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이후의 성공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 혹은 소포모어 슬럼프(Sophomore slump)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영화에서도 이 법칙은 꽤 높은 확률로 적용된다. 데뷔작에서 뛰어난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 두 번째 영화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징크스를 깬 감독들이 있다. 그들은 누굴까. 국내외 감독 5명을 소개한다.


조던 필

<겟 아웃> → <어스>

조던 필 감독

조던 필 감독은 소포모어 징크스 관련 포스트를 작성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인물이다. 해외에서도 조던 필의 신작 <어스>의 흥행이 전작 <겟 아웃>을 넘어서는 현상을 보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해 갔다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조던 필의 두 번째 연출작 <어스>는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전 세계 수익 1억 달러(우리 돈 약 1285억 원)를 돌파했다. 게다가 <어스>의 흥행 속도는 전작 <겟 아웃>보다 일주일 이상 빠른 것이다. <겟 아웃>은 약 2억 55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 속도라면 <어스>가 <겟 아웃>의 성적을 뛰어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겟 아웃>

조던 필은 어떻게 소포모어 징크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꼽자면 욕심을 부리지 않은 선택이 크게 작용했다. 조던 필은 <겟 아웃>의 성공 이후 <블랙 클랜스맨>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KKK단에 잠입한 흑인 경찰 이야기다. 조던 필은 스파이크 리 감독에게 연출을 양보했다. 지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블랙 클랜스맨>은 각색상을 수상했다.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다. 다만 이 영화는 조던 필과는 찰떡궁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면 인종 문제를 다룬 다소 무거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조던 필은 자신이 잘하는 것에 집중했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는 <겟 아웃>에서 봤지만 진지함을 감추는 데 능하다. 그렇게 그는 <어스>를 만들었고 결과는, 대박이다.

<어스>


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 → <펄프 픽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광, 영화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감독이다.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를 공개하자마자 타란티노는 유명해졌다. 그가 비디오 가게 점원이로 일하는 영화광이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신화처럼 여겨진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저수지의 개들>은 말하자만 독립영화다. 홍보할 돈이 없었지만 제작비 15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였다. 평론가들은 천재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 타란티노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싸구려 문화, B급 영화의 감성, 유럽영화 스타일의 조합은 미국과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렇게 영화광에서 영화광이 열광하는 감독이 된 타란티노는 두 번째 영화 <펄프 픽션>으로 자신의 입지를 완벽하게 굳혔다. <펄프 픽션>은 제목부터 영화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펄프 픽션은 싸구려 대중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싸구려 이야기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당시 미국 대학교의 거의 모든 기숙사에는 단발머리의 우마 서먼이 담배를 들고 있는 사진이 인쇄된 <펄프 픽션> 포스터가 붙어 있다고 전한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B급 취향 더하기 B급 취향. 타란티노 감독이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해 간 이유다. 말하자면 조던 필과 같은 전략으로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조던 필이 타란티노 감독의 전략을 받아들인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란

<미행> →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천재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 없이 그들을 천재라고 칭하는 법은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이 말을 증명한다.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아 많은 이들은 보지 못한 놀란 감독의 데뷔작은 <미행>(Following)이라는 영화다. 놀람 감독이 3000파운드(약 4400만 원)로 친구들과 만든 이 초저예산 영화는 로테르담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슬램댄스영화제영화제에 소개되면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놀란 감독을 가만히 둘 이유가 없다. 그렇게 놀란 감독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만들어준 영화 <메멘토>가 탄생했다. 놀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미행>을 찍을 때는 본인 옷을 입고 출연한 친구들과 엄마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었다. <메멘토>를 촬영할 때는 누군가가 준 400만 달러를 100여 명의 스태프와 함께 썼다.”라고 말했다.

<미행>

<메멘토>

놀란 감독의 인터뷰에서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예산의 엄청난 차이가 그것이다. 많은 천재라고 불리던 감독이 두 번째 영화에서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예산은 많은 수익을 거둬들여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은 달랐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데뷔작 <미행>은 앞서 소개한 영화들의 성공에 비하면 다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없었다면 놀란 감독의 두 번째 <메멘토>도 없었을 것이다.


최동훈

<범죄의 재구성> → <타짜>

최동훈 감독

최동훈 감독은 국내에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를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람이다. 케이퍼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직접 차리기도 했다. 데뷔작부터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박신양, 백윤식, 염정아 등이 출연한 <범죄의 재구성>은 최동훈 감독의 스타일을 모두 볼 수 있는 데뷔작이다. 관객 수 약 200만 명을 동원했다. 아주 대박 흥행은 아니지만 <범죄의 재구성>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진짜 대박은 역시 <타짜>다. 관객 수만 놓고 보면 <도둑들>, <암살>에 못 미치지만 최동훈 감독과 <타짜>는 거의 동의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타짜>와 <범죄의 재구성>의 공통점을 찾자면 여러 명의 캐릭터의 등장과 찰진 대사를 꼽을 수 있겠다. 그 가운데 대사의 맛이 일품이다. <타짜>의 대사가 인터넷에서 패러디 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 그 대사의 힘을 대변한다. <타짜>는 약 5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케이블 TV에서 수없이 재방송되는 것을 본 사람과 다운로드해서 본 사람의 수를 모두 더하면 아마도 <도둑들>이나 <암살>보다 더 많은 관객을 만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강형철

<과속스캔들> → <써니>

강형철 감독

2011년 <써니>가 개봉할 무렵 기사를 찾아봤다. 관련 기사의 제목에서 ‘연타석 홈런’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연타석 홈런은 쉽지 않다. 참고로 야구에서 3할 정도의 타율만 유지해도 강타자라고 말한다. <써니>가 500만 관객을 돌파한 뒤 ‘씨네21’과 만난 강형철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번 작품은 흥행에 부담감이 전혀 없었고,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500만명을 넘었으니까 최종 스코어는 550만명 정도 되지 않을까.” 결과는 어땠을까. <써니>의 최종 관객 동원수는 약 745만 명이다. 전작 <과속스캔들>의 약 822만명도 조금 모자란 수치다.

강형철 감독에게 소포모어 징크스가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앞서 소개한 인터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그는 <과속스캔들> 이후 “그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잊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써니>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였다. 흥행에 대한 부담도 갖지 않았다고 하니 <써니>에서 강형철 감독의 영리한 내공, 센스가 톡톡히 발휘됐다.


많은 감독들이 데뷔작에서 호평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을 때 차기작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데뷔작보다 잘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 흥행에 대한 우려, 갑자기 늘어난 예산과 제작환경에 적응하는 것. 모두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버릴 비법을 위에 소개한 감독들의 사례로 생각해보면 답은 하나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힘을 빼야 한다.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면 듣게 되는 말이 바로 몸에 힘을 빼라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강형철 감독은 정말 예외적인 것 같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