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일현(류준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 <돈>은 여의도 증권가에 발을 들인 신입 증권맨 일현이 ‘돈맛’을 알아가는 이야기다. 일현이 더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건 각각의 이유로 그를 압박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 일현에게 돈에 대한 욕망을 불어넣고 그를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는 작전 설계자, 번호표는 배우 유지태가 연기했다. 등장만으로도 극에 긴장을 더하던 위협적인 캐릭터. 과묵함과 예리함을 고루 갖춘 유지태의 힘이 돋보인 캐릭터다.

데뷔작 <바이 준>부터 <돈>에 이르기까지, 유지태는 어떤 장르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 속에서 제 매력을 뽐내왔다. 그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해보는 시간. 유지태의 출연작을 장르별로 나눠 그중 대표 캐릭터를 하나씩 꼽아봤다.


장르가 코미디

| <주유소 습격사건> 페인트 역

새하얗게 탈색한 머리로 각목을 들고 주유소를 때려 부수는(!) 유지태. 지금으로선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다. 한국 코미디의 시작점에 서 있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은 데뷔작 <바이 준>에 이은 유지태의 두 번째 출연작이다. ‘심심한데 주유소나 털어볼까’란 마음으로 주유소를 습격한 청춘들의 난투극을 담은 이 영화에서 유지태는 공부와 입시 위주의 한국 교육에 환멸을 느껴 가출한 화가 지망생 페인트를 연기했다. 간간이 등장하는 그의 분노조절장애 연기가 인상 깊은 작품. 이후 <가위> <동감> 등에 줄줄이 출연한 유지태는 한국 영화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장르가 로맨스

| <봄날은 간다> 상우 역

유지태는 장르별로 한국 영화에 이정표를 남긴 작품들에 출연해왔다.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로맨스 영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관계는 한 계절도 버티지 못하고 삐걱이기 시작한다. 스크린 밖에서 우리가 겪는 보통의 연애와 다를 바 없던 상우와 은수의 연애는 많은 이의 공감을 샀다. 단호하게 이별을 선언한 은수에게 상후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 묻던 장면, 완전한 이별을 고한 후 연인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야 말던 상우의 모습 등은 현실의 로맨스를 군더더기 없이 담아낸 명장면. 상우가 켜켜이 쌓은 감정의 결을 섬세히 구현해낸 유지태가 영화의 매력을 배로 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가 스릴러

| <올드보이> 이우진 역

지고지순하고 수더분한 이미지의 역할을 주로 맡아왔던 유지태에게서 악의 얼굴을 발견한 건 박찬욱 감독이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는 극 중 오대수(최민식)에게 치밀한 복수를 시행하는 이우진을 연기했다.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에 갇혀 살며 성장을 거부한 캐릭터.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로 40대 초반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영화계를 대표하는 굵직한 이름들 사이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낸 유지태는 충무로의 스타에서 멈추지 않고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여담이지만,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제5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작 역시 주목해볼 만하다. <올드보이>와 함께 그의 출연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감독 홍상수)가 경쟁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두 편의 경쟁부문 후보작의 출연 배우로 칸에 입성한 유지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장르가 공포

| <남극일기> 민재 역

재난과 공포 장르를 결합한 <남극일기>는 영하 80도의 혹한, 남극 도달 불능점 정복에 나선 6명의 탐험대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6개월간 낮이 지속되는 남극은 그야말로 순백의 공간이다. 흰 지평선과 눈부신 태양, 끝도 없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남극을 정복하려다 이곳에 갇히고 만 대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과 마주한다. 유지태는 남극 한복판에서 발견한 80년 전 ‘남극일기’에서 가장 먼저 수상함을 느낀 탐험대의 막내 민재를 연기했다. 광기에 물들어 대원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던 탐험대장 도형(송강호)과 정면으로 맞서던 인물. 이들의 뒤덮은 눈보라 한가운데에서도 힘을 잃지 않던 그의 첨예한 눈빛이 돋보인 작품이다.


장르가 범죄

| <심야의 FM> 한동수 역

생방송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선영(수애)에게 정체불명 청취자 동수(유지태)의 전화가 걸려온다. 동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방송을 하지 않으면 선영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선영은 피 말리는 사투를 시작한다. 유지태 필모그래피 속 악역 끝판왕 캐릭터. <심야의 FM>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캐릭터, 동수에 완벽 이입한 유지태의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체중을 증량하고 삭발을 하며 외적인 변화를 준 건 물론, 캐릭터의 고독함에 이입하기 위해 “3개월간 독방에 갇혀서 지냈다”(<씨네21> 1197호)고. 노력의 결과(!)가 반영된 건지, <심야의 FM>에선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유지태를 만날 수 있다.


장르가 드라마

| <스플릿> 철종 역

유지태의 필모그래피에 반복은 없다. 소소한 변화일지라도 그는 늘 도전하며 제 연기 영역을 확장시켜나갔다. 촬영 몇 개월 전부터 볼링을 연습해야 했던 볼링 영화, <스플릿>은 그의 첫 스포츠 드라마다. 과거 볼링계의 전설로 불리며 이름을 날렸지만, 불운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물 철종을 연기했다. 지저분한 헤어스타일과 수염 등 이전에 볼 수 없던 유지태의 외적인 모습에서부터 신선함이 느껴지는 캐릭터. 시나리오 속 까칠하고 어두운 모습으로만 묘사됐던 철종은 유지태를 만나 틈틈이 실없는 모습을 선보이고, 재치와 넉살을 갖춘 유연한 캐릭터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장르가 미스터리

| <사바하>

‘<사바하>는 유지태의 힘을 믿고 가는 영화’라고 설명해도 될까. 평범하지 않은 의상과 장발의 헤어스타일. 외형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는 김동수(유지태)는 영화의 중심에 선 종교단체, 사슴동산의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동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해 관객에게 가장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장재현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배우다.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기에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건실한 청년의 느낌을 지닌 배우가 연기하길 바랐고, 유지태 배우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다”며 캐스팅 비하인드를 전했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