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올해의 경향을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전주에서 보게 될 한국 영화 목록은 어떤 방향에서든 자기만의 태도로 세상을 접수하고 나름의 초식을 시도한 영화들로 채워진다. 이걸 직접적으로 소재화한 다큐멘터리도 있다. 목포의 어느 마을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는 ‘괜찮아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다룬 <다행(多行)이네요>(감독 김송미)는 기성세대의 질서가 강요하는 상투형이 싫어 각자 내면의 망명 정부를 만들어 도피했던 젊은이들이 그들 각자만큼이나 예민한 동료 들을 만나 조심스럽게 부대끼면서 마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다룬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게 무의미한 이 공동체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조화를 의심하는 가운데 여하튼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화를 이뤄낸다.
<다행이네요>는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의 이상을 의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 밖의 대다수 한국영화들은 공동체 내의 조화보다는 불화에 더 주목한다. 김민경의 <리메인>은 무정자증인 남편과 살면서 성불감증을 갖고 있는 여자 주인공이 하반신 마비 상태인 남자에게 무용 치료 강습을 하면서 알게 되는 몸의 소통 과정을 다룬다. 그가 새로 알게 된 삶의 감각과 기쁨은 이미 균열돼 있던 결혼생활의 파탄을 불러오고 그의 삶은 어떤 형태의 봉합도 불가능한 상태를 맞는다. 이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얘기를 극적 문맥으로 강조하기보다는 시간을 감각하려는 절실한 카메라로 대한다. 아버지의 묘 이장을 앞두고 모처럼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장>(감독 정승오)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불화는 지긋지긋할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서로 거울과도 같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선대로부터 동시에 물려받은 가난을 어느 누구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장이라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관습을 억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떨쳐내고 싶어도 떨쳐내지 못하는 봉건적 가족주의의 의무를 증오하면서도 실행한다. 이 집단 자해극과도 같은 소동극의 일단에서 그들은 여하튼 연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들 각자의 존엄을 긍정한다.
실업과 가난의 악순환을 겪으며 가족이 멸망한 가운데 홀로 남아 악전 고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애틀란틱 시티>(감독 라주형)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조국의 현실을 부정하고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맞이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폐허를 어둡게 그려낸다. 욕창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둔 집안에서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 <욕창>(감독 심혜정)은 죽음을 앞둔 가족의 육체를 늘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가족들이 벌이는 욕망의 난장판을 다루지만 그것 역시 사람 냄새나는 인생의 단면임을 역설적으로 긍정한다. 이혼을 결심한 부모 밑에서 어린 남매가 겪는 혼란을 다룬 <흩어진 밤>(감독 김솔, 이지형)은 핵가족을 지탱할 명분도 의지도 잃어버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최소 존재 근거인 양육 받을 권리를 일부 상실하게 될 아이들이 감당할 슬픔을 아이들의 가냘픈 몸과 행동을 통해 격렬하게 증거한다. 어떤 해답도 제시될 수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가슴에 남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 <내가 사는 세상>을 출품한 최창환의 두 번째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은 노동착취가 일상화된 세상과 불화하는 주인공을 다루면서도 전작과 달리 자기만의 놀이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다짐을 강조하는 결말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의 시스템만큼이나 개인에게 방점을 찍는다. 정다운의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일본에서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았던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을 조망한다. 어느 쪽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가 살았고 살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 공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품는 건축물을 설계했던 그의 성취를 마치 그 공간을 직접 걸어보고 체험하게 하는 듯한 카메라로 화면에 새겨놓는다. 이 과정은 퍽 감동적인데 정치와 역사가 강제했던 세상과의 불화를 자기만의 이상 실현에 매진하는 노력을 통해 조화를 구현하는 결과로 바꿔놓은 흔적을 이타미 준의 건축물이 보여주기 때문이다.