말(normal)’하진 않더라고요. (장난스럽게) 사실 제가 어디 가서 그렇게 하면 보통 사람들이 함께 엎드리거든요. (좌중 폭소) 이런 애는 처음 본 거예요. 뭔가 심하게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구나, 뭔가 좀 불안하구나, 했어요. 본인은 여유로운 척하는데, 아닌 거죠. 필요 이상으로 웃음소리도 크고.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그득한 걸 느꼈어요.
정시우: ‘노말’ 하지 않음에도 (웃음), 손을 계속 내민 이유는 뭔가요?
김용화: 저는 가능성을 보거든요. 화면을 보다 보면 ‘어? 저 배우 잘하겠다. 작품과 잘 맞겠다’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오는 순간들이 있어요. 지훈이도 그런 느낌을 가지고 만났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 굉장히 매료됐어요. 남자가 봐도 너무 멋진 남자인 거예요. 주지훈을 실제로 보면 외모에서 확 오는 게 있잖아요?
정시우: 아우라가 있죠.
김용화: 유전자가 일단 남다르니까. 몸 자체가 한국사람 같지 않은데, 남자다우면서도 귀엽고 순수한 면모들이 믹스돼 있으니까 굉장히 끌렸어요. (짓궂게) 그에 비해 태도는 좀 이상하긴 했지만. (좌중 웃음)
주지훈: 감독님 대본은 참 신기해요. 글로 보면 사실…그렇게 재미있지 않거든요. (일동 웃음)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조금 설명적이기도 했고, 지옥도를 어떻게 표현할지 글로는 안 보이니까 잡히지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김용화 화법’으로 현장에서 만나면, 와, 엄청 재미있어져요. 시나리오보다 훨씬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는 거죠.
정시우: 시나리오보다 더 재미없게 나오는 경우가 많지는 않잖아요?
주지훈: 잘 쓴 시나리오일수록 리스크가 더 크긴 하죠. 그만큼 나오는 게 굉장히 어렵거든요. 글은 너무 좋은데, 이 글을 영상으로 옮길 수 있을까란 의심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정말 감독의 예술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스타 감독들이 배우들을 옥죌 것 같잖아요? 제가 경험해 본 바로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단역 배우들 이야기도 더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김용화: 하면 할수록 몰라서 그래. 처음엔 겁 없이 하다가,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경험을 통해 터득하는 거죠.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서 관객 반응이 오거나 하면, 정말 여러 생각이 들어요. 집단이 뭔가 일치된 걸 만들어낼 때는 겸손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는 거죠.
주지훈: 정말이지, ‘리스펙트’는 강요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사람의 성품과 인품과 그런 것들을 보고 존경이 저절로 생기는 거지. 그런 것들을 많이 배웠죠.
문득 나는 두 사람이 어떤 ‘인(因)과 연(緣)’으로 이생에서 만났을지 궁금했다. 확실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귀인이지 않을까.
김용화: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잖아요.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는 시기가 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중요한 시기가 있는데, 어른이 된다는 건 후자를 언제 느끼는가라는 생각을 해요. 100%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누구나 전자를 살아요. 안 살지 않는다고요.
정시우: 평생 전자로만 사는 사람도 많을 테고요.
김용화: 조심스럽긴 한데 그렇죠. 어쩌면 이 이야기를 하는 저 또한 전자로 살고 있는 것일지 몰라요. 제 경우엔 <국가대표>라는 영화가 분기점이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정확히 말하면 태도는 비슷해요. 그런데 그게 ‘진심이냐, 아니냐’로 많이 옮겨졌어요. 지훈이는 그게 저보다 훨씬 강한 직종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후자로 살기엔 너무 어려운 직업이죠. 그런데 <신과함께>를 하면서 무엇인가를 느낀 것 같아서 뿌듯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관계성 같은 것들을요.
주지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감독님도 그렇고 정우 형이나 우성 형도 그렇고, 제가 묻는 어떤 사안에도 단언하지 않아요. 어떨 땐 대답이 다 다를 때도 있어요. 그럼 저는 거기에 제 생각을 입히며 고르는 거죠. 행복한 상황인 거예요. 그랬더니 참 신기한 게, 10년 동안 앓던 불면증이 사라졌어요.
정시우: 저런, 불면증이 10년이나요?
주지훈: 제가 불면증이 얼마나 심했냐면, 지금은 드라마 현장이 그 정도는 아닌데, 이전에는 일주일 내내 밤샘 촬영도 하고 그랬어요. 중간에 2시간 정도 여유가 나면 그때 ‘쪽잠’이라도 자는 거죠. 그런데 그 2시간을 자기 위해서도 수면제를 먹어야 했어요. 그 센 수면제를 먹고도 2시간 후에 눈을 딱 떴고요. 누가 깨우지 않아도 혼자서. 그 정도로 심했어요. 제가 멘탈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죠.
김용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어디 있어. 없어. 강한 척하는 거지.
주지훈: 요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다 보니, 기운도 좋아졌나 봐요.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말해요. 그 말들이 참 고맙죠.
김용화: 지훈이가 이른 나이에, 직종에 대한 밑천도 없을 때 너무 큰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게 사실은 정말 선택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시쳇말로 ‘로또’ 맞았다고 하죠.
정시우: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죠.
김용화: 네. 일단 그 시대 트렌드가 좋아할 만한 외양을 갖춰야 하고, 말하는 투나 뉘앙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품과 맞물려서 태어나는 건데, 그걸 약관의 나이에 딱 만났죠. 그런데 그런 배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전례들이 많잖아요.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았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하느님이 그걸 망가뜨리지 않고, 어떤 운이 작용해서 외부적인 어떤 악재를 하나 준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정시우: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열망이 지훈 배우에게 그득한 것 같다고 했잖아요? 어느 지점에서 그런 걸 느끼신 건가요.
김용화: 드글드글한 근성을 본 거죠. 재능에 비해서 기회를 덜 만난 케이스라고 생각했어요. 가지고 있는 내공은 많은데, 보여줄 수 있는 창구가 적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자신도 모르게 비집고 나온 게 아닌가 싶었죠.
정시우: 첫 만남에서 주지훈이란 배우의 많은 걸 보셨네요.
김용화: 많은 사람이 그런 것 같아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요. 그런데 사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대중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거든요.
정시우: ‘타인은 생각보다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김용화: 가령 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매일같이 신경 쓰고 있다고 가정해 봐요. 불변의 법칙이, 10명이 있다면 그중 1명은 나를 엄청 좋아한대요. 그리고 2명은 날 엄청 싫어해요. 나머지 7명은 아예 관심이 없고요. 역으로, 타인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는 경우. 그런 사람을 보고도 1명은 엄청 좋아하고, 2명은 ‘저놈은 저렇게 살면서 고마움을 저렇게밖에 표현 못해?’ 라고 하고, 나머지는 별 관심이 없대요. 정신분석학까지 가면 복잡한데, 생각보다 타인은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정시우: 굉장히 공감하며 듣게 되네요.
김용화: 가령 어떤 사람이 아무리 주지훈을 사랑한들, 온종일 주지훈만 생각하진 않잖아요. 자기 인생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지훈이가 여러 경험을 통해 빨리 터득해서 배우로서든 남자로서든 잘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지나고 보니까 그래요. 지훈이가 저와 함께 보낸 시간도 있지만, <아수라> <공작>을 통해 기라성 같은 배우 감독들과 2017∼2018년을 겪으면서 어마무시하게 성장한 것 같아요. 사람이 이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요.
주지훈: 제가 감독님과 형들 만난 걸 되게 감사하는 게, 세상과 혼자 외롭게 싸우다가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세상을 겸허하게 바라보는 법도요.
정시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신과함께>가 그렇게 큰 성공을 했는데 그 성공이 선물해 준 게 그 무엇도 아닌, ‘겸허’라니…너무 아름다운 거 아닌가요.
김용화: 진짜 그렇게 돼요.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면.
주지훈: 단순히 관객 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감독님 기억나세요? 버스 타고 무대인사 하러 다닐 때 다들 눈시울 붉어진 일. 지금도 이 이야기하면 울컥할 텐데, 누군가가 “이거 보세요!” 하면서 SNS를 보여줬어요. 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엄마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신과함께>를 보고 나와서 막 찍은 것 같더라고요. 그 사진에 이렇게 글이 쓰여 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신과함께>를 보고 나와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리고 있다.” 순간 너무 감동해서, 하…
정시우: 영화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군요.
주지훈: 네. 감독님이랑 저랑 눈이 빨개지는데, 들키면 서로 부끄러우니까 ‘(눈에 힘 빡 주고) 어헝?’ 했던 기억이 나요.
김용화: 그런 순간을 만나면 사람이 오히려 더 겸손해져요. 영화라는 걸 함부로 만들면 안 되는구나, 정서가 되게 중요하구나를 느끼게 되죠.
주지훈: 그런 경험을 겪고 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내 취향이 아니면 일단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봤어요. 지금은 달라요. 작품이라는 게 제 취향의 사람들만 보는 게 아니잖아요. 또 제 취향이 정답인 것도 아니고요. 보다 많은 관객을 배려해서 만들어야 하는구나,를 알게 된 거죠. 다만 기준이 조금 흐려진 건, 부작용 같긴 해요. (웃음) 다 좋아 보이니까. 뭐든 다 오케이야~ (웃음)
정시우: 긍정 열매가 열렸군요. (웃음)
주지훈: 제가 <아수라> <신과함께> <공작> 순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사실 이전에는 어떤 선입견이 있었어요. 톤 앤 매너 자체가 다른 영화들임에도 이전에는 <신과함께>처럼 엔터테이너하고 뭔가 라이트하게 다가오는 영화는 고뇌가 덜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완전 오판이었어요. 그 어떤 작품도 단 1초도 허투루 하는 게 없어요. 어두운 영화를 찍는 연출자가 더 고뇌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고민의 무게는 똑같아요.
정시우: 중요한 포인트네요.
주지훈: 소고기를 찌느냐 굽느냐의 문제일 뿐, 소에게 좋은 사료를 먹이고 정성스럽게 방목시켜서 키우는 건 똑같아요. 같은 고민을 하는데 표현 방식이 다른 것뿐이라는 걸 느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